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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설교도 맛있다] (종교개혁주일) 로마가톨릭은 로마에서 시작되었을까?(갈라디아서 1:6-10)

by 강정훈말씀닷컴 2025.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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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2025. 10. 18

로마가톨릭, 어떻게 설교할까?

로마가톨릭은 로마에서 시작되었을까?

갈라디아서 1장 6-10절

 

대(大)신학자 사도 바울은 개종 이후 로마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복음전도자의 생활을 한다. 바울만 아니라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 초대교회 신자들이 로마를 복음의 핵심 대상지로 삼았다.

당시 로마야말로 세계의 중심지였다. 모든 법(法), 문화, 예술, 군사의 중심지가 되어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이 생겨난다.

 

로마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호의적이지 못했다. 기독교가 이방신들을 배척하고 황제 숭배를 거절하였기에 무신론, 무정부주의자라는 혐의를 받았고, 열렬한 일부 신자들은 사회생활을 등한히 했기 때문에 일반의 오해도 샀다.

 

성만찬의 ‘살과 피’ 의식을 식인(食人) 야만인의 짓이라 비난했고, 저녁 비밀집회도 혐의를 샀다. 이런 이유로 크리스천들은 로마정부는 물론 일반 범죄자들에까지 박해와 강탈을 당하는 수난을 받아야 했다. 이런 비난과 박해를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과 박해자들보다 더 고결한 도덕생활을 함으로서 고난을 이겨내었다.

복음이 로마를 정복하다

바울은 로마제국 내의 박해 상황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로마를 복음전도의 중심지로 생각한 것은 로마의 영향력이다.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할 수만 있다면 세계 복음화가 가속화되리라는 생각에서 로마로 가려고 했고, 로마에 복음을 전파하려고 힘썼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당시의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기술한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0절)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절)

 

바울은 이러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의 세계 선교여행에서도 고대하던 로마에는 갈 수 없었다. 그러다가 말년에 죄수의 몸이 되어 로마로 가게 된다. 로마에 복음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묘하신 섭리를 보라. 자유의 몸으로 로마에 가기를 원했으나 죄수 신분으로 로마에 가게 된다. 이로써 로마에 복음을 전할 기회가 방해받게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죄수 신분이기에 높은 관리들과 대면할 수 있었고, 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로마행의 좌절로 오히려 <로마서> 저작의 계기가 되었다. 그는 로마의 새로운 개종자들을 만나기 원했으나 여의치 않으니 <로마서>로 바른 복음을 선포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세계 복음 전파의 기지로 로마를 생각하였고, 그곳에 투옥되고 순교까지 했으나 복음은 쉽사리 로마를 정복할 수 없었다. 누룩처럼 서서히 번져갈 뿐이었다. 하나님의 왕국은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성냥 하나로 시작된 산불이 마른 대지로 번져가듯 그렇게 로마의 사회 속에 번져나갔다. 누구도, 어떤 세력도 성령의 역사를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2세기 중엽 어느 변증가가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느 곳에나 있다. 너희 마을에도, 도시에도 있다. 너희 나라에도, 육군에도, 해군에도 있으며, 궁성에도, 원로원에도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수는 누구보다도 많다”라고 호언할 만큼 급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주후 300년까지 교회는 놀라운 위력과 용맹을 떨쳤고 주후 500년대에는 개화된 온 세계가 거의 복음화 될 기세로 나아갔다. 그동안의 교회의 신앙과 신학사상은 성경적이었다. 교황직위, 마리아숭배 제도도 없었다. 정통적인 사람들은 오직 66권의 정경만 인정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복음화 되기를 원했던 로마에 교황청이라는 세상 왕국을 건설해 놓는 일도 없었다. 교회는 세속적으로 연약했고, 세속적 권력을 소유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순수한 복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바울이 로마에 전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받는다는 복음이었다.

기독교 신앙이 공인받다

주후 300년에 접어들면서 기독교 역사에 엄청난 대변혁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탈(脫) 기독교의 징조이기도 했다. 사탄은 로마 황제들에 의한 박해를 동원해서는 도무지 그리스도교를 멸절시킬 수 없음을 알고 방법을 달리하기 시작한 것일까?

 

주후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틴 2세가 그리스도교에 완전 자유를 주는 칙령을 발표했다. 밀라노에서 선언했다하여 일명 ‘밀라노 칙령’이라고 부른다.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선언했던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4대 경쟁자 중의 하나였던 멕센시우스와 전투 대치 중 꿈을 꾼다. 꿈에서 ‘그리스도’의 첫 두 헬라어 글자와(XP) “이 군호로 정복하리라”는 글을 보았다.

 

콘스탄틴은 신탁(神託)의 좋은 징조로 알고 자기 철모와 군인들 방패에 XP를 겹쳐 Px를 그리게 하여 대승리를 거두게 되고, 이를 계기로 서방은 콘스탄틴의 천하가 되었으며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이 승리를 주신 줄 확신하고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게 된 것이다.

 

콘스탄틴의 입교(入敎)는 모친 헬레나의 신앙적 영향이 컸고 신비한 꿈-현상을 본 탓도 있겠으나 그보다 황제로서의 야망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고 생각된다.

로마가 세상을 제패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종교가 통일되어야 함을 믿었고, 로마의 정신통일을 이루는 종교가 어떤 종교이어야 할까를 생각하는 중에 마침 로마 사회에 급속도로 번져가는 그리스도교가 적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마 황제는 로마제국이 계속해서 이교도들과 그리스도교인들과의 투쟁으로 분열되는 대신에 여러 종교를 그리스도교 중심으로 혼합하여 자신의 기반을 돈독히 하는 ‘통일된 힘’을 위해 이런 종교적 조처를 내렸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 공인은 종교적 수용보다는 정치적이고 정략적인 면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로마교회, 바벨론종교와 빅딜 성공

로마가 세계제국이 되자 수많은 이방 종교들이 로마에 흡수된다. 이들 종교는 황제 숭배와 함께 자기 종교를 간직할 수 있었다. 그러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게 되자 수백만의 미개인들이 그들의 이교와 미신과 이단을 그대로 가지고 홍수처럼 교회에 밀려들었다.

 

그들은 복음을 알지 못했다.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단지 그리스도교에 머물기 위해 들어온 자들이었다. 그 수(數)가 너무도 엄청나게 많았기에 자연히 그리스도교라는 물줄기는 그들 중심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각각 그리스도교를 자기 종교화했으며, 한꺼번에 수많은 이교도들을 받아들인 로마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바울에게서 내려온 복음을 고수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동화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침식됨으로 결국 복음의 내용을 양보하면서 그들의 종교적 관습을 받아들이게 된다.

 

바벨론종교는 교황제도, 고해성사제도, 독신제도… 등으로 로마의 최대 교단 종교였다. 기독교가 박해받을 때 번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황제를 비롯 측근들이 기독교인이 되자 살아남을 궁리를 하게 된다. 그것은 로마에 들어온 그리스도교와 합병-혼합하는 것이다.

 

베벨론종교는 로마 그리스도 교단에 신전(神殿)을 제공했다. 원래 그리스도교는 고백 공동체 종교다. 건물-예배당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형교회, 대형공동체를 기대하지 않았고 작은 공동체 예배로 시작했기에 신전을 탐낼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카타콤에서 3백년을 견디며 복음을 수호해 왔던 지도자들이 어마어마한 신전을 보는 순간 흔들리고 만다. 그래서 그들과 병합하고 로마가톨릭은 성당(聖堂) 종교가 된다.

신흥종교 기독교에 신전을 예배당으로 제공한 바벨론종교는 무엇을 요구했는가, 자기들의 제도를 로마교회교가 채택해줄 것을 요청했다. 소위 종교 간의 ‘빅딜’이다. 그래서 바벨론종교와 합병한 로마교회는 갑자기 예루살렘교회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교회로 부상한다. 로마의 정치적인 힘을 배경으로 세계의 어머니교회가 된 것이다.

 

로마에 들어간 교회의 바벨론종교화. 지금 로마가톨릭에서 경배되고 있는 마리아(어머니) 숭배, 성자숭배, 교황 숭배… 등등이 바로  당시 로마교회에 무더기로 들어왔던 이교도들의 신앙, 그중에서도 바벨론 종교의 혼합물임은 세계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기에 이 새로운 혼합종교, 새로운 교회를 가리켜서 그리스도교라기보다는 로마가톨릭 혹은 로마교(敎)라고 해야 온당할 것 같다.

로마가톨릭은, 바티칸은 베드로의 순교 자리라고 한다. 이곳은 로마주교의 공관이 있던 자리이다. 이것이 어느 새부터 세계교회의 중심이 되고 로마교황청이 된 것이다.

 

로마교황청이 생기면서 자신들이 베드로의 후신(後身)이라는 점을 내세운다. 교황은 베드로를 잇는 인물이 되었다. 교황청은 곧 교회가 되고 교회 권위를 최고로 높였다. 교황은 성경보다 우위에 있고 교황이 성경을 빼기도, 집어넣는 권력을 얻게 된다. 콘스탄틴대제가 세계제패라는 정치를 위해 종교를 이용했는데 이제는 반대로 종교통일을 위해 바티칸이라는 제국을 세우고 정치를 종교에 이용하고 있다.

 

이제는 아시아권에서도 교황은 바티칸의 수장으로 대접을 받으며 대한민국을 방문하고 대통령이 공항까지 나아가 종교지도자를 영접하는 대단한 일이 생긴 것이다. 만약에 티베트의 불교지도자 달라이라마가 방한한다면 대한민국 대통령이 공항까지 나갈 것인가?

로마교회는 큰 집, 개혁교회는 작은 집?

로마교회는 로마제국이라는 세속적 권력의 비호 아래 전 세계교회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교회 권력을 쌓는 일이라면 무차별적으로 이방종교와 미신들을 혼합시켰고, 교리화해 나갔다. 갈수록 복음과는 멀어져 갔다. 이러기를 1200여 년이 흐르기까지 계속했다.

 그러다가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의 기본정신은 “성경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1200여 년 동안 세상왕국을 이루고 있는 로마가톨릭 안에서 복음을 지켜왔던 이들의 호응을 받았으며, 교황청의 통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일반 군주들의 동조를 얻게 되어 순식간에 큰 물줄기를 이루게 된다.

 

로마교회 안에 있으면서 눌림을 받고 있던 참 그리스도인들은 중세기에 잃어버렸던 복음을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로마교회에게 빼앗겼던 복음을 되찾기 위해 무리를 이루어 나아갔을 때 교황청은 ‘프로테스탄스’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분리자’, ‘이탈자’, ‘항거자’라는 의미이다.

 

이 명칭은 기독교가 마치 그리스도교에서 이탈하거나 분리되어 나간 어떤 교파인양 사람들을 오해시킨다. 로마가톨릭이 바라는 바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심지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기독교인들조차 로마가톨릭교회는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계속 계승해 내려오는 전통적이고도 정통교회요, 기독교는 이탈하여 새로 생겨난 작은 종파로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로마가톨릭은 큰 집이요, 기독교는 작은 집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 교인들은 잘못된 시각을 수정해야 한다. 과연 로마가톨릭은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임명하셨는가? 베드로→바울→어거스틴→로마교로 이어져 내려왔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로마교회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계승해 온 전통적 교회가 아니다. 성경의 가르침에서 잘못된 곳으로 이탈해 나간 변질된 교회요, 그리스도교를 로마교로 만들어버린 자들이다.

 

베드로(사도들)→바울로 이어져 내려온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교회는 유일하게 기독교다. 기독교는 ‘다른 복음’(갈 1:6)에서의 분리자, 이탈자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사도들의 후예요,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전승하는 전통적 정통교회다.

 

그리스도교-기독교는 루터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해서 로마교라는 변질된 그리스도교를 떼어내고 ‘홀로서기’를 감행한 것이다. 그러기에 ‘천주교는 큰 집 기독교는 작은 집’이라는 말은 물론 ‘구교’나 ‘신교’라는 용어조차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구별은 로마 교황청의 계산된 구도이며 로마가톨릭의 역사가들에 의해 변조된 그리스도교 역사일 뿐이다.

 

설교자들과 성경교사들이 교황청이 만들어낸 왜곡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가 가르치는 성도님들, 어린이신자님들, 청소년신자님들은 갈수록 외형적으로 화려한 인본주의 종교에 마음이 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교자들이 먼저 바른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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