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땅만 쳐다보느냐
사도행전 1장 9~11절
서론
신앙생활은 눈(眼)의 문제입니다. 그가 무엇을 보고 어디를 보고 있는가에 따라 믿음의 질(質)이나 크기가 결정됩니다. 지도자의 자질도 시력(視力)의 문제입니다. 현재를 보는가, 미래를 보는가? 현재의 가치를 보는가, 미래의 가치를 보는가….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까지 보는가? 미국 슈어드 국무장관은 얼음덩이 알래스카에서 남이 보지 않는 것까지 보았고 러시아 공사 에두아르트 스테클은 눈앞에 보이는 빙산덩어리만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대한민국보다 열배는 더 큰 엄청난 땅을 720만 달러(80억) 프로지오아파트 10채 값에 팔았고 한쪽에서는 그걸 샀다고 비난했습니다. 안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난 돈 덩어리 알래스카가 헐값으로 처분되고 얼음덩이를 보물덩이로 만들어냅니다.
눈에 보이는 외면만 보느냐 이면(裏面)까지 볼 수 있나? 눈앞만 볼 것인가, 미래까지 볼 수 있을까… 눈앞에 드러난 현재만 연연보다 더 좋은 것들을 놓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과 40일을 지내다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부활과 승천 사이 40일! 예수님의 행동이 아리송해요. 부활했으면 제자들과 지내다 떠나면 좋을 텐데 불쑥 나타나셨다 사라지고… 또 당신만의 장소로 가셨다 나타나시고… 이러기를 40일 계속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체가 영체(靈體)이기에 육체였던 사람들에게서 당신의 신령체를 보호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기준이면서 딜레마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영적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세상과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성이 유지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육체를 지녔습니다. 세상에서 살고 세상과 어울려 돈을 벌고 세상에 돈을 쓰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부활하신 이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행보이고 땅에서 우리가 살아낼 생활지침입니다.
1. 어찌 하늘만 보느냐?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눈에 보이게 위에서 끌어당기는 것도 아니고 천사들이 양쪽에서 끌어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쭉 올라갑니다. 굉장한 모습입니다.
11절 “올려지신…”
예수님 스스로 점프하며 공중 부양한 것이 아니라 가만히 서 계셨는데 타력(他力)에 의해 쓰욱~ 올리워 가시는 장면입니다. 자석(磁石)이 같은 성질을 끌어당기듯이 하늘에서 하나님이 끌어올리십니다. 하나님은 천국에 들어와서 살아갈 수 있는 요소가 있는 사람들을 끌어올리십니다. 영생의 요소가 없는 사람들은 승천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승천의 요소가 영성입니다. 영성은 하나님과 같은 성질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3일 만에 끌어올리실 때 죽음에서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늘에서 가지고 오신 영성-신성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끌어올리실 때 승천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던 천국의 성질이 예수님을 끌어당겼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위치로 컴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0절, 제자들은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상당한 시간 동안 쳐다봄을 의미합니다. 처음부터 구름이 예수님을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할 때까지 오래도록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환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입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승천이 있었기에 부활은 더욱 확실한 것이고 재림 역시도 분명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자체와 주님이 사라져버린 구름 너머에만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현실에서 유리된 신비주의자들이 되고 초대교회의 현실성은 약화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우고 구제하고 선교하는 것보다는 감람산에 천막 세워놓고 신령화시키며“바로 이곳이 승천하신 신령한 장소다!”며 성지(聖地) 만들어 돈을 벌고 그만큼 현실과 유리된 이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오늘의 세계기독교가 있겠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놔두지 않았습니다. 10절, 천사가 제자들의 시선을 낚아챕니다.
11절,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언제까지 하늘만 보고 있겠냐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감람산 산중에 기도원 세워놓고 사람들 모으고 헌금 받고 기도원 건물을 더 거창하게 세우며 종교화했다면 훨씬 삶이 쉬웠겠지요. 그러면 기독교는 샤마니즘화 되고 세계를 구원하는 세계종교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찌… 하늘만 쳐다보느냐? 하늘에만 올인하지 말라! 기독교를 명상적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세상일이라 젖혀놓고 명상하듯이 경건이니 묵상이니 하면서 현실과 유리된 신앙생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특이하게 믿는다고 신앙심이 깊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서서 하늘만 쳐다보는 신비주의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늘만 쳐다보고 살고 싶은 게 신앙인들에게 소망입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 힘들고 특히 여성분들이 인권도 없고 헌신짝처럼 취급될 때는 기도원으로 도피했습니다. 거기서 하루 종일 찬송하고 기도하고 울고불고 하니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죽치고 앉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아이들이 기도원에 올라가서 사정사정해서 데리고 내려왔습니다.
그런 현실도피적인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던 교회가 아닙니다. 어떤 은사 속에 들어가서 누에고치들처럼 나오지 않고 신비체험으로 현실을 도피하는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런 그릇된 신앙생활이 자살을 통해서라도 빨리 천국에 가고자 하는 잘못된 신앙인들을 만들어 냅니다. 기독교는 신비지만 신비주의는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생활도 중요하지만 생활신앙도 중요합니다. 신앙도 중요하지만 생활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목사도 중요하지만 아버지로서도 중요하고 남편으로서의 책임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빌미로 땅에서의 자기 역할과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왜곡된 기독교이며 기독교의 역기능적 모습입니다. 이런 주목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와는 반대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땅만 쳐다보는 신자들입니다.
2. 어찌 땅만 쳐다보느냐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다. 거듭남은 두 번째 태어남입니다. 육체는 어버이에게서 왔기에 어버이를 생각하고 영생은 하나님에게서 왔기에 하나님을 묵상하며 생활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땅만 쳐다보았습니다. 땅에서 누가 큰 자가 될까, 땅에서 얻을 것이 무엇인가? 그러다 예수님을 놓아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너무 하늘의 신비함만을 쫓아서도 안 되지만 땅에만 연연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땅의 영광과 땅의 신분에만 주목합니다. 교회 일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나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바에만 급급합니다.
만약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한국교회를 방문한다면 “어찌하여 하늘을 주목하느냐”보다“어찌 땅을 주목하느냐?”그런 핀잔을 하실 것입니다. 땅을 주목하느냐? 땅에 아예 시선을 박아버렸느냐? 어찌 하늘에서 난 자임에도 하늘은 없는 것처럼 땅에 집착하고 있느냐? 그렇게 핀잔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땅에 살면서도 눈으로는 하늘을 주목하며 손과 발은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땅에서 하늘을 살아내는 일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 중국 ‘평신도 목사’ 윈 형제의 믿음을 그린 책입니다. 중국은 정부가 인정하는 삼자교회가 있고 정부가 탄압하는 가정교회가 있습니다. 가정교회는 중국의 자생교회입니다. 삼자교회는 어용교회입니다. 북한에 있는 어용기독교와 같습니다.
가정교회는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당하고 투옥 당합니다. 하난성 출신 윈형제도 16세에 주님께 헌신하기로 작정한 이후, 30회 이상 체포되었고 감옥을 들락거렸습니다. 74일을 금식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감옥생활에는 두렵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했지만 어느 날부터 감옥도 선교지다, 생각하니 천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땅에서도 하늘을 산다고 했습니다. 땅을 보지 않고 감옥을 보지 않고 환경을 보지 않고 하늘을 주목하여 보니 감옥도 천국이 되고 땅에서 살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순교 앞의 스데반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땅에서 하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땅에서 산다고 너무 땅의 원리에 따라 살지 마세요! 땅에서 하늘을 주목하며 하늘의 성공원리를 쫓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하늘을 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인격이 나옵니다. 노는 물이 틀려야 합니다.
3. 어찌 예수를 안 쳐다보느냐?
천사들은 하늘만 쳐다본다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땅 자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주목대상만을 제대로 주목한다면 하늘을 봐도 좋고 땅을 봐도 좋습니다. 주목대상은 예수님입니다.
11절,“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막연하게 신비적 장소로서의 하늘도 보지 말고 먹고 사는 일에 하늘도 잊어버릴 만큼 땅만 쳐다보지도 말고 누구를 보라? 예수를 바라보라!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설자리가 있습니다.
한국의 고승(高僧)이 산을 가리키자 사람들이 산을 바라보지 않고 고승의 가리키는 손가락을 바라보아요. 그랬더니 고승이 버럭 소리를 질렀어요.
“산을 가리켰으면 산을 보아야지 왜 손가락을 보는가?”
우리는 승천을 감싸는 구름을 볼 게 아니라 예수님 그 자체를 보아야 합니다. 땅 여기에 어떻게 신령한 성지를 만들어 돈 벌까, 땅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봐야합니다.
요즘 우리 평서노회가 분란의 위기에 빠집니다. 평생토록 목회자로만 살아왔는데 노회 1번목사로 노회를 지켜야 하는 책임으로 자꾸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번에 어느 교회가 교회개명을 신청했습니다. 예수 믿는 교회! 처음에는 웃었습니다. 나도 그게 이름이 좋지 않으니 개명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권면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 요즘 예수 안 믿는 교회가 많고 예수 안 믿는 목사들이 많기에 우습게 들리지만 교회 명을 예수 믿는 교회로 하고 싶다 고집했습니다. 그냥 시시한 개척교회목사가 아닙니다.
그 말은 예수의 교회들이 예수의 방법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 잘 믿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더 잘 믿어보자는 경고성 교회명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정치부에서 교회명 개명을 허락했습니다. 진짜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가 나옵니다.
결론
“왜 땅만 쳐다보느냐?”
땅의 것들에 너무 연연하지 마십시오. 땅의 것들은 마르고 시들어 버립니다. 인생 쉬 가버립니다. 땅의 것들만 바라보다가 육신 죽을 때 영혼이 기댈 때 없어 탄식하겠습니까?
“왜 하늘만 쳐다보느냐?”
하늘만 쳐다보지 마십시오. 신비주의, 광신주의, 주관적 체험에 너무 빠져들지 마십시오. 그것은 세상을 등지게 만들고 도피 중인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만 바라보십시오.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승천을 기대하십시오.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경건의 이유를 찾으세요!
무엇을 주목하느냐? 시력을 밝히고 키우세요~ 선악과에 눈감고 생명과에 크게 눈을 뜨세요!
갈렙이 온전한 일생을 보냈고,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시력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상황을 본 것이 아니라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하소서! 눈의 시력을 밝게 해달라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로 보십니까? 강대국 러시아의 확장을 막아줄 생명의 방벽으로 봅니까? 현재의 모습만을 본 사람은 땅을 팔아버린 매국노가 되었지만 비난을 무릅쓰고 땅을 구입한 장관은 영웅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눈도 그러하건대 하나님의 눈으로 상황을 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롯처럼 홀딱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눈으로 더 좋은 땅을 찾아내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영적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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