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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어찌 하늘만 쳐다보느냐(사도행전 1:9~11)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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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하늘만 쳐다보느냐

사도행전 1장 9~11절

서론

요즈음 어떻게 된 노릇인지 기독교와 불교의 자리가 맞바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가 산 속에 호화판 기도원과 수도원을 짓고 교인들을 자꾸 산 속으로 끌어갑니다. 산 속에서 교인들끼리 모여 생활하고 기도하느라 점점 명상화되고 사람들과 유리(遊離)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성교회의 예배나 신앙생활에 재미를 못 붙이니까 동네마다 기도원 세우고 은사집회 열고... 점점 현실과 멀어지는 이상한 광신자들이 되고 있습니다.

 

불교는 반대입니다. 수백 년 동안 산 속에 들어있어서 백성들과 떨어져있던 불교는 요즈음에 들어와서 마을로 내려오고 도회지로 나옵니다. 주택가에도 절이 생기고 상가에도 포교소를 세워서 현실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을 교화시키려 합니다.

로마가톨릭은 처음부터 현세에 상당히 민감한 종교입니다. 성경이 금지해도 가톨릭의 교세 성장에 도움된다면 현실과 적당히 조화를 이루어 나가려는 게 성당입니다.  

 

현대인들이 어떤 종교를 선호하겠어요? 현대인들의 삶과 유리되고 저희들끼리만 모여서 불 받았다, 신비체험 했다 하는 기독교에 호감을 갖겠습니까, 현실생활에서 종교를 실천하는 생활불교와 가톨릭에 호감을 갖겠습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이러다가는 21세기 기독교는 산중(山中) 종교로 고립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기독교, 개인의 종교적 열정에 점점 신비주의로 빠지려는 기독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내용입니다.

1. 어찌 땅만 바라보느냐?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40일을 함께 하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사실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의 육신과 행동은 아리송한 데가 많습니다. 부활하셨으면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다 떠나가시면 좋을 텐데 불쑥 나타나셨다가는 사라지고 또 방문이 잠겨있는 데 불쑥 들어오시고 이러기를 40일 정도 계속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계시다가 어디론가 사라지시면서 재림을 말씀하셨다면 역사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적어도 고린도전서 15장에 의하면 5백 명 이상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기에 역사성이 뚜렷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하늘나라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죽음 이후에 영혼이 올라갈 나라, 영혼이 승천할 공간적 장소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육체 속에 들어있던 영혼이 빠져나감을 뜻합니다. 영혼이 빠져나가 버리면 육신은 시들어 버립니다.

 

영혼은 육신에게서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감, 즉 승천하고 신체는 흙으로 지음 받았기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나 모든 영혼이 승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승천은 내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끌어당겨 주어야 합니다.

 

11 "올리우신"

하늘에서 끌어당겨야 승천이 가능한데 위에서 누가 끌어주시는가, 자석처럼 하나님이 끌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천국에 들어와서 살 수 있는 요소가 있는 사람들을 끌어올리십니다. 그러니 영생의 요소가 없는 사람들은 승천하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세상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세상은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하고 돈 벌여야 하고 정신적 존재이기에 명예를 얻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의미는 승천할 수 있는 기회의 장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할 수 있을까? 승천할 수 있을까?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고 어떻게 하면 천국으로 오를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손에 잡아야 하는 첫 번째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죽음 앞에서 솔로몬 왕처럼 "헛되고 헛되구나... 모든 게 바람을 잡는 것처럼 부질없는 것이구나" 탄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젊은 나이에 당시의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정복할 곳이 없어서 탄식했다고 합니다. 그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부하들에게 관 밖으로 자기의 손을 내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세상이 부질없음을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정복한 영웅이지만 갈 때는 빈손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세계를 제패한 것보다 세상에게 남겨준 더 큰 교훈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위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영혼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영혼은 승천해야 합니다. 승천은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는 요소를 지닌 사람들만 가능합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생의 요소가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이요, 승천할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요 이것이 인생에서 처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바로 너희들은 승천할 자격을 갖추고 있느냐를 날마다 묻게 하는 것이며 육신의 생각에서 영의 세계로 눈을 올리라는 것입니다

2. 어찌 하늘만 보느냐?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눈에 보이게 위에서 끌어당기는 것도 아니고 천사들이 양쪽에서 끌어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쭉 올라갑니다. 굉장한 모습입니다.

 

10, 제자들은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상당한 시간 동안 쳐다봄을 의미합니다. 구름이 예수님을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할 때까지 오래도록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순간적인 환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입니다. 한두 사람이 순간적으로 본 게 아닙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승천이 있었기에 부활은 더욱 확실한 것이었고 재림 역시도 분명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승천과 주님이 사라져버린 구름 저 너머에만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현실에서 유리된 신비주의자들이 되어버릴 것이고 초대교회의 현실성은 약화되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우고 구제하고 선교하는 것보다는 감람산 산중에 천막 세워놓고 그곳을 신령화시키며 그곳에서, "바로 저 하늘로 승천하셨다!" 말하며 현실과 유리된 이단들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때 10, 흰옷 입은 천사가 제자들 곁에서 그들의 시선을 낚아챕니다.

 

11,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언제까지 하늘만 보고 있겠냐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감람산 이 산중에 기도원 세워놓고 사람들을 모으고 헌금 받고 기도원 건물을 더 거창하게 세우며 종교화했다면 훨씬 쉬웠겠지요. 그러나 기독교는 샤마니즘화 되어 버렸을 것이고 세계적 종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도 하늘만 쳐다보며 비몽사몽간의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허구한 날 기도원이나 쫓아다니고 이곳이 좋다면 이곳으로 가고 저곳이 좋다면 저곳으로 가고 중학생이 꿈에서 재림날짜 받았다면 그 날짜에 주님 오신다고 저희들끼리 모여 현실생활 팽개치고...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휴거를 점쳤던 하방익 소년은 패인이 되고 구세주라던 장막성전의 유재열은 허드레 사업을 하고 있다는 뒷소문입니다.

 

요즈음 제가 알고 어느 교회 권사가 `뜨레스디아'라는 곳에 빠져들어서 그 가족들이 상담을 받았어요. `뜨레스디아'는 가톨릭에서 시작된 명상, 영성단체인데 기독교로 개조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이곳은 일단 들어가면 세상과 차단시켜버립니다. 시계도 벗어놓고 전화도 못 받게 하고 서로 간의 사랑을 고백하도록 해요.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 대단하답니다. 이제야 예수를 새롭게 알았다는 거예요. 문제는 공부했으면 무엇해요? 저희들끼리만 모이는 거예요. 저희들끼리 편지 주고받고 다음 교육생들 위해 돈 대주고... 권사님 가정이 분란이 일어났어요.

교회에서 서로 의견이 갈리고 마음이 갈리고... 하던 사람들이 이곳에 입소하면 서로 천사 같아요. 한번씩 만나는 데 갈등이 없는 게 당연하지요. 그러나 그 사람들도 우리처럼 오래도록 한 교회에서 같이 살아봐요. 꼭 같아요.

 

"어찌하여 서서 하늘만 쳐다보느냐?"

 

하늘만 쳐다보고 살고 싶은 게 신앙인들에게 소망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곳을 더 이상 보지 말라고 합니다.

기독교를 명상적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산 속에 들어가서 공동생활 하거나 검은 옷 흰옷 입고 두 손 쳐들고 있는 따위의 허망한 짓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세상일이라 제껴놓고 정적 경건이니 명상이니 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특이하게 믿는다고 신앙심이 깊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서서 하늘만 쳐다보는 신비주의자가 되서는 안 됩니다.

3. 예수를 쳐다보아야 합니다.

천사들은 제자들에게 언제까지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것이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11,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자체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설자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고승이 어떤 산을 가리키니까 사람들이 산을 바라보지 않고 손가락을 바라보아요. 그랬더니 고승이 버럭 소리를 질렀어요.

"산을 가리켰으면 산을 보아야지 왜 손가락을 보는가?" 

그래요. 우리는 승천을 감싸고 있는 구름을 볼 게 아니라 예수님 그 자체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고달픕니다. 우리의 육신은 날마다 늙어가고 후패해져 갑니다. 어떤 이들은 질병으로 너무 오래도록 시달렸습니다그러나 우리의 몸은 승천할 몸입니다. 승천할 때는 모든 육신은 씻은 듯 새살과 새 몸으로 단장한 몸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승천을 생각하며 견디어야 합니다.  

아울러, 재림하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런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불시에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재림신앙에 중심을 두어왔습니다. 서로 만나서 인사 나눌 때 유대인들은 "샬롬!"이었지만 초대교회는 "마라나타!" "주님께서 이제 곧 오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삽시다"라고 했습니다.    

 

미국에 척 스미스 목사님이 담임하는 <갈보리채플>이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인데 곽선희 목사님이 가보았더니 꼭 서커스 천막 같더랍니다. 사람만 많이 앉게 나무로 대충 지어놓았어요. 꼭대기에 <갈보리채플>이라 교회 이름이 있고 그 밑에 "마라나타 커뮤니티"-`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동체'라고 적혀있더랍니다.

 

어떻게 보면 이게 교회 아닐까요? 요즈음 교회가 주님의 재림을 가르치면서 수십, 수백 억 짜리 견고한 건물 지으면 누가 그 재림의 가르침을 믿겠어요? 웬만한 크기로 지어야지 수십 년 수백 년 가는 예배당 지어놓으면 골동품 되고 할 일 없으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게됩니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님은 "부흥되는 교회는 2년에 한번씩 예배당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도수가 늘어나니 작아서 또 늘리고 또 늘리고... 늘려 가는 교회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이처럼 항상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면서 경건을 쌓아가야 하고 경건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 주님이 오시더라도 교회가 흠 없고 점 없는 사람들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눈은 재림하실 이 땅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은 심판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공간이 있습니다. 지금 2천 년 정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왜 이 공간을 남겨두셨습니까?

 

8,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입으로 전도하고 삶과 인격으로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증인은 실천을 통해 가능합니다. 나 혼자만의 신비에 빠지고 즐거움에 도취되는 믿음이 아니라 재림하실 그 때까지 땅의 것들을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정착시키려는 성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증인입니다.

결론

"왜 땅만 쳐다보느냐?"

땅의 것들에 너무 연연하지 마십시오. 땅의 것들은 마르고 시들어 버립니다. 우리의 인생 쉬 가버립니다. 땅의 것들만 바라보다가 육신 죽을 때 영혼이 기댈 때 없어 후회하며 탄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느냐?"

하늘만 쳐다보지 마십시오. 신비주의, 광신주의, 주관적 체험에 너무 빠져들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을 등지게 만들고 도피 중인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만 바라보십시오.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승천을 기대하십시오.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경건의 모양을 지니십시오. 그리고 승천과 재림 사이에 현실에 뿌리를 내린 증인으로, 인격적 삶이 있고 실천이 있고 성실함이 있는 건강한 교회,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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