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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아브라함의 3대 key word(창세기 12:5~9)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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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3 key word

창세기 12장 5~9절

 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키워드는 무엇일까요? 키워드(key word)는 컴퓨터 데이터에서 특정 정보를 찾기 위해 사용하는 핵심단어나 기호, 검색어입니다. 누군가 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늘빛교회 교사의벗이라는 단어를 치면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에 대한 정보 검색의 키워드는 늘빛교회’ ‘교사의벗 등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175년에서 그를 보여주는 키워드는 무엇일까요? 아브라함과 롯은 갈대아 우르를 떠난 이후 걸어온 동선(動線)이 거의 같습니다. 그런데 같은 동선에서 한 사람은 불심판이라는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나버리고 또 한 사람은 (이런 표현이 가능할는지 모르지만) 용두용미(龍頭龍尾)가 되어버렸을까요?

 

두 인물이 걸어온 동선(動線)이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의 키워드가 달라서 한 사람은 잿더미 인생으로 끝나고 다른 사람은 믿음의 조상’ ‘하나님의 벗이라는 다른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용두용미(龍頭龍尾) 아브라함,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찾아보면 그가 누구인지, 왜 훌륭한 인물이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고 우리도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아브라함을 받쳐주는 기둥, 키워드를 알아야 합니다. 이걸 모르니 유대교 신자로 만족하고 아브라함 자손 중에 엉뚱하게 이슬람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설명하는 키워드(key word) 3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키워드1, 제단(祭壇)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살다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우르는 바벨론-슈메르의 수도요 슈메르는 최초의 제국입니다. 서사시, 법전, 종교, 잠언, 문자를 최초로 탄생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은 문명이 주는 혜택을 누리다 도시를 떠납니다. 중간 유숙지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거리가 약 480Km 정도, 광화문-부산시청까지가 456km, 얼마나 먼 거리입니까?

대장정에서 큰 시련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입니다.

 

1,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지금은 미래의 땅이요 불명확한 땅입니다. 그래서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정착할 땅을 찾아 계속 이동했다는 정처 없는 발걸음입니다. 그럴 때마다 흔들리는 걸음에 힘이 된 것은 제단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7,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세겜 땅에서 쌓았던 단은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입니다. 그를 부르시고 세겜까지 오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배의 제단, 장차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도 감사했는데 아직은 손에 얻지 못했지만 장래 일에 대해 믿고 감사하는 제단입니다.

 

아브라함은 감사의 믿음을 유지한 채 벧엘로 이동해서 다시 제단을 쌓습니다.

 

8,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벧엘의 제단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찬송과 기도가 있는 공()예배입니다. 이름을 불렀더라. '이름을 불러 그에게 말을 걸다'. 하나님께 자기 연약함과 무력함을 겸손히 고백하며 기도와 감사, 경배가 있는 경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제단행위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입성 후 식솔을 모아 공예배를 드림으로 가정에 예배규례를 확립합니다. 아브라함이 허물과 실수에도 하나님의 친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제단-예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처음부터 완벽한 모델은 아닙니다.

 

10절에만 해도 당장 허물이 등장합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하려고 가나안(팔레스틴) 지방은 지리적 여건상 우기(雨期)와 건기(乾期)가 뚜렷이 구분되어 대개 양력 10, 11월에 집중적인 비가 내립니다. 이때 비가 적게 오면 다음 해에는 반드시 기근이 들게 마련인데 때맞춰 닥친 기근은 신앙과 인내를 시험하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나일강 수원(水原)으로 기근을 모르는 애굽으로 이동합니다. 예루살렘과 반대방향입니다. 하란이나 우르보다 애굽행은 지혜로운 선택이지만 애굽은 성경에서 세속을 상징하는 나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적 도움, 수단으로 해석되기에( 31:1) 애굽 행()은 경솔한 처사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이런 중요한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부부는 남매로 위장합니다. 이복남매지간은 맞습니다(20:12). 그래서, 13절 원하건대 '미안하지만', '부탁드리지만' 정중한 요청입니다. 남의 부인이 될지도 모르기에 사라는 반대하나 목숨 부지를 위해 결례인 줄 알면서도 계속 요청했고, 허락을 받은 것입니다.

 

결과,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하마터면 애굽 왕에게 아내를 뺏길 뻔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찌됩니까? 하나님께서 17, 바로 집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왕은 겁을 먹고 13:2 가축과 은과 금을 넉넉히 주면서 떠나게 합니다. 가축과 은과 금 자랑거리입니까? 인간적 처세로 얻은 재물들 불신앙의 부끄러운 흔적, 아내에게는 상처가 되는 흔적입니다.

 

이런 실수에서 아담부부에게는 제단이 없습니다. 자기 잘못을 핑계, 전가할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습니다.

 

13:4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애굽에서의 잘못을 회개하며 바르게 살겠다는 다짐을 한 것입니다. 감사와 회개의 눈물이 있는 제단이 그가 남긴 흔적입니다.

 

한국교회가 영적 힘을 상실한 것은 자기희생이라는 제단이 사라지고 제단에서 오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힘이 약하고, 회개가 약하고, 자기희생이 약하기에 야성(野性)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희생하시다니,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사랑하고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십자가 제단에는 사랑과 희생의 흔적을 볼 수 있기에 힘을 얻습니다. 예배하면서 감격과 눈물이 없는 것은 사랑과 희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주는 힘! 아브라함은 계속 이동 중에서도, 실수 중에서도 제단을 쌓아 성공한 것입니다. 제단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여주는 키워드입니다.

아브라함의 키워드2, 장막(帳幕)

아브라함 생애를 보여주는 두 번째 키워드는 장막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후 100년을 더 살아 175세 마므레에서 별세합니다(25:7,8). 고향을 떠나 살았던 100,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의 부유함이 어느 정도인가, 원주민 부족에게 사로잡혀간 롯을 구하려 동원한 군대가 14 14, 318명입니다. 군사들은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돈으로 사온 일시적 용병(傭兵)이 아니라 가정에 소속된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입니다. 대목장 주인으로 가축을 돌보고 살림을 해주고 밥을 해주는 일꾼들을 노예로 거느리다보니 대가족, 부족장이 된 것입니다. 이 정도의 부유함이라면 한 곳에 정착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800년 전, 작은 땅 몽골에서 태어나 나폴레옹, 알렉산더, 히틀러가 가졌던 지역보다 더 큰, 세계의 거의 전부를 정복했던 칭기즈 칸, 영웅 중의 영웅입니다. 칭기즈 칸의 교훈은

 

유목민은 유목민처럼 살라!”

 

유목민은 정착지가 없습니다. 계절을 따라 풀을 찾아 떠나고 초원도 풀이 마르면 이동합니다. 좋은 초원지라고 정착하면 목축은 끝납니다. 계속 풀을 찾아 흘러 다녀야 합니다. 그러니 유목민들은 살림이 간단할 수밖에 없고 땅에 대한 소유욕이 없습니다. 언제나 떠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나그네 의식으로 무장된 사람들입니다.

 

이러던 몽골이 왜 망했습니까?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간직할 곳이 필요했습니다. 성읍을 만들고 집을 짓고 아름다운 여인을 부인으로, 한두 명이 아닙니다. 여럿 거느리고 그 사이에서 자식들이 태어납니다. 도시를 만들고 안주하면서 들판의 야성(野性)을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전투력은 상실합니다. 누가 전쟁에서 목숨을 버리려 합니까? 내가 죽으면 많은 재산들, 아름다운 부인, 자식들은 어찌됩니까? 유목민-나그네의식을 놓아버리고 정착하려는 그 안주, 안일함, 목숨에 대한 애착이 한 곳에 뿌리내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결국은 전투력 상실로 세상 남자들과 평준화가 되고 제국에서 소국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걸 알았습니다. 자기는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한 가나안드림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해 주실 땅으로의 계속 이동이 그의 미션입니다. 계속 이동하려면 정착은 불가능합니다. 군사들만 318명을 소유한 대족장으로 대궐 같은 집이 필요하고 자기 위용에 걸 맞는 집과 토지들이 필요한데도 내 것이 아니기에 일생을 장막생활로 만족합니다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계속적인 이동입니다. 이동에 성읍이나 집이 필요 없습니다. 항상 텐트-장막생활을 합니다.

 

13:3,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13: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장막의 정체성은 나그네 의식, 언제라도 부르심을 받는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막생활을 합니다. 장막생활은 그의 소망이 어디에 있는가, 삶의 방향성을 보여줍니다.

 

장막생활은 즉각적 순종의 자세입니다. 좋은 집이 있다면, 떠나라! 사인이 떨어질 때 못 떠납니다. 집과 그 안에 들어있는 장식물 때문에 아까워서 떠날 수 없습니다.

 

장막생활은 천국만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땅을 더 사랑하고 민족의 시조됨을 탐내고 축복에만 연연할까봐 장막생활을 고집했습니다. 이런 조상을 모셨기에 이스라엘은 세계에 흩어져 떠돌이 민족으로 살면서도 위대한 문명과 정신을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왜 세습 문제로 빈축을 사고 있습니까, 은퇴하고도 쉽게 교회를 놓지 못합니까? 예배당이 대형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까워서 놓지 못하고 떠나지 못합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문제는 이기심이고 가장 위험한 이단은 신자들의 세속화입니다. 이걸 극복하지 못하기에 생명력을 잃은 것입니다. 왜 세속화 극복이 힘듭니까? 재림론 실종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재림을 막고 있는 형국입니다! 왜 우리가 재림을 사모하지 못합니까? 누리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땅에 투자해 놓은 것들 포기하기가 억울해서 오시는 주님을 막고 세상을 다 누리고 천국에 가려니 몽골 군사처럼 목숨이 아까워 재산이 아까워 세상이 아까워 땅의 주인 노릇하려하기에 야성(野性), 전투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정녕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이라면 나그네의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가진 것들을 언제라도 놓고 출발하려는 자세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성의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걸 놓치면 내가 누구인가를 잃어버리고 소돔과 고모라에 정착했던 롯이 소유물이 불구덩이에서 잿더미가 되는 것을 바라보며 가슴을 치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여행자에게 잠시 지나가는 다리 같은 것으로 정리되지 않는 한 우리는 롯의 생애로 마감할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주는 두 번째 교훈이고 키워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키워드3, 약속(約束)

아브라함 생애를 보여주는 셋째 키워드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땅을 주마

대민족을 만들어 주마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조건은, 믿고 따라오라! ! 하고 대답한 그 날 이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만을 바라보며 전진합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입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 이전에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믿었고 하나님 자신을 기대한 것입니다.

 

오랜 세월 눈앞의 상황들은 약속과는 멀었습니다. 땅도 없고 자식도 없었습니다. 특별한 복도 없었습니다. 고향 떠난 지 25, 아브라함 부부사이에는 자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대민족의 축복입니까? 그가 따라오지 않을까봐 하나님께서 그냥 낚싯줄 던진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그 침묵의 세월, 아무 축복이 없는 세월에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축복만을 바라보았다면 도중하차입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을 신뢰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완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축복에 치중했던 세월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갔고, 이스마엘을 얻었고 롯이 땅을 차지했을 때는 배신으로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남방은 예루살렘 쪽입니다. 더 하나님 중심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멀리 있던 약속이 점점 가까웠습니다. 희미해지던 약속이 분명해졌습니다. 약속이 멀리 있을 때도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약속의 내용보다는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준 것도 그가 통근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에만 연연 말고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고 의지할 때 믿음은 점점 새로워집니다. 우리도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약속하신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양자의 신분을 얻는 것,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 찾게 하시고 온유한 자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 이런 약속들로 성경은 풍성합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약속을 바라보기 전에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13)라고 합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약속하신 이를 믿으며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의 보상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땅의 약속에만 올인했다면 일편단심은 흔들립니다. 하나님 그분과 그분의 약속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아브라함의 키워드이고 우리의 키워드인 것입니다.

결론

남미(南美) 에콰도르에서 선교했던 엘리자베스 엘리어트 선교사가 엊그제 8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56년 남편 짐 엘리어트를 비롯하여 5명이 에콰도르 아우카족() 선교를 떠났다가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합니다. 5명 모두 미국 명문 휘튼대학 출신의 28-29세 청년들입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대항하고 도망칠 수 있음에도 창을 맞았습니다. 선교를 위해 희생한 것입니다

 

결혼한 지 3년 만에 남편을 잃은 엘리자베스는 간호사 훈련을 받고 남편을 살해한 아우카부족 밀림으로 들어갑니다. 다행히 아우카부족은 여성에게는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녀의 선교사역으로 선교사들을 살해한 장본인 키모는 부족 최초의 목사가 됐습니다. 순교자의 자녀 2명은 아버지들이 순교한 팜비치 강가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92년에는 현장에서 그들의 언어로 번역된 신약성경 봉헌예배가 드려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런 결과로 슬픈 생애가 땅에서 보상받은 것은 아닙니다. 명문대학 친구 5명이 세상영광 마다하고 선교사로 나섰는데 그냥 죽었습니다. 야속한 상황이자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남편의 삶과 신앙을 담은 책 한 권을 씁니다.

 

<전능자의 그늘>

 

전능자에게는 피할 그늘도 있지만 때로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어두운 그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기적 한 번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생애였고 그에게 하나님의 그늘처럼 보이는 슬픔과 불행, 오랜 침묵이 있었지만 그걸 이겨내고 믿음의 조상’ ‘하나님의 친구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제단-장막-약속이라는 세 가지의 키워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가 우리 믿음의 키워드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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