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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12지파 설교] 요셉-무성한 가지(창세기 49:22-26)

by 강정훈말씀닷컴 2024.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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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품절. 중고서적에서

                                                                            품절. 중고서적에

요셉-무성한 가지

창세기 49장 22-26절
 

서론

스티븐 레바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이 곧 죽게 되어 있고 단 한번의 전화를 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면 당신은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런데 당신은 지금 왜 그것을 미루고 있는가?"

 

우리가 마지막 한 통화의 전화를 남겨야 할 사람. 그는 사랑했던 사람도 아니고 많은 도움을 받고 살았던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들에 대한 사랑을 전화 한 통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사람은 없을 거십니다.

마지막 전화 다이얼을 돌려야 할 사람, 우리 교회에서 내가 전화를 돌려야 할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 그리고 내가 용서를 해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야곱은 열 두 아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야곱은 처(妻) 복은 없었지만 자식복은 있었습니다.

그가 147세에 죽었습니다. 그때까지도 그의 열두 아들은 모두 살아있었습니다. 자식들의 죽음을 보지 않는 것도 부모로서 큰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여러 아들, 여러 자손들 중에서 야곱이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요셉입니다.

그는 라헬의 소생인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그 아들을 위해 채색옷을 입히기도 했습니다. 여러 자식들 중 어머니를 잃은 아들이라서 정이 가기도 했지만 이 아이가 형제들 사이에서 얼마나 사랑스럽게 구는지 야곱은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운명은 이 아들에 대한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요셉을 잃고 20년 이상을 보내었습니다. 아들이 고아처럼 혈혈단신 애굽으로 건너가 온갖 고통을 다 당한 것은 다른 형제들의 농간 때문이고 결국은 야곱의 탓이었습니다.

그가 레아와 라헬 두 자매를 동시에 택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비극이 가정에 일어나지 아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임종을 눈앞에 둔 야곱은 요셉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그 아들을 바라봅니다.

요셉은 불운한 유년시절을 보내었습니다.

현대심리학은 어린이들이 유전과 환경에 얼마나 깊이 영향을 받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의 어린 시절은 결코 보호받는 보금자리가 못되었습니다.

*그는 야곱이 라반을 섬기던 때의 말기에 출생-그 갈등.

*야반도주할 때 있었다.

*라반의 추격으로 인한 공포심.

*에서 백부가 사백 명의 군사를 끌고 왔던 일.

*아버지와 신비한 사람과의 씨름.

*세겜에서의 더럽고 수치스러운 디나 누나의 성폭행 사건.

*일부다처제로 인한 가정불화로 오는 씁쓸함과 질투들을 모두 경험.

 

이런 경험들은 모두 여린 그의 마음에 깊이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어린 시절 모친을 잃었습니다. 아버지의 과보호는 여러 형제들의 미움을 받았고 음모와 배신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심리학으로만 풀어본다면, 요셉은 성격이 거칠고 괴팍하고 비뚤어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성경에서 거의 흠이 없는 인간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에 흠이 기록되지 않은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그 마음을 잘 다스렸습니다. 하나님을 그의 마음 중심에 있게 함으로 그는 넉넉한 마음을 지닐 수 있었고 위대한 용서를 하게 됩니다.

현대심리학의 논리가 적어도 요셉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심라학의 일반적인 학설들이 들어맞지 않도록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내었던 사람들, 탈선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살았던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평안을 누리고 유년시절의 보금자리에서 자라난 사람들보다 더 순수하고 깨끗한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이웃들에게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바로 우리가 그 주인공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야곱은 그 아들의 덕분으로 금수레를 타고 애굽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무총리의 아버지라는 영광을 얻기도 했습니다. 가나안에서 자기 땅도 제대로 없었던 유목민 야곱. 12명의 자식에서 60여명 남짓, 그래서 70여명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살아왔던 노인은 요셉이라는 아들로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아들은 부모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아들입니다.

 

어머니가 가장 필요했을 때 그 어머니는 세상에 없었습니다. 17세에서 30세가 될 때까지, 그리고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까지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가 가장 필요했을 때 그 아버지는 아들의 생사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버려진 아들이었고 홀로 힘든 세상을 견디며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아들을 임종의 머리맡에 둘 수 있었고 그 아들로 인해 노후의 평안한 죽음을 맞고 있습니다. 정말로 사랑스럽고 고마운 아들입니다.

이제 죽음 앞에서 요셉을 바라보는 야곱의 마음은 그 어떤 아들을 향해 축복의 예언을 할 때보다도 만감이 교차합니다.

 

야곱은 그 아들을 보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23절).

 

그 뜻은, "얘야, 네 등 뒤에서 활 쏘는 자가 많았지?" 하는 말입니다.

 

객지(客地), 그것도 남의 나라에서 노예로 끌려가 20년을 살아가는 어간에 얼마나 별의별 일들을 만났겠습니까? 많은 누명을 쓰고 힘든 일을 당할 때 아무 형제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하고나서 야곱은 잠시 말을 멈추었을 것입니다. 옆으로 돌아눕는 그의 얼굴에 눈물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것은 회한의 눈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아버지의 슬픔입니다.

우리가 이런 눈물을 얼마나 흘려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요?

요셉의 용서가 큰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여러 자식들에게 복을 기원했습니다. 순서를 좇아서 르우벤을 축복하기도 하고… 때로는 순서를 무시하고 다른 아들을 축복하기도 하고… 모두들 그들에게 맞는 축복을 합니다.

지도자가 되는 축복, 제사장이 되는 축복, 땅을 낙원으로 만드는 축복, 해외로 나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리게 하는 축복… 그러나 요셉에게 들어와서는 아예 복을 부어버립니다. 그의 자손들은 샘 곁에 심겨진 무성한 가지가 된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모두 차지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

*부모와 할아버지의 복보다 크고

*형제 중에서 뛰어난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향해 이런 복을 기원하는 것은 단순히 아들의 덕을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들에게 어떤 복을 예비하고 계신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마음껏 복을 쏟아 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위대한 용서를 했습니다. 이제 열 두 아들을 놓아두고 세상을 떠나려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네 여자에게서 뿌린 씨앗이기는 해도 이제 어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자식들에게 앞날을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실권을 쥐고 있는 아들은 요셉입니다. 그의 말 한 마디로 자식들의 운명은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을 믿었습니다. 그가 애굽으로 와 보니 요셉은 두 아들을 낳아있었습니다.

큰 아들의 이름이 "므낫세"입니다. 므낫세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야곱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그 뜻은 "잊어버림"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고난을 잊게 하신다는 그 의미 속에는 나를 이렇게 만든 형제들의 배신도 잊어버리겠다는, 용서해 주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의 입장에서 바라볼 적에는 그 어떤 아들보다 용서가 큰 사람이 형제들의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 두 아들의 나라가 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가문에서 극복되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불화였기에 야곱은 이런 사역을 요셉에게 맡기고 그만큼 축복도 크게 해주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누가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까? 누가 우리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들, 핵이 되어야 할 것입니까?

바로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 편견과 외골수가 아닌, 그 어떤 사람도 포용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우리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2천년 이상이나 나라를 잃은 민족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무자비하게 살육당하고 인권 침해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적인 원수로 테러를 하거나 원수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총 들고 폭력을 행할 때는 언제나 조국의 원수, 조국의 존망을 위협하는 자들에 대해서 총질을 하고 테러를 하지 개인적으로 원수 갚는 일에 폭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래도록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민족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위대한 용서를 했던 요셉의 자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야곱은 믿음의 눈으로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맺힌 것들을 푸십시오. 주님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하다가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과 사화하고 예배드리라".

 

요즈음 유행하는 용서 시리이즈들.

"키 작은 남자는 용서해도 배나온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머리카락이 없는 남자는 용서해도 머리에 든 것이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오리탕을 좋아하는 사람은 용서해도 오리발을 내미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안면을 고친 여자는 용서해도 안면을 바꾸는 여자는 용서할 수 없다."

요셉은 큰 가지가 될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향해 가지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 가지는 샘물에 심겨진 가지요 담을 넘는 가지입니다.

야곱의 예언대로 요셉은 두 몫의 지파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레위가 세속적인 축복에서 빠지고 요셉의 두 아들이 그 자리를 매꿉니다. 그중에서도 차자(次子) 에브라임은 광대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얼마나 크게 받았는지 북쪽 전체를 가리켜서 에브라임이라 부를 정도였습니다.

요셉은 인생의 수고가 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수고에 충분히 보상해 주셨습니다.

 

야곱도 수고가 많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고는 자신의 죄, 욕심 때문에 온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온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전적으로 형제들 때문에 수고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과 진실함으로 살려했기에 그는 모함을 받고 역경을 견디었습니다. 그런 수고였기에 하나님은 넉넉히 큰 것으로 보상해 주신 것입니다.

 

요셉은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뜻은 "창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충분히 그의 인생에 보상해 주심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어떤 시련을 겪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시련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죄에서? 그리고 성격 때문에? 죄에서 온 시련이라면 빨리 그 죄를 해결하십시오.

성격 때문에 인생이 편치 못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더 부지런히 배우십시오. 그분의 온유와 관대함을. 온유라는 것은 거친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이 나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연단이시라는 확신이 있다면 그분께서 길을 열어주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그것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평안을 주실 것이고  충분한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천국에 가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대의 어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고난이 왜 왔는가를 말해주지 마시고 이 고난이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믿게 해주십시오."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므낫세를 상징하는 보석은 백마노입니다. 이 보석은 강철보다 강하다고 합니다. 녹이나지 않기에 오래 둘 수록 더 좋은 보석이라고 합니다. 날이 갈수록 더 좋아지는 것, 이것이 바로 요셉이 믿었던 인생의 원리입니다.

 

시실리 섬에 이 보석이 많이 채취된다고 합니다. 이 보석은 그냥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이 보석은 잘라서 갈고 다듬을수록 더 찬란한 빛을 발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요셉의 운명입니다. 그는 인생의 여러 수고와 슬픔을 만났지만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연단이요, 자신의 인격을 다듬으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총리가 된 것입니다.

 

둘째인 에브라임을 상징하는 보석은 "호박"입니다. 이 보석은 깎아내기가 대단히 어렵답니다. 그러나 한번 깎아놓으면 너무도 아름다운 황금색 광채를 낸다고 합니다. 어둔 밤 지나고 광명한 아침을 맞이했던 요셉의 생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는 벽이 수정처럼 아름다운 왕궁이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깨진 유리로 모자이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계획은 판유리를 사용하는 것이었으나 유리를 우송하던 기술자가 실수로 깨뜨리는 사고가 발생, 책임자가 고민한 끝에 깨진 유리로 모자이크를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완성 후에 보니 오히려 오색찬란한 예술품이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깨진 사람들의 것을 가지고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 내십니다. 여기에는 용서의 마음들이 있어야 합니다. 요셉으로 하여금 샘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게 하신 하나님을 우리들은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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