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산의 구각(九角)을 체험하라!
요한복음 20장 19-23절
[말씀닷컴:구각이라는 말은 그냥 제가 만든 조어입니다.]
서론
수요일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모두 투표하세요! 국회의원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한식, 양식, 일식보다 중국음식-중식이랍니다. 중국음식 중에 ‘삼선 짬뽕’ ‘삼선 짜장’ ‘삼선 우동’이 있어요. 삼선은 세 번 당선되었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국회의원들은 중식당을 좋아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제자들 앞에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부활 이후 첫 대면, 첫 마디가 무엇인가요? 코미디언 구봉서씨가 세례 받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마디 말씀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놀랐재?” 코미디적인 답이고 사오정이기도 하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 앞에 섰습니다. 제대로 예수님 신분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19절, ⋯모은 것의 문들을 닫았더니⋯ 문을 닫았다는 것은 두려움으로 문을 걸어 잠근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사⋯ 들어오사⋯ 문은 열리지도 않았는데 그냥 들어오신 거예요!
예수님의 신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거예요! 물론 허깨비는 아닙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유령이 나타났다 착각하여 무서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령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상을 보여줍니다. 20절,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그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합니다. 3일 동안 헤어졌던 스승을 만나 기뻐했는지, 부활 자체를 기뻐하는 것인지⋯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엄청난 황홀함에 빠졌겠지요.
지금까지 유대교권자들은 예수님을 사오정 캐릭터로 보았어요. 옥황상제의 시종무관 사오정은 연회 때 잔을 깨뜨렸는데 그 벌로 추한 모습으로 변해 지상으로 쫓겨났습니다. 이후 별 쇼를 해요! 귀가 가려 말을 못 알아듣거나 동문서답을 하는 캐릭터가 사오정입니다.
왜 안 그러겠어요? 동정녀 탄생을 주장하지 않나, 율법으로 의로움을 얻지 못한다,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속죄사역을 이루겠다, 죽어 3일 만에 부활하겠다, 천국에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를 사해준다⋯ 감히 사람이 죄사함을 선포하는 참람 발언을 멀쩡히 내뱉고⋯ 이게 사오정 발언이지요!
그런 사오정 주장에 제자들도 왜 헷갈리지 않겠어요?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우리가 헛다리짚은 것은 아닐까? 배와 그물까지 버려두고 떠난 고향에 내려간다면 꼴이 뭐가 되겠나?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니 그 분이 누구신지, 이제야 정체성을 똑똑히 알겠어요! 사람이면 어떻게 죽었다 살아나요! 하나님이면 어떻게 죽을 수 있나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니 예수님 안에 참 사람이요 참 하나님이라는 속성이 있었어요. 사람이기에 죽었고 하나님이었기에 살아나셨어요!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 양성연합을 가지신 분이에요! 이게 예수님의 고유한 캐릭터-아이덴티티(Identity), 정체성이지요!
예수님의 부활을 보니, 예수님이 누구신가, 딱 정리가 됩니다. 예수님께는 두 속성이 있습니다. 사람으로 사신 33년, 이건 예수님의 본질에서 빙산의 일각입니다. 빙산의 일각은 보이는 부분은 숨겨진 부분의 극히 일부란 뜻입니다. 얼음의 비중은 약 0.91이고 바닷물의 비중은 1.025입니다. 따라서 빙산은 물의 부력을 받기 때문에 빙산의 약 90%는 물속에 잠기고 10%정도만 수면 밖으로 보입니다. 이 10%가 빙산의 일각입니다. 빙산의 일각은 실체의 대부분은 보이지 않고 매우 작은 일부분만 노출된 현상입니다. 그래서 ‘빙산의 뿔’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빙산의 일각이 33년 인성의 생애입니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목수요셉의 양아들로 유년시절을 나사렛에서 평범하게 보내고 배고프고⋯ 지치고⋯ 거절당하고 배신당하고⋯ 인생살이가 사람들과 꼭 같아요! 이게 빙산의 일각이에요! 사람들은 이것만 본 거예요! 제자들도 오랜 세월 빙산의 일각만 보았어요! 당연하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조차 빙산의 일각 부분만을 보여주셨으니까! 그러면서도 제자들과 함께 했던 세월, 그 안의 수많은 이적과 가르침과 특히 장차 십자가를 지고 부활할 것이라는 예고는 빙산의 구각에 대한 힌트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지금 부활의 영체(靈體)를 통해 예수님의 빙산의 구각을 보았어요. 빙산의 구각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죽음을 통해 빙산의 일각, 인간됨을 벗어버리자 참 하나님이라는 빙산의 구각이 드러난 거예요! 시공을 초월하는 순간이동은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요한은 요단강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 30년을 예수님에 대해 빙산의 일각, 겉으로 드러난 친척동생 예수의 신분만 보았어요! 성령이 눈을 열자 구각이 보였어요! 그러자 탄식합니다.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요한은 예수님과 친척입니다. 30년을 먼 거리에서 서로를 알아요. 그의 동정녀 탄생을 알아요. 자기의 출생도 신비합니다. 그래서 동정녀 탄생에 대해 별로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성령이 눈을 열어주니 예수님이라는 빙산의 일각에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이자 하나님이라는 빙산의 구각을 보게 된 거예요! 그러니 외치잖아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랍오니여~ 했습니다. 선생님⋯이지요. 사랑의 고백이고 행복한 고백이지만 아직도 마리아는 빙산의 일각만 보고 있어요. 그러나 도마는 빙산의 일각 때문에 믿지 못하다 빙산의 구각이 눈앞에 드러나자 고백합니다.
28절,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님의 빙산의 일각만을 보고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이제 부활을 확증하게 되자 예수님의 드러난 정체성을 보고 나의 하나님⋯ 빙산의 구각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때요? 그는 열성파 유대교인입니다.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의 제자이니 유대교의 대학자가 될 사람입니다. 율법으로 볼 때 예수는 율법폐기론자입니다.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사이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에 아주 싹을 잘라버리려고 모임이 있는 곳을 수색하러 다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다메섹 언덕에서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눈이 부실만큼 밝은 광채가 쏟아져 눈이 멀었을 정도입니다. 누가 앞을 가로막습니다. 바울이 묻지요!
“내 앞길을 막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머리가 망치로 꽝! 얻어맞은 느낌입니다. 예수는 이미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부활했다고 떠들었지만 극한 상황에 처했으면 무슨 주장을 못하겠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도 가도 못할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의 부활과 관계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종교를 만들고 교단을 만들면 밥벌이는 되잖아요? 부활은 여론을 업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 예수가 지금 앞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삼척동자도 아는 바입니다. 그 죽은 예수가 내 앞에 버젓이 나타난 겁니다. 그러면 부활이 사실이잖아요? 부활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에 관한 모든 주장들이 사실이잖아요? 거기에서 바울은 항복합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바울이 예수님에 대해 빙산의 일각만을 알았을 때는 박해자였고 그리스도교단을 가해했지만 다메섹의 신비한 체험을 하고 아라비아광야로 들어갑니다. 3년을 구약과 예수님의 생애를 낱낱이 대조했어요! 그리고 빙산의 구각을 발견했을 때 박해자에서 오히려 예수님을 위해 핍박을 당하는⋯ 갑(甲)질에서 을(乙)로 자리이동을 합니다.
이후,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배고픔과 추위 등은 약과고 매를 맞고 강물에 휩쓸려 죽을 위경도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40에 하나 감한 매를 여러 차례 맞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베스도총독이 신문하면서 너는 미쳤다~ 너희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다 하니 바울은 미치지 않았다고 하며 오히려 아그랍비 왕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행 26:29,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바울의 고백은 어떻게 보면 초라하고 불쌍하지요! 그러나 그건 참이었어요!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 바울이 왜 이런 당당한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학문과 그의 신분이 아까웠어요! 그는 로마시민권이 있는 집안의 자식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명문가문입니다. 그걸 포기하고 예수에게 빠졌으니 요즘 말로 하면 서울대학교 나와 서울대학 교수 자리에 있던 사람이 사이비에 빠져버린 것이지요! 그러면 뭐라고 말해요! 아무개 교수가 사이비교단에 미쳤대!
바울은 누구보다도 지성적이었던 사람이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요? 예수님을 핍박하던 가해자가 예수님을 위해 핍박을 당하는 피해자 신분이 되었으면서도 왕에게 당신도 나처럼 행복한 길을 알았으면 좋겠다, 권하고 있을까요? 그는 정말 어떻게 된 걸까요? 사오정은 아닐까요?
답이 바로 이겁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빙산의 구각을 보았어요! 예수의 빙산의 일각만 보았을 때는 아그립바 왕처럼 그 도(道)를 따르는 자들을 미쳤다고 했어요!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감추어졌던 빙산의 구각을 보았어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알고 난 이후에는 자기의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외쳤던 것입니다(빌3:8). 빙산의 구각을 발견한 사람들만이 내려놓을 수 있는 신분 포기이고 고백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외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빙산의 구각으로 가야 제대로 회심한 그리스도인의 출발입니다. 빙산의 일각도 중요해요! 빙산의 일각은 산상수훈을 비롯한 가르침들입니다. 기독교윤리이자 도덕입니다. 얼마나 좋아요!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되고 비판하지 말고⋯남을 먼저 대접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십계명의 계명들, 부모에게 효도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이웃에 대해 거짓된 말들을 퍼뜨리지 말고⋯ 이웃의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는 크리스천의 윤리와 도덕을 지켜야 합니다. 빙산의 일각으로 드러나고 있는 예수님의 인품과 인격들을 우리 것으로 내면화하고 매력적인 예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이런 좋은 말씀들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아닙니다.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그런 가르침은 타종교에도 있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 블루오션은 빙산의 구각입니다. 다른 종교가 윤리도덕으로는 기독교와 경쟁이 됩니다.
진짜 기독교의 빙산의 구각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속죄교리입니다.
기독교의 윤리에서 끝나면 영화중에서 예고편만 보고 온 것입니다. 진짜 영화는 예고편이 아니라 예고편보다 더 많은 90%의 내용에 있습니다. 그걸 봐야 그 영화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음식점에 가서 식사 전에 주는 수프를 먹고 와서 그 음식점을 평할 수는 없습니다. 풀코스 요리를 다 먹어봐야 합니다.
부활 이후에 드러난 빙산의 구각은 ‘블루오션’ 영역입니다. 종교 간의 비교 정도도 안 되고 경쟁이 안 됩니다. 빙산의 구각은 예수님의 정체성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적극적인 전도나 선교 개념은 기독교에만 있습니다. 물론 불교에도 이슬람에도 교화(敎化)는 있지만 생명을 걸지 않아요! 선교는 기독교에만 있습니다.
이거 이상하지 않아요? 예수가 어떤 분이기에 교인들은 예수에게 자신의 삶을 의지하고, 시간도 물질도 목숨도 맡겨버릴까요? 불교도 순교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성불(成佛)을 위해 있는 것이지 석가를 위해 생명을 내놓는 것은 아닙니다. 석가가 빠져도 교훈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공자가 실재적인 인물이 아니어도 공자의 교훈만 있어도 유교는 존립이 가능합니다.
기독교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남기신 교훈을 좋아합니다. 그 교훈대로 좇아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과 교리는 그 날로부터 사라져 버립니다. 기독교는 교훈에 근거를 둔 게 아니라 그 분의 존재와 생애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교훈보다도 주님의 생애에 더 집착합니다. 주님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승천과 재림⋯ 등을 더 중요시합니다. 이게 빙산의 구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이나 교훈보다는 주님 자신과 주님께서 하신 속죄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해 빙산의 일각만 아니라 구각을 체험하는 신앙생활이기를 기원합니다.
결론
북극해의 노른자 땅 알래스카는 미국의 49번째 주입니다. 원래는 러시아제국 소유였습니다. 러시아제국은 1860년대에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태에 있었고 영국과 분쟁이 생기면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하고 점령당한다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래서 미화 720만 달러(약 80억원)에 팔았습니다. 러시아 국민들은 싸구려 땅을 엄청난 돈에 팔았다며 환호했습니다. 미국 국민과 의원들은 국무장관 ‘슈워드의 냉장고’ ‘슈워드의 어리석은 짓’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지금 어떤가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빙산의 구각을 보지 못한 러시아제국은 지금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지만 슈워드 국무장관은 빙산의 일각만 아니라 빙산의 구각 모두를 보았습니다. 슈워드는 미국의 영웅이 되었고 지금도 이름을 딴 지명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셨지만 그 백성들은 빙산의 일각만을 보고 거절합니다. 빙산의 일각을 보았던 빌라도는 십자가에 내어주고 대제사장과 교권주의자들은 빙산의 구각을 보지 못하고 이방인들의 손을 빌려 자기들의 메시아를 죽이고 맙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빙산의 구각을 보았습니다. 그 예수님에 대해 “나의 주 하나님이시여~”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를 이루어 세계복음화에 성공했지만 빙산의 일각만을 보고 자기들의 교단만을 고집했던 유대인들은 민족종교, 군소종교로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면서 교회생활을 해야 합니까? 교회의 빙산의 구각으로 들어오세요! 교인들을 빙산의 일각이 아니라 빙산의 구각을 보려고 다가서세요! 예수님에 대해 빙산의 구각을 보여 달라고 갈망하세요! 빙산의 구각의 예수님을 만나세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도마처럼 빙산의 구각을 고백하세요! 그때 주님은 부활로 내 마음에 입주하시고 지금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 설교와 앞의 설교는 비슷합니다. 본래는 이 설교를 준비했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준비한 설교가 앞의 설교입니다. 본문, 제목은 같지만 약간 다릅니다.
빙산의 구각(九角)을 체험하라!
요한복음 20장 19~23절
서론
수요일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모두 투표하세요! 국회의원 후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한식, 양식, 일식보다 중국음식-중식이랍니다. 중국음식 중에 ‘삼선 짜장’, ‘삼선 짬뽕’, ‘삼선 우동’⋯. 삼선은 세 번 당선되었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중화요리 좋아한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부활 이후 첫 대면, 첫 마디가 무엇인가요? 코미디언 구봉서씨가 세례 받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마디 말씀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놀랐재?” 사오정도 이런 사오정이 없어요!
축구공에 맞아 기절했던 선수가 자기가 차범근이라 우기면 사오정입니다. 옥황상제의 시종무관이던 사오정은, 연회 때 잔을 깨뜨렸는데 그 벌로 추한 모습으로 변해서 지상으로 쫓겨났습니다. 이하 별 쇼를 해요! 그래서 말을 못 알아듣거나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사오정입니다.
자기가 차범근이 아닌데도 차범근이라 우기면서 차범근의 말투를 쓰면 그게 사오정이지요! 반대로, 차범근이 공에 맞아 기절했어요. 순간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꾸 차두리라 합니다. 차두리는 아들이지요. 그래서 아직도 젊은 줄 알고 운동장에서 종횡무진 합니다. 그러다 정신이 돌아와 자신이 차두리가 아니라 차범근인 줄을 알면 이건 사오정이 아니라 정체성회복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 앞에 섰습니다. 제대로 예수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19절, ⋯모은 것의 문들을 닫았더니⋯
'문을 닫았다'는 것은 두려움으로 문을 걸어 잠근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사⋯ 들어오사⋯ 문은 열리지도 않았는데 그냥 들어오신 거예요!
예수님의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거예요! 물론 허깨비는 아닙니다. 누가복음은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났다고 착각하여 무서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령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상을 보여줍니다.
20절,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그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합니다. 3일 동안 헤어졌던 스승을 만나 기뻐했던 것인지, 부활 자체를 기뻐하는 것인지⋯ 모두 포함되지만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놀라움과 함께 엄청난 황홀함에 빠졌다고 해석해도 좋겠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유대교권자들은 예수님을 사오정 정도로 보았어요. 율법으로는 의로움을 얻지 못한다, 십자가에 피흘림으로 인류의 속죄사역을 이루겠다,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겠다~ 천국에 갔다가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겠다⋯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언하면서 내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 감히 사람이 죄사함을 선포하다니⋯ 이게 사오정 발언이지요!
그런 사오정 주장에 제자들도 왜 헷갈리지 않겠어요?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니 그 분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똑똑히 알겠어요! 사람이면 어떻게 죽었다 살아나요! 하나님이면 어떻게 죽을 수 있나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니 예수님 안에 참 사람이요 참 하나님이라는 속성이 있었어요. 사람이기에 죽었고 하나님이었기에 살아나셨어요!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 양성연합을 가지신 분이에요! 이게 예수님의 고유한 본질이라는 정체성-아이덴티티(Identity)이지요!
사실 33년 육신으로 사셨던 예수님의 생애는 예수님의 본질에서 빙산의 일각입니다. 빙산의 일각은 보이는 부분이 숨겨진 부분의 극히 일부란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배고프시고⋯ 지치고⋯ 사람들과 꼭 같은 사람이에요! 이게 빙산의 일각이에요! 사람들은 이것만 본 거예요!
제자들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빙산의 구각을 보았어요. 빙산의 구각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죽음을 통해 빙산의 일각, 인간됨을 아예 벗어버리고 참 하나님이라는 빙산의 구각이 드러난 거예요! 도마가 빙산의 일각 때문에 믿지 못하다 빙산의 구각이 눈앞에 드러나자 고백합니다.
28절,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랍오니여~ 했습니다. 선생님⋯이지요. 아직도 마리아는 빙산의 일각만 보고 있을까요? 그러나 도마는 드러난 예수님의 정체성을 보고 나의 하나님⋯ 빙산의 구각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해 빙산의 일각만 아니라 구각을 체험하는 신앙생활이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빙산의 일각은 산상수훈을 비롯한 가르침들입니다. 이게 기독교 윤리이자 도덕입니다.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이런 좋은 말씀들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아닙니다.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그런 가르침은 모든 종교에도 있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 블루오션은 빙산의 구각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가 윤리도덕, 교훈으로는 기독교와 경쟁이 됩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 드러난 빙산의 구각은 ‘블루오션’ 영역입니다. 경쟁이 안 됩니다. 빙산의 구각은 예수님의 정체성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적극적인 전도나 선교 개념은 기독교에만 있습니다. 물론 불교에도 이슬람에도 교화(敎化)는 있지만 생명을 걸지 않아요! 선교는 기독교에만 있습니다. 이거 이상하지 않아요? 예수가 어떤 분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에게 자신의 삶을 의지하고, 2천 년 전의 그분을 위해 시간도 물질도 목숨도 맡겨버릴까요? 불교도 순교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성불(成佛)을 위해 있는 것이지 석가를 위해 생명을 내놓는 것은 아닙니다. 석가가 빠져도 교훈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공자가 실재적인 인물이 아니어도 공자의 교훈만 있어도 유교는 존립이 가능합니다.
기독교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남기신 교훈을 좋아합니다. 그 교훈대로 좇아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과 교리는 그 날로부터 사라져 버립니다. 기독교는 교훈에 근거를 둔 게 아니라 그 분의 존재와 생애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교훈보다도 주님의 생애에 더 집착합니다. 주님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승천과 재림⋯ 등을 더 중요시합니다. 이게 빙산의 구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이나 교훈보다는 주님 자신과 주님께서 하신 속죄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부활하신 이후, 빙산의 구각이 나타납니다.
19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세상은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세계는 제대로 평화를 누려본 적이 없습니다. 두려움, 욕구불만, 좌절감, 경제문제, 자녀의 문제는 우리들을 늘 혼란스럽게 만들고 마음에 평안을 앗아갑니다. 어느 시대보다 풍성한 삶을 누리면서 정신질환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시대입니다. 그것을 보면 우리의 소유가 우리의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의지하였던 기둥이 하루아침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공포에 떨었지요!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신 첫 공식적인 말씀이 평안입니다.
"너희들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이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모든 선한 것을 마련하여 주실지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며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신다는 그 확증에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평안은 사실 환경과 별개입니다. 좋은 환경이 있어도 평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환경이 좋지 않아도 참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 평안은, "일어난 일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라는 것입니다. 문을 잠그면 뭣합니까? 불안은 밖에서 오지만 내 안에서 생성되는게 더 많습니다. 내 안의 불안의 뿌리를 캐내지 못하면 암만 문을 잠그고 일주일이 멀다 병원 가고 건강검진을 해도 불안을 해소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제대로 된 평강을 주겠다고 합니다. 평강(에이레네)은 '평화', '화평'으로 '샬롬'입니다. 샬롬은 유대인의 전통적 인사말로 길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왕하 5:21), 헤어질 때(삼상 1:17, 행 16:36). 이웃을 방문할 때(마 10:12)⋯ 일상생활에서 주고받는 덕담 인사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주님의 입에서 베풀어졌을 때, 일상적인 인사의 범주를 넘어 세상이 가져다주는 평안과는 다른 예수님만의 평안입니다. 장차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한 결과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바로 그런 평화입니다. 그런 평화가 있을지어다! 합니다. 거부, 거절할 수 없는 평화의 에너지입니다.
염려를 마음에 달고 살면 믿음이 성장하지 못합니다.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알면 알수록 더 불안합니다. 염려는 믿음만 아니라 건강도 해칩니다.
여자들은 추해 보이면 어쩌나 하는 염려로 일평생을 갑니다. 그래서 화장으로 꾸며보지만 세월을 어찌 화장으로 감출 수 있을까요?
대표기도를 맡으면 일주일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어떻게 기도를 할까⋯ 기도 후에도 일주일을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이렇게 기도하였으면 더 감동적이었을 것인데 하는 마음과 다음 주일 교인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염려 때문입니다. 몇 번 더 대표기도 시키면 제 명에 죽지 못할 것 같아 저도 불안합니다.
누군가 교통사고를 당하면 내가 염려합니다. “나도 저렇게 교통사고 당하면 어쩌나⋯ 나도 조만간 당할 거야⋯ 다음 차례는 내가 될 것 같아!” 그러다 결국 교통사고를 당하고 맙니다. 사탄은, “네 염려대로 될지어다!”
주님께서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빙산의 구각을 드러내신 예수님, 육신을 벗어버리고 이제 온전히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신 예수님! 참된 평강을 토스해 주십니다. 이걸 받아야지 사탄이 토스해주는 각종 염려들, 내 기질에서 발생하는 염려를 제때 처리 못하면 아직도 선행이나 일삼는 빙산의 일각의 예수 종교 신자로 살다 갈 것입니다. 구각(九角)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빙산의 구각(九角)이 나타납니다. 죄사함입니다.
23절,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이 말씀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제자들에게 일임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을 권세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막 2:6, 10).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받는 결과가 생깁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죄가 남아 심판을 받습니다(막 16:16).
오직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분은 빙산의 구각으로 존재하시는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들이 이걸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나 랍비로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메시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억지를 부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왕이 되거든 한 자리씩 차지하게 해달라고 청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말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니까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마 9:2,3)
예수님의 숨겨진 구각을 모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6절,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의 구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사해주는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죄는 무엇일까요? 도둑질? 거짓말? 부도덕한 행위? 이 모든 게 죄입니다. 그러나 이 죄는 드러난 죄입니다. 그것이 진짜 죄는 아닙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죄는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고 내 노력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내 중심 사상이 죄 중에서 으뜸가는 죄이며, 죄의 뿌리입니다.
에덴동산의 죄가 이런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는 스스로 신이 되려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되고 싶었고 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라 명령하는 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스스로가 천국 올라가는 길을 개척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이것이 아담에게 죄가 되었고 그 죄가 인류에게 전가되어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와 같은 죄의 성향을 갖고 태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오셔야 했기에 동정녀의 몸이 필요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요구인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사람들은 다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만 그 피는 효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담에게 붙어 있는 자들과 예수님에게 붙어있는 자들입니다. 아담에게 붙어있는 자들은 죄인입니다. 그들을 스스로의 행위로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 붙어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적시움을 받고 그 순간 그 피는 죄를 없애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의인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할 수가 있습니다. 죄사함이 있는 곳에 참된 평화가 있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 것은 교훈을 좇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결론
국제선을 타면 누구는 같은 돈을 내고도 비행기의 모든 서비스를 당당하게 받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모르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충분히 서비스를 받습니다. 덜 받았다고 누가 내게 상을 주지 않습니다. 서비스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사람만 바보입니다.
같은 가격의 핸드폰을 사고 자동차를 사지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기능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덜 썼다고 상주지 않습니다. 나만 바보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빙산의 일각, 예수님의 교훈만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착한 사람들, 예의바른 사람들은 됩니다. 그러니 빙산의 구각을 놓치므로 예수 믿는 맛을 모르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과 규범을 본받으려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부활 사건 이후, 예수님 자신에 주목합니다. 지난날에는 예수님이 그들 밖에 있었지만 부활 이후에 주님은 그들 안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사신다는 확신은 그들의 연약한 삶을 하나님에게 연결하는 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몰라서 그렇지 빙산의 구각은 전능하신 분! 죽음의 돌무덤까지도 열어버리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은 예수님을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 분의 힘은 나의 힘이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마, 약속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갈릴리 어부들이 세상을 정복합니다. 빙산의 일각의 예수님에 머물지 않고 구각을 체험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빙산의 구각과 연결된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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