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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욥의 편을 들어주셨을까?
서론
여름에 신수성득(神手聖得) 욥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욥기를 이해하려면 하늘과 땅의 상하(上下) 이중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땅에서 욥과 세 친구들 사이에 벌어지는 논쟁, 하늘에서 사단이 하나님에게 참소하면서 시작된 고난의 원인을 알아야 욥기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욥을 이해하려면 이중무대도 알아야 합니다. 선민 아브라함계열과 비선민 이방인계열의 욥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부르심과 순종을 통해 선민을 만드시고 욥에게는 고난과 치열함을 통해 자기의(義)를 버리고 신수성득의 의인으로 바뀌어 가십니다.
오늘은 신수성득(神手聖得) 욥,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욥기를 이해하려면 논쟁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욥기는 42장으로 되어 있고 논쟁이 3장에서 37장까지 이어집니다. 3회에 걸친 3라운드 논쟁이지요. 3라운드 논쟁에서 그들이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어떤 생각인가, 하나님께서는 정당하게 말한 세 친구들보다 분노하는 욥의 편을 왜 들어주셨는가, 알 수 있습니다.
땡! 1라운드를 알리는 시작종이 울리면 엘리바스가 먼저 공격합니다.
㈀ 엘리바스의 공격(4장).
엘리바스는 에돔 북부에 위치한 데만 사람입니다. 에서 후손 에돔 족속으로 현자(賢者)가 많습니다. 세 친구 중 연장자이며 학식이 풍부합니다.
세 친구 고난관은 인과응보(因果應報)입니다. 사람이 벌을 받으면 악해서 그렇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 벌을 주지 않는다! 고로! 욥이 고난당한 것은 어딘가 죄가 있다는 것이지요.
7절.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8절.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9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욥의 반박(6장)
24절.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25절.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29절.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30절.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죄 없이 불행 당하는 사람은 없다는 엘리바스의 공격에 욥은 내게 잘못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맞섭니다. 네 말이 옳은 것 같지만 듣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흠이 없고 순전한 욥이었기에 죄가 원인이라는 친구의 말은 힘든 게 사실입니다.
㈁ 빌닷의 공격(8장).
아브라함과 그두라 여인 사이에 난 수아의 후손들입니다(창 25:2). 빌닷의 주장은 더 독하고 모집니다. 친구 사이가 맞는가, 의심될 정도입니다.
2절.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4절.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엘리바스는 죄로 불행이 왔다는데 빌닷은 한술 더 떠 자식들은 그들 죄로 죽었고 여기에 욥은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까지 걸고넘어지니 욥도 감정을 컨트롤 못합니다.
욥의 반박(10장)
4절.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
7절.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엘리바스의 공격 때만 하더라도 욥은 수동적입니다. 그러나 빌닷이 자식들의 죄 운운하자 불평이 터지며 억울함을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상당히 격해진 것입니다.
㈂소발의 공격(11장).
소발은북 아라비아나아마 사람으로성격이 급하며 연소자입니다.
4절.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11절.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본다.
14절.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욥의 반박(12장)
3절. 나도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4절.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13:18.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팽팽합니다. 모두 경건으로 무장했기에 틀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세 친구들은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이고 욥은 내가 불행을 당하는 것이 죄라는 원인이 있다면 그 원인을 대 보라! 나는 의롭다! 이렇게 대등하게 맞서는 것입니다. 이게 3라운드까지 갑니다.
여러분이 배심원이라면 1라운드 논쟁에서 누가 옳습니까? 세 친구와 욥 중에 누가 정당합니까?세 친구들 주장! 하나님은 정의로운 사람을 복주시며 악인을 벌주신다는 주장은 진리입니다. 욥의 주장! 욥도 인과응보 원리는 꼭 같습니다. 자기도 그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만큼 잘못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양쪽 말을 들어보면 다 맞습니다. 그래서 욥기는 이해가 힘듭니다.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그 말이 옳고 욥의 말을 들어보면 또 그 말이 맞고… 양쪽 모두 바른 말을 하기에 일방적으로 어느 편을 들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제를 고난으로 처리해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은 누구의 편을 들어줍니까? 42장, 쌍방과실이 아니라 욥의 주장을 옳다합니다.
7절.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욥의 판정승입니다. 그럼에도 석연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3라운드가 진행되는 동안 하나같이 옳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유익한 말을 했습니다(8장).
5절.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절.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얼마나 좋아요! 금메달급(級)이잖아요? 오히려 욥이 하나님에 대해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3장에서, …했더라면 가정법을 사용해가면서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내가 난 날이 멸망했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던 그 날이 멸망했더라면…
10:1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2절.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6절. (어찌)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판정승을 내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세 친구들은 논리적이기는 했지만 경우에 맞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 말은 다 옳았지만 사람을 세우고 위로하는 덕이 있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우매하다고 합니다.
사람이 뱀에 물렸습니다. 왜 거기 갔냐… 그곳에 뱀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냐… 뱀이 많은 곳에 갔으면 정신 바짝 차려야지 왜 정신을 놓았냐… 야단칩니다. 맞는 말입니다. 뱀 있는 곳에… 그것도 정신없이 다닌 것은 잘못입니다. 훈계는 정당한 것입니다.
문제는 아이가 뱀에 물러 죽어가고 있습니다. 독이 올라서 정신이 없고 이제 죽게 됩니다. 죽어가는 아이 앞에서 잘잘못을 조근조근 따지고 있습니다. 진짜 현명한 사람이라면 살려놓고 따져야 합니다. 생명이 부지되어야 교훈을 받고 잘못을 고칠 것이 아닙니까?
욥의 세 친구들은 이걸 못했습니다. 옳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말이 옳다고 옳은 처세가 아닙니다. 옳은 말도 경우에 맞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옳은 말을 아무에게나 들이대고, 아무 경우에나 들이대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가슴 아픈 사람을 더 힘들게 했고 동방에서 가장 순전하고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 속에 구정물을 휘저어 악인을 만드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왜 운동하지 않았냐, 술 담배를 했느냐? 그러기에 걸려도 싸다… 하면 책망은 옳아요. 그러나 옳은 말도 경우에 맞게 사용해야 하고 아무리 좋은 말도 상처 받은 사람, 힘든 사람이면 우선은 먹이고 회복시키고 다음에 훈계해야 합니다.
말은 말 자체가 정당해도 어떻게 사용하느냐, 어떤 경우에 사용했느냐에 따라 정당성이 달라집니다. 그런 면에서 세 친구들은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사용에 대해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정당한 말이라고 항상 덕 있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사회는 하버드대학 샌덜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붐이었습니다. 학벌 엘리트 중심, 대재벌 중심, 권력 중심으로 오는 불평등이 한국사회에 정의론를 불러온 것입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불평등을 비판하고 정의를 외칩니다. 로마가톨릭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사설 단체가 있어 곳곳에 정의의 이름으로 활동합니다.
서울대학교 황경식 박사는 국내에 정의론 토대를 세운 교수로 40년을 ‘정의론’만 연구했습니다. 샌덜 교수를 한국에 초청한 것도 황 교수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40년 정의만 팠다, 문제는 정의가 아니라 덕이다.”
옳고 그름을 알려주는 정의(正義)가 주먹이고 손가락질이라면, 덕(德)은 붙잡아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정의로움도 필요하지만 덕(德), 두 손으로 붙잡아주는 따뜻함이 있어야 합니다. 세 친구들에게는 주먹과 손가락질만 있었지 더 많이 손 잡아주는 따뜻함이 없었습니다.
자동차 바퀴에 깔린 사람에게는 꺼내주려는 노력도, 발을 동동 구르는 안타까움도… 왜 그렇게 정신을 놓고 다니다 깔렸냐, 비난도 좋지만 사고차량이 도착할 때까지 깔린 사람 옆에 누워 조금만 참으라고… 구조차가 오고 있다고… 손잡아주는 덕이 우리 사회에 훨씬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용장보다는 덕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친구는 이걸 놓친 것입니다.
㈁ 세 친구들이 욥에게 왜 판정패했는가? 세 친구들 입장에서는 억울합니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 편에서 옳은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고 패배를 선언합니다. 그것도 그들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한 일에 크게 벌점을 받은 것입니다.
42:7.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8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욥의 세 친구들이 하나님을 가리켜 말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단순히 권선징악의 하나님, 인과응보의 하나님… 주도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은 원인을 심고 하나님께선 결과적으로 상(賞) 벌(罰)이나 주는 자연원리의 무인격자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잘못된 하나님관(觀)을 들이 댄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하나님의 참 속성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재산을 가져가고 자식들을 죽이고 온 몸에 병을 주는 인과응보의 하나님만을 말했습니다. 정의는 외쳤지만 덕으로 감싸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잘못된 하나님관이 잘못된 치유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자비와 긍휼과 은혜가 풍성합니다. 친구들은 그 속성까지 말해야 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호소했지만 친구들에게는 정의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욥보다 못했기에 사과하고 용서를 빌라고 하십니다.
㈂ 세 친구들은 왜 판정패했는가? 세 친구들도 자기 의(義)에 빠져 있습니다. 친구들은 욥의 고난에 원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죄라는 것입니다. 그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너를 창대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 친구 논리라면, 자신들에게 이런 고난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욥은 의인으로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동방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자랑했고 사단도 탐을 냈던 사람입니다.
이런 욥이 불행을 당하자 친구들은 인과응보(因果應報) 논리로 욥을 죄인시합니다. 그 말은 자기들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것은 죄가 없기 때문이요, 고로! 욥보다 자신들의 의가 크고 옳다는 것입니다. 가장 비열한 사람이 남의 불행과 비교하면서 나는 다행이라 생각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릇된 자기 의, 하나님께서는 세 친구의 의를 책망한 것입니다.
몇 년 전, 제가 새벽기도회에 늦었습니다. 저는 거의 새벽기도를 빼먹지 않습니다. 두 개의 알람시계를 사용합니다. 그 날은 알람시계가 울리는데 꿈인 줄 착각했습니다. 지금은 다른 교회로 갔지만 장로님이 몇 년에 그 날 딱 한 번 나오셨어요. 앞에서 기도를 인도하는데, “교역자들이 모두 결석했습니다. 이런 우(愚)를 다시는 범하지 않게 하소서!” 합니다. 우(愚)는 어리석음입니다. 새벽기도회에 한 번 못 나간 것이 어리석음입니까?
하나님께서 누구 편을 들어주겠어요! 1년 364일 나가다 한 번 못 나간 목사인가, 364일 안 나가도 그 날 나가 기도회를 인도한 그 분 편을 들으실까? 이게 세 친구들 잘못입니다.
결론
종합하면 욥의 세 친구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해결보다 원인을 따지는 말로 급급한 것입니다. 원인은 일단은 문제를 수습해 놓고 해야 합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건져놓고 훈계를 하던 해야지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죽어가는 사람을 좇아가면서 원인분석하고 있다면 잘못입니다. 똑똑하고 경건하다는 욥의 친구들이 그런 일을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에게 문제는 무엇입니까? 죄인된 사람을 불러다가 잘 가르쳐서 의인을 만들어야 하는데… 바리새, 분리라는 명목 하에 이방인들 창기들 율법을 어긴 자들과는 상종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에게는 창기들의 죄보다 새로워질 수 있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자기의(義)가 문제가 된 것입니다.
욥은 물론 욥의 친구들까지 나는 의롭고 남은 의롭지 못하다고 싸잡아 상대를 공격하는 자기의가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죄만 문제 삼지 의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욥기는 의를 문제 삼고 나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잘못된 의(義), 이걸 가려내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 의가 자기의, 자수성의(自手成義), 자수성득(自手聖得)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신수성의(神手成義) 신수성득(神手聖得) 하나님의 칭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의 주제입니다. 결국 욥기는 죄의 문제가 아니라 의(義)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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