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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설교2] 부활새벽에 부른, 랍오니~(요한복음 20:11~18)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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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고서적에서

부활새벽에 부른, 랍오니~

요한복음 20장 11~18절

 

<서론>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인사합시다!

예수님 부활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합시다!

나도 부활합니다!”

 

진짜로 믿어져서 인사하셨나요? 시키니까 하셨나요? 아직 부활을 믿지는 못하지만 시켜서 하셨다는 분은 자리에서 일어서세요! (유머처럼 해야지 사실처럼 하면 분위기가 어색해 집니다.)

 

오늘은 부활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3일 만에 죽음에서 돌아온 날입니다. 너무 굉장하기에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들은 부활절을 기독교의 만우절로 생각해요! 거짓된 부활절로 사기 친다는 거지요!

그래요, 부활절을 믿지 못하는 그 사람들이 사실은 정상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음을 믿는 것이 정상인가요, 믿지 못하는 이들이 정상인가요? 믿지 못하는 이들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믿어질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믿고 산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부활절은 기독교만의 블루오션, 어느 종교도 넘볼 수 없는 영역입니다. 불교에 석탄일이 있고 불당, 불찬가, 불경도 있습니다. 계명도 자비와 자선도 있어요! 어린이불교학교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좋은 점은 모두 벤치마킹합니다. 부활은 벤치마킹 못 해요. 어느 종교도 부활은 흉내조차 못 냅니다. 부활도 없지만 교주들의 무덤을 너무 선전했거든요.

 

석가모니는 인도 능수해안에, 마호메트는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묻혀 있습니다. 공자 무덤은 중국 곡부성에 있습니다. 교주들의 무덤을 너무 신성시하고 자랑한 것이 오히려 부활교리만큼은 벤치마킹 할 수 없게 발목을 잡아버린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뼈 하나라도 발견되면 그 날로 끝장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인격에 기초를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종교들은 기독교의 부활을 조롱하면서도 부활교리를 너무 부러워합니다.

 

부활교리가 얼마나 황홀합니까? 윤리설교보다 십자가 속죄, 부활을 말할 때는 자신이 있어요! 윤리와 행함을 전할 때는 나도 그렇게 제대로 살지 못해요. 그래서 설교하면서도 미안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부활 예수님을 전할 때, 그 의미를 해석할 때는 당당합니다! 내가 제대로 살건 못살았건 예수님은 진리요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새벽에 우는 마리아, “나 어떻게 해?”

 

왜 유일하게 예수님만 부활하셨나요? 인간에게 부활 DNA가 있다면 아브라함도 요셉, 모세, 사무엘, 다윗 같이 믿음의 전당에 오른 성자급 신앙인들이 부활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죽음의 문이 얼마나 강하기에 누구도 죽음에서 돌아오지 못했고 죽음 앞에서는 원통해서 울고 죄송해서 울고 억울해서 울고 속절없이 울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도 보세요!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혹시나 해서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봅니다.

여러 마리아 중에서 막달라 동네 출신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성읍은 디베랴 북쪽 4.8km 지점에 위치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들려 고통 받다 예수님께 고침 받은 이후 예수님 가까이서 봉사하며 사는 여인으로( 16:9; 8:2),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끝까지 남아 지켜보았을 정도로 헌신적이었습니다(19:25). 마르다의 동생이자 나사로 누이인 베다니의 마리아와는 별개의 인물입니다(11).

 

막달라 마리아. 그가 귀신에게 고침을 받았던 것은 벌써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왜 끝까지 추종하고 있을까요? 사실은 예수님에게서 멀어져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녀는 귀신 들렸던 여인입니다. 그것도 일곱 귀신에 들렸으니 얼마나 쎈 귀신에 들렸으며 얼마나 인생이 망가졌겠어요? 여자로서 사랑도 제대로 못했고 화장도 옷매무새조차 모양 나게 제대로 한번 해보지 못한 여인, 산발한 여인, 미친 소리를 중얼거리며 다니던 광녀(狂女)~

한마디로 그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미친 여자 혹은 미친년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과거를 잊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좋게 말하다가도 여자들 시샘이 발동하면 왕년의 미친여자, 미친년 소리가 나옵니다. 그 말은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주홍글씨입니다.

 

주홍글씨라는 말을 알지요? 나다아넬 호손의 소설제목입니다. 청교도 시절, 간통죄를 범한 여인들은 가슴에 간음, 간통-Adultery를 상징하는 'A'라는 주홍글씨의 낙인을 찍고, 사람들 앞에서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주홍글씨에서 여주인공 헤스터는 상대방이 누군지를 침묵한 채 간통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살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친년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그 일행에서 멀리 떠나있을수록 주홍글씨가 사라집니다.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과거와 단절해야 합니다. 과거와의 단절이 새롭게 시작하게 하고 사랑도 결혼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고침 받았다 해도 일곱 귀신에 들렸던 여자라면 누가 쉽게 사랑을 하거나 결혼하려 들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고 과거와 단절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왜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에 그 분이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고쳐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평생 수종을 들면서 살아야 합니다.

 

-영생의 말씀에 눈이 열려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과거와의 단절보다 현재가 주는 행복이 더 컸습니다.

 

그게 전부일까요? 막달라 마리아는 무서웠을 거예요! 예수님 곁을 떠나가면 귀신이 다시 돌아올까 봐,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귀신에게 옴붙을까봐 무서워서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거 있잖아요? ()에서 완치되었는데 두려움 때문에 병원과 의사를 떠나지 못하는 환자들 병원을 떠나면 재발될까봐, 의사가 지켜주지 않으면 죽음이 찾아올까봐 두려움과 염려에서 병원을 떠나지 못하는 여린 환자들 마리아도 그래서 예수님을 떠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의지했던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물론 부활하신다, 예언하셨고 마리아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론과 현실은 따로 놀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으면서도 정작 재림은 믿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들 모습, 마리아에게도 교리와 현실의 괴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도 울고 무덤 안에서도 웁니다. 33년 짧은 생애가 불쌍해서 울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체포-구속-재판-십자가 처형 너무 불쌍해서 울고 있을까요?

 

그것도 포함해서 마리아의 눈물은 한 마디로, “나 어떻게 해!” 그겁니다. 남편을 보내며 남편이 불쌍하다고 살만하니 갔다고 울지만 사실은 당신이 떠나면 나 어떻게 해!” 그것 때문에 웁니다. 아내 떠나보내고 남편들이 웁니다. 고생만 하다 떠난 것이 불쌍하다 울지만 사실은 당신이 떠나면 나 어떻게 해!” 그것 때문에 웁니다. 세월호의 자식들을 바다에 묻고 불쌍하다고, 그 나이에 왜 죽어야 하냐고 억울해서 울지만 사실은 자식이 없이 나 어떻게 살아!” 그것 때문에 웁니다. 마리아도 그렇게 울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져서 울고 있습니다. 시신조차도 거두지 못하고 나는 어떻게 살라고 하느냐, 며 울고 있습니다. 귀신들이 다시 돌아오면 어떻게 사냐며 무서워 울고 있습니다.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는 아직도 예수님은 죽은 시체요, 잃어버린 시신일 뿐입니다.

 

그 예수님이 남긴 교훈들, 기적들 그분에게 고침을 받았던 황홀했던 순간들 그러나 죽은 예수는 그 이상이 되지 못하고 눈물만 남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사건과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그 좋은 마태복음 5~7장의 산상보훈이 큰 능력을 주지 못합니다. 그 말씀이 너무 좋아 산상보훈, 보물과 같은 교훈이라 이름하지만 내 인생에 나 어떻게 해!” 할 때 그 교훈들은 힘이 되어주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그 교훈은 힘이 되는 것이며 내 인격과 성품의 변화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내 인격과 성품이 제대로 변화를 받고 과거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울지만 말고 꼭 만나야 웃음을 되찾습니다.

 

부활새벽에 웃는 마리아, 랍오니~

 

마리아는 무덤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몰려왔겠지요! 앞으로 어떻게 살까? 예수님이 살지 못하면 귀신들이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의 시신이나 부활을 확인하지 않고는 무덤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여인들과 제자들은 모두 무덤을 떠났어도 막달라 마리아는 떠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무덤에 누워있어야 할 시체가 살아서 마리아 앞에 나온 것입니다.

 

14, “이 말을 하고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마리아는 누워있는 예수를 찾은 것입니다. 누워있을 예수님 어찌 되었나, 찾아왔더니 누워계셨던 무덤 돌문이 열리고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부활하신다는 말씀은 듣고 믿었지만 인류역사에 한 번도 없는 사건이기에 그럴까? 생각했습니다.

 

부활. 여럿에게 있는 일이면 믿기 쉬운데 인류가 시작되고 그제나 지금까지도 예수님 딱 한 분만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믿기가 어려운 거예요! 그러나 마리아는 부활을 직접 목격합니다. 너무 반가워 예수님 옷가를 만지려 합니다. 주님은 아직은 만지지 말라 하셨습니다. 마태는 이미 만졌다고 했습니다( 28:9). 너무 반가워서 더 포옹하려고 하니 예수님께서 그 행동을 제지했을까요? 어떤 학자들은 만지기 전에 제지했다고 합니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너무도 놀라고 반가움에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안으려 했겠지요!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감격과 환희에 차서 소리칩니다.

 

16, 랍오니여~ 디다스 칼레~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귀신에 사로잡혔다 고침을 받았을 때 제정신으로 돌아와 불렀던 새생명의 환희에 찼던 부름, 다시 불러봅니다. 눈물 때문에 빈무덤이 부활증거물이 된다는 엄청난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빈무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자 부활의 증거물입니다. 그 앞에서 마리아는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못하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증거물들을 우리는 슬픔의 원인으로만 알고 나 어떻게 해? 그 심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늘 과거를 두려워합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우울했던 기억들, 상처들, 분노들, 억울함 이런 데에서 항상 나는 피해자이고 나만 손해를 보고 나만 홀로 남았다는 피해의식 속에서 나 어떻게 해! 이걸 반복하다 인생을 종치게 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주님을 보며 예수님께서 해 주신 모든 일들이 완성품이 되었음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왜 오셨고 왜 죽으셨을까? 인류의 죄 때문에 오셨고 죄를 멸하러 죽으셨습니다. 죄는 영생하는 생명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도덕으로 윤리로 착하게 살아 착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도 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 정확하게 말하면 구원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를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53!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왕이라 주장하다 처형당하심도 아니고 유대교권자들에게 이단아라고 죽임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자원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인류의 죄를 없애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간의 죄를 처리해야 하는 방법은 무흠자가 대신 죽어 속죄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자격자입니다. 죄가 없는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는 거룩한 하나님 성품을 아직도 지니고 계셨고 거룩성 유지를 위해 동정녀 몸에서 출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몸에 죄를 덮어쓰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자연사()가 아닙니다. 죄의 해결을 위한 죽으심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을 하지 못하면 죄를 없애려는 예수님의 행동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그 속죄사역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활하게 되면 예수님의 신분과 속죄사역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증명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신분이며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지셨고 그가 수행한 속죄사역의 미션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증거입니다. 그 말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속죄사역을 받아들인 이들에 한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의인의 신분을 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입성자격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합니다(53:4).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나음을 받았도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그 말씀을 믿고 진정으로 과거와 화해합니다. 드디어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어둠을 극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이 주는 능력의 힘입니다!

 

<결론>

예수님의 무덤에서 울던 막달라 마리아! 한 때는 귀신 들렸던 여자 마리아, 과거가 두려워 육신의 예수님을 떠나지 못했던 여자! 그러기에 죽은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덜 두렵습니다. 그러나 죽은 시신은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하고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한다면 그동안 들었던 보배로운 교훈들은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환희에 찬 음성으로 부릅니다. 랍오니여~ 디다스 칼레~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두려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항상 내 마음에 있기에 내 마음은 성전이 되고 귀신이 들어올 공간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부활은 그런 환희에 찬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 없이 살면 종교 소꿉장난에 불과합니다. 빈무덤과 같은 현실에서 나 어떻게 해! 그걸로 종치지 말고 부활하시고 지금 내 곁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날마다 랍오니요! 환희에 찬 음성으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 바로 나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래의 설교를 준비했었지만 당일에 수정하고 설교를 했습니다. 이런 때는 힘들지만 성령의 음성인 줄 알고 새벽기도회를 하고 나서 급히 성경을 새롭게 꾸밉니다. 아래 설교와 대조하면서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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