






너도, 갈릴리로 가라!
마태복음 28장 1~10절
서론
예수님께서는 인류역사에 유일하게 부활하신 인물입니다. 죽음을 이기다, 굉장합니다. 누구는 부활을 비과학이라 해요. 당연하지요! 하나님과 하나님께 하시는 일은 모두 비과학, 초과학입니다. 모든 일이 증명되고 이해된다면 종교의 가치가 있을까요? 종교의 가치는 신비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비함이지만 부활 이후의 역사는 상당히 현실적입니다. 살아생전의 영향력보다 죽은 이후 영향력이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살아생전에는 3년 사역에 5백 명 남짓의 신자를 얻었지만 죽음 이후에는 세계의 절반을 얻습니다. 살아생전에는 12제자에게 버림받았지만 죽은 이후에는 유다를 제외하고는 순교의 충성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부활이 증명되고 스승의 인격이 진실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인간경영을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에게 명하십니다.
7절,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10절,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와 만나자!”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시고, 그 자리에서부터 새롭게 사명을 주시며 될텐데 왜 그 먼 길 갈릴리까지 오라고 하셨을까요?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는 갈릴리가 아니라 베들레헴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6km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로 가라, 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는 대략 150km, 여기서(강서구 발산동) 대전시청까지 141km이니 얼마나 먼 거리입니까? 승용차가 있었겠어요, 빠른 운송수단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무일푼이기에 나귀나 다른 운송수단을 대여할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부활 몸을 얼른 보여주고 부활했다! 하면 될 텐데 왜 보여주지 않고 뜸들이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영체(靈體)가 되었기에 순간이동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1초 만에 예루살렘-갈릴리 이동이 가능하지만 제자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그 먼 거리를 도보로 갑니다. 하루 길의 시간은 아닙니다. 이틀 이상 걸었을 것입니다. 그 먼 거리를 그들이 당신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갔던 것에 대한 심술을 부리고 있는가요? 여기에 예수님께서 사람을 다루는 법, 즉 인간경영법의 원리가 있습니다.
갈릴리로 가라! 이 명령에는⋯
갈릴리는 이스라엘 북쪽 변방입니다. 정통 유대인에게 갈릴리인들은 비정통, 비주류, 순혈이 아니라고 괄시를 받았습니다. 그만큼 버림받은 땅, 하찮게 여겨지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지만 나사렛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인이 되고 ‘나사렛 예수’가 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났고 3년을 훈련시킵니다.
3년이 지난 지금,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배신자들이 되고 맙니다. 교만 때문이지요. 주님을 쫓아다니면서 갈릴리어부 출신들이 영광을 많이 받았습니다. 3년의 제자훈련은 누가 크냐? 로 신경전을 벌이는 막다른 데까지 왔습니다. 훈련의 한계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야지 교육만으로는 안 됩니다. 교육은 아는 것은 많게 하지만 인격과 성품 변화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훈련의 한계입니다. 제자훈련으로도 유명하고 싸움박질로 유명한 어느 교회가 증명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들의 환영에서 자부심이 하늘까지 높아졌습니다. 군중들이 만들어줄 지위와 명예와 영광에 눈이 멀게 됩니다. 강도 높게 훈련받았던 세상 영광과의 ‘거리넓히기’는 순식간에 좁혀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처지, 소명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를 택했을까? 갈릴리인의 장점, 특히 갈릴리어부들의 좋은 점은 무엇입니까?
-투지입니다. 평생을 바다에서 거센 파도와 싸우는 그들은 전쟁터에서 평생을 보내는 백전노장의 그와 같은 열정과 투지가 있습니다.
-복종입니다. 바다에서 선장의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배는 파도와 싸워 이길 수가 없습니다. 갈릴리어부들은 선장의 말에 일사분란, 복종하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동지애입니다. 그들은 배위에서 바다와 싸우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지 죽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동지애, 형제애가 강합니다.
뿐만 아니라 갈릴리 어부들에게는 스승의 손에 쉽게 휘어지는 겸손함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3년 따라다니면서 도시물(?)을 먹었다고 갈릴리인의 순수함을 버렸습니다.
-서로 높은 지위와 영광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몸을 아끼게 되고 투지가 사라집니다.
-스승의 말씀에 대한 복종을 버렸습니다. 배신자가 있다고 했을 때도 듣지 않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라 하셨을 때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형제애까지 사라졌습니다. 나는 배신하지 않아도 저는 배신한다, 그렇게 형제들을 깔보고 의심하는 마음들이 자리잡았습니다.
3년의 교육은 지식과 건방심만 심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갈릴리의 그 마음을 회복시키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150km나 되는 먼 길을 오라 합니다. 그 먼 길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는 생각에 기쁨도 있지만 자기들의 잘못도 있기에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로 가는 그 도보여행에 제자들의 마음도 오락가락합니다. 3년 전에 가릴리바다를 떠나면서 얼마나 많은 꿈을 꾸고 계획을 세웠습니까? 지금 그들은 금의환향이 아니라 배신자 배교자의 신분으로 처음의 그 자리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손에 쥔 것도 없이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그 먼 길! 무거운 길을 걸으며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돌아봅니다.
마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성을 만나게 하시고 일주일을 침묵 행진을 하게 만듭니다. 침묵 행진 속에서 무얼 생각했을까요? 과거 조상들의 40년, 자기들의 삶을 뒤돌아보았습니다. 얼마나 후회되고 죄송하고 죽을 죄를 지었는지⋯ 여리고군대가 뛰쳐나올 위기의 순간이기에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합니다. 엄청나게 믿음이 생기는 순간이요 기간입니다.
제자들의 150km도 같은 침묵의 행진입니다. 그들도 여리고성 앞처럼 침묵에서 생각합니다.
-왜 이런 신세가 되고 말았을까?
-어디에서부터 순수함을 놓치기 시작했을까?
-선생님을 무슨 면목으로 만날까?
결국 제자들을 이런 초라한 신세로 만들어 버린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들입니다. 자신들의 교만함, 주님께서 보시고 좋아하셨을, 갈릴리인들의 그 순수함을 놓치고 도시사람이 되어 온갖 교만으로 치장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교회공동체는 섬김, 겸손의 공동체입니다. 제자들은 이걸 상실한 겁니다. 군중들이 그들을 우쭐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그룹은 하나님나라의 희망대안 세력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공동체가 섬김과 겸손의 공동체가 되려면 원점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불러주시기까지는 전혀 주목받지 못하던 자신들, 그 때의 겸손함과 소박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느새 교만해져 버린 마음을 갈릴리에서 털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리로 모이도록 한 것입니다. 결코 네 근본을 잊지 말라! 네 직분이 12제자라고 그걸 특권으로 지위로 계급으로 생각하지 말라~ 너는 본래 촌구석의 어부였느니라! 그걸 상기시키려 하심입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의 내용입니다. 목동으로 출발하여 한 나라의 재상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직하고 청렴해서 왕의 신임을 혼자 독차지했습니다. 그러면 꼭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재상의 집에 초대를 받아 방문했다가 한쪽 구석에 자물쇠가 잠긴 방을 발견했습니다. 무슨 방인데 자물쇠를 채웠냐고 했더니 재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웃기만 합니다. 이게 간신들에게는 빌미가 됩니다. 그 안에 온갖 보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정직하고 청렴한척 했지만 뇌물을 수없이 받아 채워놓았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왕의 귀에까지 들어갑니다. 왕은 감찰관을 보내 방문을 열라고 했지만 재상은 이것만은 제발 그냥 놔두어 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왕은 더 이상 의심스러웠습니다. 강제로 문을 열었더니 그 안에는 누더기, 목동의 지팡이, 헌신이 있었습니다. 재상은 교만이 나오고 뇌물에 대한 유혹을 느낄 때마다 방문을 열어보면서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나는 누구더냐? 나는 별 볼일 없는 목자 출신이다. 항상 그걸 잊지 말아라!’
그래서 더욱 청렴한 재상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누가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가, 나를 힘들게 하는 최고의 상대는 거울 속에 들어있습니다. 거울 속에서 보여지는 ‘나’입니다. 그 ‘나’는 바로 자존심입니다. 누군가의 말 한 마디로, 표정 하나로 내 자존심이 구겨지고 상처를 받을 때 목회자로서 힘듭니다.
자존심은 겸손을 놓친 데서 나옵니다. 내가 누구였나? 40년 전의 나! 알량한 자존심조차 없는, 자신감 결여 신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를 오늘의 나로 세우셨습니다. 여러분에게서 부당한 대접이나 평가를 받을 때가 있습니까마는 그래도 언짢을 때면 옛날의 나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초라하고 형편없었던가? 그 마음이 내가 돌아가야 할 ‘나의 갈릴리’입니다.
인도선교사 윌리엄 케리는 본래 구두수선공입니다. 누가 “당신은 옛날에 구두를 만드는 사람에 불과했다” 평가절하하자 그는 “아닙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지 못하고 겨우 수선이나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겸손하게 정정했습니다. 그 인격 앞에 다시는 그를 폄하하지 못했습니다.
겸손은 성도들에게 최고의 힘이요 무기입니다. 베드로와 갈릴리어부들은 겸손이라는 무기를 놓아버리고 무장해제 당합니다. 제자들에게 사단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겸손의 무기를 손에 쥐어 주려 주님께서는 갈릴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내가 돌아가야 할 겸손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50km의 침묵 자체를 책망으로 처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책망도 없으신채 고기를 잡게 하신 다음에 숯불에 구워서 조반을 먹자~(요21:12) 하십니다. 밥 먹자! 그건 어떤 책망보다도 그들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고 용서이고 위로입니다.
마크 러틀랜드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세 가지 말을⋯ ‘너를 사랑해’ ‘용서해줄게’ ‘밥 먹자’로 정의합니다. 모두 은혜의 말입니다. 사람들은 은혜를 그리워합니다. 교회 안에서 은혜의 말을 듣고 싶어하고⋯ 은혜로운 표정을 보고 싶어하고⋯ 은혜로운 복음을 듣고 싶어합니다.
이런 은혜의 체험이 있기에 베드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벧전 5:10), 바울은 “내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왜 갈릴리로 부르실까요? 은혜 체험입니다. 그들은 실패자요 깨어진 자입니다. 주님께서는 3년 전의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장소에서 제자들을 만나주십니다. 스스로 실패자임을 자인하게 자각하게 하고⋯ 조반을 먹자! 은혜의 체험으로 다시 제자로 세우십니다.
주님께서 은혜의 과정이 없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지도자로 삼아 초대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초대교회는 종교권력 집단이 되어버리고 상명하달 명령 집단이 되어버립니다. 베드로는 살아생전에 교황이 되고 제자들은 갈릴리감독, 사마리아 감독, 가이사랴 감독⋯ 등 감투 쓰고 종교 권세자로 행세 할 것입니다. 유대교가 그런 올무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이린 체제는 주님께서 세우시려는 교회공동체가 아닙니다. 철저히 실패를 자인한 사람들이 실패의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주시는 은혜의 손에 붙들릴 때 그때 제대로 된 사명자들이 됩니다.
일본의 인간경영론을 대표하는 3인-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의 인간경영은 기다림.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오다 노부나가는 카리스마 경영.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버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한다”.
3인 중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천부적인 인재 활용술로 경쟁자를 제압하며 패권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어느 방법입니까? 우리에게는 원수 같은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입니다. 울 때까지 기다린다! 도쿠가와는 울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만 주님께서 그가 울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면서 끝까지 기다리시는 방법을 택하십니다.
저도 기다림의 목회입니다. 카리스마 목회는 목사는 편한데 교인들이 힘듭니다. 기다림의 목회는 교인들은 편한데 목사는 힘듭니다. 그러기에 기다림의 목회를 아는 이들은 기다려줌에서 자신들을 성찰합니다. 그러면서 봄눈이 녹듯 서서히 변화가 되면서 든든한 동역자가 됩니다.
결론
오스왈드 샌더스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 두 명을 집중적으로 관리했다 합니다. 베드로와 도마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도마는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충동적이고 도마의 의심은 만성적입니다. 충동적인 기질이나 의심병 환자나 모두 실패자가 됩니다. 지도자로서는 적합하지 못한 기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욱 처참하게 무너진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웁니다. 베드로에게는 요한복음 21장에서 “내 양을 먹이라!” 하십니다. 도마에게는, 손과 옆구리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기 전에는 내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며? 넣어보라! 마리아에게는 만지지 말라! 하셨는데 도마에게는 넣어보라! 하십니다.(요 20:27) 그 일을 위해 갈릴리로 제자들을 초대하십니다.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와 밥 먹자~ 베드로와 도마에게는 더 가까이 불에 구운 생선을 얹어주었을 것입니다.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는 순간들입니다.
여러분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구원의 즐거움과 자원하는 심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순종의 삶을 살았던 그 갈릴리~ 언제 잃어버렸습니까? 지금 당신은 어디에서~ 왜! 그 갈릴리를 잃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손을 내밉니다.
“가까이 와서 나랑 밥 먹자~”
우리도 주님의 그런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곳이 바로 재출발하는 우리의 갈릴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밥 한 번 먹읍시다!
-처음에는 [설교1]을 준비했으나 [설교2]의 설교로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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