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눈독을 들여도
잠언 23장 1~8절
서론
미국의 유명배우 멜 깁슨이 주연한 작품 중에, 상대방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마음을 얻는다는 영화 (왓 위민 원트)가 있습니다. 광고회사 중역 닉은 어릴 때부터 여자를 상품으로 봅니다. 그러다 전봇대에 때린 벼락에 감전되고 머리가 이상하게 되면서 여성의 생각이 귀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그동안 얼마나 상대방, 특히 여성의 심리를 헤아리지 못했는가, 잘못을 깨닫습니다. 이후 여성의 입장을 배려할 줄 알면서 같은 회사 중역 달시와 딸의 마음을 얻게 된다는 영화입니다.
영화 중에 “여자가 원하는 것을 알면 세상은 당신 것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자 말을 들으면 만사가 편하다! 그 뜻 아니겠어요? 신학교에서 귀 아프도록 듣던 말입니다. 목회 잘하려면 여성도 마음을 얻어야 한다, 권사님 여집사님들 마음 얻으면 목회가 편하다… 교역자 생활 38년 차에 그 말이 성경에 구절로만 나오지 않았을 뿐이지 목회의 진리입니다.
연속극도 여성시청자들의 마음을 사야합니다. 요즘 리모컨 주인은 엄마입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 안 보고 봐도 컴퓨터로 다운 받아 봅니다. 채널 선택권은 엄마이고 남편은 부인 옆에 앉아 곁다리로 봅니다. 그래서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중장년 여성, 그중에서도 40-50대 여성이 선호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대박 친답니다. TV프로그램 하나를 만드는데도 대상을 어디에 두느냐? 어디에 눈독을 들여야 하나, 상당히 중요합니다.
2014년, 무엇을 타깃으로 삼느냐에 따라 성공 실패, 행복 불행, 성장 후퇴가 결정됩니다.
잠언 기자는, 물질을 인생의 타깃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4절,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성경은 부자에 대해 전혀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아들 이삭은 그해 100배나 수확했을 정도로 대농입니다. 야곱은 거부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요한과 야고보, 니고데모, 아리마대 사람 요셉, 바울의 유력한 동역자 빌립보성(城) 자주장사 루디아도 부자 권사(?)였습니다. 부자들은 선을 행할 기회가 많습니다.
여러분도 할 수만 있으면 모두 부자 되기를 기원합니다. 가난의 대물림이 아니라 깨끗한 부(富)의 대물림을 하는 깨끗한 부자-청부(靑富) 크리스천 되기를 축원합니다!
문제는… 부자 되는 목표와 방법입니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크리스천의 정직함, 성실함, 하나님을 의지함…, 이런 순리와 반대되는 인간의 노력… 거짓과 술수와 사사로운 목표와 방법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지혜는 부함에만 눈독 들이는 것입니다.
부자 되는 일에만 눈독을 들이면 벌써 목적이 잘못되었습니다. 왜 부자가 되어야 하나?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내 자녀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려고… 재물의 공익성이 없습니다. 내 돈은 내 거다… 이런 소유의식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부자들이 욕을 먹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세계 부자들입니다. 2천 년 망국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은 돈이 없으면 무시당하고 죽는 줄 알았기에 죽기 살기로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인색한 부자들로 인식됩니다.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같은 소설이 인색한 유대인으로 왜곡시켰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돈에 대해 지독합니다. 돈에 대한 격언이 어느 민족보다도 유대인에게 유난히 많습니다.
“돈은 어떤 더러움도 씻어 주는 비누다.”
“돈으로 열리지 않는 문이 없다.”
“돈이 소리를 내면 욕이 그쳐진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늙어가지만 돈을 많이 가지면 점점 젊어진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지만 행복을 불러 오는 큰 역할은 한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죽을 때까지 돈이 쌓이지 않는다.”
유대인과 한국인과 중국인이 맥주 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파리가 중국인 맥주잔속에 들어갔습니다. 중국인은 건져놓고 마셨습니다.
파리가 한국인 맥주잔속으로 들어 왔습니다. “이거 뭐야? 다른 맥주 가져와!”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다른 맥주잔을 가져오니 파리를 건져내고 두 잔을 다 마셨습니다.
파리가 유대인 맥주잔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유대인이 파리에게 명령했습니다.
“맥주잔에서 마신 맥주 토해내”
그러더니 맥주잔의 맥주와 파리까지도 마시고 먹었습니다. 대단한 유대인입니다. 이처럼 돈에 철저한 유대인도 조국이나 동족들에게는 선한 부자입니다. 유대인의 가르침 중에 최고의 의인은 자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재산의 5분의 1을 자선합니다. 천국 입구에서 자격심사를 하는데 기준은 계명 준수와 자선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이웃, 국가, 유대 동족이면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돈을 매우 존경하고 돈을 사랑하되 하나님, 민족, 동족을 위해 아낌없이 자선하고 헌금하는 민족입니다. 그러니 오늘 유대민족이 생존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왜 부자가 되려는가? 개인주의 성향이 많습니다. 공익성이 없다보니 돈 버는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6절,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지어다”
악인들의 진수성찬을 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진수성찬은 요즘 우리말로 해석하면,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재산, 재물, 토지, 저금통장, 증권, 부동산…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꼭 탈이 나고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4절,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쉬운성경>은 번역을 이렇게 합니다.
“부자가 되려다 건강을 해친다. 분수에 맞게 사는 지혜를 배워라”
분수에 맞게 사는 지혜가 자족함입니다. 있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는 마음…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하고 벌고 노력하되… 현실에 만족하는 생활이 분수에 맞게 사는 지혜입니다.
정신과 의사 알렉스 박사에게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한 해에 만 오천 달러를 벌었는데 3만 달라만 벌면 걱정이 다 사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알렉스 박사는 경고했습니다.
"수입과 당신의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의 정신적 자세가 문제입니다"
환자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업은 번창하여 7년 후에 10만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정서상태는 더욱 나빠졌습니다. 집이 커지고 고급 차를 사고 아이들은 사립학교에 보내는 등 생활수준이 높아졌으나 불만이 쌓이고 짜증이 늘어나며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어느 날 가벼운 심장마비를 일으켜 입원했는데 그제야 참 행복의 의미를 깨닫고 신앙생활로 자신을 추슬렀다고 합니다. 돈의 액수와 행복의 크기와는 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돈을 주인으로 삼고 잘못된 방법으로 벌어 잘못된 주인을 섬기면 버는 것만큼, 갖고 있는 돈의 액수가 많은 만큼 순수함도 행복도 성공에서도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스위스 돈은 네 가지입니다.
50프랑-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는 가족 그림
100프랑-군인이 말에서 내려 외투를 가난한 자에게 주는 그림
500프랑-샘
1000프랑-죽음의 춤
스위스의 돈은, “돈이란 클수록 행복과는 멀어져 가고 위험하다”는 경고를 담은 것입니다.
이런 경고가 5절에 나옵니다.
5절,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여기 허무한 것은 무익한 것, 손에 잡을 수 없는 것, 헛된 것, 실체가 없는 허상(虛像)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우상(偶像)을 허무한 것으로 표현합니다. 사람들이 우상에게 숭배하고 제사 드립니다. 하지만 우상은 사람의 머리 속에서 생산해서 물체를 만들어 놓고 절하는 것입니다.
인격체인 하늘님이 있나요? 조상들이 있나요? 조상제사를 하는 분들, 말은 효도한다지만 주문된 음식을 배달해서 제사상 차리고… 바쁜 사람들은 제사예식장으로 찾아갑니다. 만들어 놓은 제사상에 각자 절하고 끝납니다. 이게 허무-헛된 일입니다. 진짜로 부모님의 임재를 믿는다면 그럴 수 있습니까?
잠언 기자는,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을 돈에 주목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쉬운성경>은, 눈독을 들이는 것으로 번역합니다. 우리가 돈에 벌게서 형제도 몰라보고 크리스천의 명예도 잃어버리고 돈독에 오르는 것은 눈독을 들이는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눈독은 오직 돈에만 눈의 기운이 들어있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게 이성을 향하면 음기(淫氣)이고, 여러 대상이면 중독입니다. 중독은 몸도 마음도 인생도 망치고 맙니다.
왜냐? 허무한 것에 눈독을 들였기 때문입니다. 사막에서 만나는 신기루… 그게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가 없는 것이 눈에 보여서 찾아, 가다… 가다… 몇 날 며칠 헤매다 실성하고 맙니다. 우리가 눈독을 들여 재물과 명예, 사람을 얻었다 해도 눈독 들여 얻은 것이라면 재물에 날개가 달려 날아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을 잡았습니다. 내 것이 아니니 포르릉 날아가 버립니다.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찾아 떠나는 백성들을 향해, 너희들은 생수를 버리고 웅덩이를 찾아 떠난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자고새는 꿩과(科)의 메추라기입니다. 도망갈 때도 날지 못하고 뛰다 잡힙니다. 남의 새 알을 훔쳐 자기 알로 품는 도둑놈 심보가 있습니다. 품고 있던 알에서 새끼가 나오면 지극한 정성을 다 쏟아 붓습니다. 그러나 그건 허무한 것에 주목하는 일입니다. 새끼가 크면서 보니 어미와 자기 생김새가 너무 다릅니다. 그제야 제 어미가 아닌 줄 알고 굿바이~ 날아가 버립니다. 자고새는 헛고생만 했고 그 허망함에 낙담이 큽니다. 불의한 재물을 축적하는 사람과 인본주의 경제관을 갖는 사람은 반드시 파멸할 것이라는 선지자의 외침입니다.
우리 생애에 그런 어리석은 자고새들은 보이지 않나요? 내가 쌓아올린 것들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이요 소유입니까? 그렇다면 정한 것에 마음을 두었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분복이요 자랑스런 것입니다. 이런 것들로 부자가 되는 깨끗한 부자들은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그의 재물이 하나님께는 물론 교회와 이웃들에게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제대로 섬기지 않고 크리스천의 명예도 포기하면서 얻으려는 것이라면 그건 허무한 것이요 허무한 것에 눈독을 들인 생애입니다. 그러면 결과는? 자고새처럼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IT천재 스티브 잡스는 세계 역사를 다시 쓴 인류최고의 위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래서 잡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세계가 애도했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의 사후(死後), 한국에서 발매된 전기는 단 하루에 10만부가 팔렸습니다. 굉장한 인기입니다.
IT업계의 전설이자 성공한 인물 잡스는 그 많은 업적과 돈과 명예로 행복했을까요? 그러나 죽어가면서 남긴 아빠 잡스의 마지막 말은 “iSorry”(미안해)입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쫓고 쫓겨 다니는, 추격자이자 도망자 신세 스트레스의 생애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알고 내세를 인정했다면 일생을 걸고 살아왔던 그의 인생은 허무한 것에 눈독을 들인 삶이 아니라 천국에서 만나자… 내세를 기약하는 삶이고 그가 만든 스마트 아이폰을 통해 남에 대해 관심도 없고 부모 자식 간의 대화도 끊어져 버린 세상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겠지요. 이것이 하나님이 빠진 자수성가의 함정이며 허무한 것에 눈독을 들인 자고새의 허무가(歌)입니다.
영적으로 스티브 잡스가 비극적인 생애가 되어버린 것은 돈을 버는 기술, 명예와 편리함을 추구하는 기술은 있었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기술-지혜는 없었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허무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불변의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에게 눈독을 들였어야 영원한 세상에서까지 영생하는 삶의 기술을 터득했을 텐데 잡스는 그걸 놓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결국 허망한 것에 주목했다가 그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것입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결말을 비교합니다. 잠시 세상에 있는 동안은 악인들이 성공하는 것 같습니다. 정직하면 손해를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악인의 삶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곡식을 수확할 때 낱알은 떨어지나 겨는 가볍기 때문에 바람에 날아가 버립니다. 농부는 알곡을 원한 것이지 겨를 뭐하러 원하겠어요.
농부가 공들이지 않고 대강대강 농사를 지어 바람에 나는 겨를 얻게 된다면 얼마나 허무합니까? 겨는 무가치한 것, 허무함을 비유한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4절의 허무한 것에 눈독을 들였던 사람의 무가치한 종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는가에 관심이 없으시고 돈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신다.”
우리 재물과 명예가 바람에 나는 겨가 아닙니까? 자고새들은 아닙니까? 허무한 것에 눈독 들인 결과 날개를 내어 날아가 버린 것은 아닙니까? 그러면 솔로몬처럼 전도서를 씁니다.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하나님을 몰랐으면 모를까 알았으니 허무가로 인생을 마감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무가치한 것을 자녀에게 대물림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결론
미국의 심리학자 알버트 엘리스는, 인생이 왜 힘든가에 대한 이유로 세 가지를 말합니다.
-나는 꼭 성공해야 한다.
-모두가 나를 좋아해야 한다.
-인생은 쉽게 살아야 한다.
이것도 어느 정도 우리 인생을 힘들게 하지만 결국 허무한 것에 눈독을 들이는 사람과 하나님에게 주목하는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방송국 PD들은 40-50대 중장년 여성들에게 눈독 들여 대박내고, 자고새는 도둑씨를 품고 쪽박 났다면 우리는 잡아도 잡히지 않는 바람처럼 허무한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에게 눈독 들이고 주목해서 한해 행복하게 삽시다!
<왓 위민 원트>의 한 대목, “여자가 원하는 것을 알면 세상은 당신 것이다”라는 말을 이렇게 바꾸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면 행복은 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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