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그 블로그, "읽고 싶은 책이었는데 저자의 글솜씨에 반하고 다시 읽고 싶은 책"
[아래의 내용은 강정훈 저서 "생활거룩"에 나옵니다.
설교로 만들어서 사용하세요]
성화신앙이 종교개혁의 완성이다!
베드로전서 1장 15절
2013년 9월, 한국개혁신학회가 발표회를 가졌다. 강의에서 이동영 박사(서울성경대), 정훈택 박사(총신대)는 구원론을 근거로 한국교회의 천박한 믿음을 질타해 관심을 모았다.
이동영 박사는 한국교회가 믿기만 하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면서 “오직 믿기만 하면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구원론은 개혁파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파적인 것”이라 지적했다. 그러다보니 성도들의 선행은 구원을 이루는 성화에는 아무 관계가 없고, 오직 천국에서 상급을 수여받는 것만 관계가 있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성화가 없이는 칭의도 없다
왜 구원파적 구원관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정훈택 교수는 이에 대해 “성경 본문을 그대로 읽지 않아서”라고 지적했다. 한국교회 안에서 성경해석방법론이 종교개혁의 두 명제, 즉 ‘오직 믿음으로’와 ‘오직 성경으로’ 사이에서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명제가 구원만 아니라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버렸기에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제자도의 삶을 사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과 값싼 축복만을 추구함으로써 세상의 지탄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구원파와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루터를 포함한 개혁가들의 정신은 ‘오직’이라는 강령에 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런 ‘오직’의 삶을 살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칭의로만 가능할까? 그건 아니다. 칭의 신분에 감사하면서 부단한 회개와 자기개혁이 요구된다.
이는 루터가 비텐베르크 정문에 붙인 대자보 반박문(의견서)의 첫 부분 1조~3조를 회개에 둔 이유이다. 특히 제3조의 문장, “단지 마음으로만 회개하라는 것은 아니다” “육욕에 대한 금욕적 생활 태도가 몸에 잘 배어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은 마음에서 시작하여 행동으로 날마다 드러내야 하는 회개의 삶이 개혁의 삶이요 ‘생활’신앙이다.
개혁가들의 주장이 아니라도, 매일의 회개는 결국 매일의 성화로 이어져야 한다. 개혁주의가 성경적 교리에는 성공했지만 개혁을 완성하지 못한 이유는 개혁자들의 가장 중요한 교리가 되는 이신칭의 문제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고 칭의를 성화로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중심 교리, 칭의(稱義)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은총의 교리이다.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은 어떤 행위도 첨가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이것은 가짜 기독교와 참 기독교를 구별하는 잣대이다.
그러나 개혁주의교회가 칭의 만능에 빠져 성화를 놓쳐버렸다. 성화는 매일 회개를 통해 거룩으로 나아감이요 예수님을 닮아내는 것이다. 매일 회개라는 자기 해체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죄에 대한, 거짓에 대한, 가짜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세속화 상태의 자신과 타협함으로 개혁교회는 다시 중세교회로 유턴(U-turn) 중이다. 그래서 칼빈은 “성화가 없이는 칭의도 없다”고 단언한다.
칼빈의 주장대로,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칭의와 성화를 동시적으로 체험한다. 물론 칭의는 완성품이고 성화는 미완성이다. 칭의와 성화는 완성과 미완성으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러기에 개혁이 진정으로 성공하려면 칭의와 함께 성화를 강조해야 한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화는 칭의의 열매로 반드시 나타나야 하지만 성화가 조금이라도 칭의의 근거나 전제조건이 될 수는 없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완전한 의로움에 근거하여 확정적으로 내려진 것이기에 완전하며, 영원히 변개될 수 없다(롬 8:1,30, 33~39; 웨스트민스터 대교리 문답 77).
로마가톨릭은 성경적으로 볼 때 비(非)성경제도, 비복음 교리를 갖고 있지만 착한 행실을 곁들이는 이행득의(以行得義)의 교리로 선한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전제한다. 그러다보니 착한 행실을 낳아 좋은 종교, ‘친절한 천주교신자씨’로 인식되고 있다.
개혁주의교회는 좋은 제도 바른 성경교리를 갖고 있지만 지나치게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以信得義)에 행실까지도 위탁해 버림으로 선한 행위에 열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신자들이 아니라 믿음은 좋은데 행위는 보이지 않는, 말로만 믿는 신자로 본다. 세상은 신자들의 행동을 보는 것이지 교리를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천주교를 좋아한다. 여기서부터 한국교회가 ‘안녕’하지 못하고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개신교와 로마가톨릭이 닮아가고 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미국과 서유럽의 개신교-가톨릭 교인을 대상으로 설문을 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비슷한가?” 미국 개신교인 57%는 유사하다, ‘다르다’는 41%, 미국과 서유럽 개신교인 10명 중 6명이 개신교가 가톨릭과 별 차이 없다고 답했다. 종교개혁의 본산 독일에서는 4명 중 3명이 개신교가 가톨릭과 비슷하다 답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답한 미국 개신교인은 46%, 절반이 넘는 52%는 ‘믿음과 선한 행위가 함께 있어야 구원받는다’고 답했다. 이는 가톨릭의 전통적 구원론이다.
루터의 고향 독일에서는 61%가 믿음과 선행 모두 필요하다고 답했고, 칼빈을 낳은 스위스에서는 57%가 둘 다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개신교의 핵심 교리 ‘이신칭의’는 종교개혁자들의 고향에서도 힘을 잃고 만 것이다. ‘오직 믿음’ ‘오직 성경’ 모두를 고백하는 미국 개신교인은 30%에 불과했고 52%는 성경 못지않게 교회의 권위와 전통도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 역시 가톨릭의 교리와 가깝다.
그런데 문제는 개혁주의교회가 로마가톨릭을 닮아가면서도 행실을 강조하는 가톨릭의 행위 교리만큼은 외면함으로 ‘신앙생활’에는 열심하는데 ‘생활신앙’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교리와 열심에서는 앞서고 있지만 행위에서 천주교인들에게 밀린다. 우리들의 ‘열심’이 그들의 ‘점잖음’에 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왜 욕을 먹을까? 세상보다 나빠서가 아니다! 신자들이 받는 최고의 욕은, “뻔하다” 신자들은 “뭔가 다르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데 “믿음은 혼자 있는 척 행세하지만 알고 보면 저들도 뻔해!” 라는 욕을 먹는 신세가 되었다. 오죽 했으면 “선한 세상 사람들이 크리스천 같고, 크리스천은 세상 사람들 같다”는 비아냥거림까지 나왔을까. 하나님께 죄송한 일이다.
성화, 현재형 구원이다
한국교회에 성화공백이 생기는 이유는 지적된 것처럼 구원론에 대한 오해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이미 완성되었다는 한 쪽의 가르침만 알지 계속 완성되어 가야할 또 다른 현재 구원, 미래 구원의 일면을 놓쳤기에 그 좋은 믿음의 연륜에도 성화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영국 성공회 주교 웨스코트 박사가 기차 여행 중에 어떤 여성과 합석했다. 뜨거운 전도열을 가진 여인은 상대방이 유명한 신학자인줄을 알지 못하고 순박한 열심으로 물었다.
“선생님, 당신은 구원받으셨나요?”
그 질문에 웨스코트 박사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지금 과거형으로 구원을 물었소? 현재형으로 물었소? 아니면 미래형으로 구원을 물었소?”
대신학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여인은 어안이 벙벙하여 낯선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웨스코트 박사는 구원을 셋으로 분류한다.
과거형 구원(I was saved). 이미 받은 구원이다. 과거에 이미 일어났고 이미 완성된 영혼 구원이다. 이는 칭의 부분의 구원이다.
현재형 구원(I am being saved). 지금 받고 있는, 지금 받아가고 있는 구원이다.
미래형 구원(I will be saved). 미래에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는 완성된 구원이다. 이것은 천국상급과 연결되는 영화 부분의 구원이다.
전도열에 불탔던 여인은 대신학자에게 어떤 구원을 물었을까? 물론 과거형 구원이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느냐? 구원을 말할 때 대부분 이런 구원이다. 웨스코트 박사는 이런 구원을 과거형 구원이라 했다. 과거형 구원은 과거에 일어난 구원, 내 죄에도 불구하고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구원, 단 한 번에 끝나버린, 완성된 구원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구원을 이미 받았다. 구원에는 내 행위가 조금도 개입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가운데 이루어진다. 이런 구원이 있기에 우리는 아직도 믿음의 분량에서나 인격에서 미완성품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밤에라도 천국에 갈 것이다.
현재형 구원은 현재 이루어 가는 구원, 삶에서, 생활에서, 인격에서, 성품에서 이루어 내야 할 미완성의 구원이다. 영혼 구원, 천국 입성은 이미 완성되었지만 생활과 인격에서의 온전한 구원은 완성되지 않았다. 이건 성화 부분의 구원이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했다. 빌립보교인은 이미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한다. 현재형 구원으,로 구원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만큼 빌립보교회가 성화에 취약했던 것일까. 한국교회 역시 가장 취약한 부분이 성화(聖化)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인정한다.
하나님께서 성화를 요구하시다
성화(sanctification)는 거룩 성(聖), 될 화(化), 거룩하게 되는 것! 거룩으로 성장하는 것, 마음이 변하고 행동과 언어가 변하여 그리스도를 닮아내는 것이 성화이다. 믿음이 ‘고백’과 ‘마음’에 관한 것이라면 성화는 ‘성품’과 ‘행위’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불러내시고, 거룩을 명하셨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거룩은 순결, 정결, 성결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처럼 완전한 상태의 수준까지 올라서는 성화의 전 과정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거룩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만 아니라 거룩한 삶을 위해 방편도 주셨다. 성화의 방편이란, 율법과 성막과 십계명이다. 율법과 성막과 십계명은 구원이 아니라 거룩을 위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구원의 조건 구비가 아니라 그들이 받은 구원을 보여주기 위한 지침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켜 구원의 티켓을 따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위를 위한’것으로 삼아 성화의 인격을 만들어 내야 했다. 이것이 율법의 임무이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이다. 성막에 들어갈 때 제사장들은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제사 드리러 성막으로 갈 때 백성들은 몸을 씻고 깨끗하게 한다. 그만큼 거룩해 진다.
십계명을 지킴으로 생활에서 깨끗하게 되며 율법을 통해 자신들을 정결하게 만들어 간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거룩하게 되고 이 과정이 성화이다. 성화는 거룩하게 변화되어가는 중간 과정이다. 그러니까 거룩해 ‘진’ 것이 아니라 거룩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명령은 이런 성화를 죽을 때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 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죄를 용서하시며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신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라, 거룩한 삶을 명하신 것이다. 하루아침에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명령은 아니다. 조금씩 성스러움을 향하여 나아가고 자타가 인정하는 거룩의 단계로 올라서라는 주문이다.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용서와 명령이 거룩의 원천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입을 빌려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거룩을 명하신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 이것이 현재형 구원이다. 한국교회가 과거형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바르게 가르쳤다. ‘예수 믿고 구원’이라는 가르침에 아멘! 으로 제대로 배웠고 받아들였다. 교리는 대쪽처럼 곧았다. 신사참배도 견디었고 조상제사 거부로 오는 박해에서도 믿음을 지켜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만세반석의 그 구원을 현재에서 완성시키려는 노력, 신앙인의 인격 형성, 성화교육에는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기독교의 신뢰도는 하위(下位) 단계이다.
창조론을 부정하는 진화론자들의 딜레마가 왜 현재의 원숭이들에게는 진화과정이 나타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원숭이가 갑자기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화론이 맞는다면 진화 과정의 원숭이들, 즉 반(半)은 원숭이, 반(半)은 인간인 변형상태의 중간단계들이 나와야 한다. 현재의 모든 원숭이에게는 인간으로 진화되어 가는 중간 단계의 현상이 전혀 없다. 이것만 있으면 진화론자들이 더 확실하게 진화론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천들도 마찬가지이다. 죄인 된 우리가 의인의 신분을 얻었다면, 의인으로서의 성장 과정들이 나타나야 한다. 과거야 어떻든, 어떤 인간이든, 어떤 삶을 살았든 현재에서 의인의 신분으로의 변화가 삶에서, 인격에서 조금씩이라도 일어나야 하는데 우리에게 이런 변화, 영적 진화(進化)의 중간 단계가 없다. 그러니 비신자들보다 나은 게 없다. 이것이 전도의 문을 가로막고 있다. 전도의 가장 큰 훼방꾼은 바로 ‘나’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화(聖化)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필수항목이다. 의롭다는 칭의와 함께 의롭게 되어가는 성화는 양(兩) 날개다. 두 날개로 날지 못하기에 한국교회는 제자리에서 맴도는 신앙인이 되어버렸다. 좁은 문으로 들어와 넓은 길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성화는 무늬만 겨우 나타나고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왔으면 힘들고 어렵지만 좁은 길에서 성경지침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래야 한국교회를 향하여 너희 신앙이 참(眞)이냐, 묻는 세상에 대해 성화되어가는 행동으로 우리의 신앙이 참(眞)이라고, 그 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모세도 그랬어"
지금 주문할 수 있습니다.
https://store.kyobobook.co.kr/bestseller/online/daily/domestic/21?page=1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설교도 맛있다] 문제를 해결하라(요한복음 5:2~9) (0) | 2025.10.23 |
|---|---|
| [설교도 맛있다] (종교개혁주일) 로마가톨릭은 로마에서 시작되었을까?(갈라디아서 1:6-10) (2) | 2025.10.19 |
| [설교도 맛있다] 내 던져진 광야, 거기에서 만난 하나님(출애굽기 3:1-8) (0) | 2025.10.17 |
| [설교도 맛있다] 인생의 짐도 힘이 될 수 있다!(베드로전서 5:7) (0) | 2025.10.15 |
| [설교도 맛있다] (종교개혁주일)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다시 시작하자!(에스겔 8:14~18) (2) | 2025.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