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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욥기열전3] 욥은 왜 시련 가운데 놓였을까(욥6:24~30)

by 강정훈말씀닷컴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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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열전3]

욥은 왜 시련 가운데 놓였을까

욥기 6장 24~30절

서론 

오늘 설교는 신수성득(神守聖得) 욥 시리즈 세 번째입니다. 지난주, 욥기를 이해하려면 2층 무대구조를 봐야 한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내가 등장하는 1층 무대는 불행이 왔을 때 내 탓인가, 남 탓인가. 하나님으로 왔는가, 누구 탓도 아닌가? 그걸 파악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용서받을 것은 용서받고 인내할 것은 인내하고…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묻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2층 무대는 영계(靈界)입니다. 영적존재 간에 벌어지는 2층 무대에서 발생되는 불행의 원인은 비밀입니다. 그러기에 불행이 왔을 때는 내 탓이야, 남의 탓이야. 하나님 탓이야? 누구 탓인가에 대한 원인은 캐묻는 것이 아닙니다. 2층 무대에서 시작된 일이기에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답이 없습니다. 없는 답을 찾다보면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립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성숙하면 저절로 왜 이런 고통을 당했는가, 하나님께서 왜 고통을 주셨나, 그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까지는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렇게 땅에서 발생되는 고통과 하나님의 특별한 뜻으로 발생되는 불행은 기원이 다르기에 해결과 견디는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이중무대가 나오는데 1층 2층의 상하(上下)무대가 아니라 왼쪽 오른쪽의 양면 무대입니다. 한쪽은 아브라함의 세계요 다른 쪽은 욥의 세계입니다.

아브라함은 선택된 사람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은 선택된 선민입니다. 선민은 의인된 신분임을 말해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되는 길은 오직 은혜다! 그걸 알리기 위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은 선택된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조카 롯이 삼촌을 배신하고 소돔과 고모라 땅을 차지한 직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밖으로 끌어내시더니 “하늘을 봐라! 네 자손이 별처럼 많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15:6,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라고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여호와를 안 믿었나요? 그때도 믿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전과는 믿음의 내용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땅을 주시고 대민족, 복의 근원 혈통으로 만들어주신다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유형(有形)의 물질축복을 믿었습니다. 

 

지금의 믿음 내용은 다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나를 의롭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의인(義人)을 만드는 방법을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그리스도의 보혈로 내 죄를 처리하시고 부활로 의인의 신분을 만드시는 방식입니다. 어떻게 2천년 후에 오실 그리스도가 내 죄를 처리하고 의인의 신분을 만들어낼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니 그 방식도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날 이후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는 것은 행위나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땅과 대민족이 되는 축복에서 눈을 돌려 미래에 오실 여자의 후손-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그랬더니 여호와께서 그 소망의 믿음을 의(義)로 여기시고…. 의(義)의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내게 입힌 옷을 선민 자손에게도 입혀준다는 약속에 아브라함은 아멘! 한 것입니다.

 

이를 훗날 바울은 믿음조차도 내 행위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내게서 나온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면 그 자체도 행위믿음이 되기에 행위구원의 잘못된 길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잘라 말합니다(엡 2:8). 믿음의 기원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선물로 하나님도 믿고 내 죄를 구속하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며 이걸 개인적으로 수용한 게 할례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 속으로, 하나님의 선민으로 내가 가입합니다, 라는 행위표시입니다.

 

만약 유대인이 고통당한다면, 그건 의로움의 문제가 아닙니다. 유대인은 이미 선민이기에 의인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받아들였기에 항상 의로운 혈통입니다. 율법은 4백년 후 모세를 통해 주셨기에 의로움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당하는 고통, 불행, 시련… 등은 의(義)를 취득하는 것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유대교 랍비 조셉 솔로베이치크는 착한 사람이 왜 고통당할까, 에 대해 답을 내놓습니다.

 

-품성을 높이기 위해 고통이 온다! 아프면서 큰다, 라는 말은 육체의 성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을 통해서 인격의 그릇이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교만 제거로 고통을 주신다! 교만은 고통을 통해 겸손으로 내려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교만의 귀머거리들에게는 고통이라는 확성기로 말씀하십니다.

 

-구체적 믿음으로 나가도록 고통을 주신다! 가족을 잃으면 천국은 더 이상 먼 나라가 아니고 교리가 아닙니다. 천국은 이제 또 다른 집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살고 있는 실제적인 집입니다. 그래서 사별의 고통을 통해 천국에 대한 구체적인 믿음을 갖게 됩니다.

 

-시야를 넓히려고 고통을 주신다! 고통을 몰랐을 때는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 고통을 당해보니 주변의 고통을 돌아보게 되고 이해되더라는 것입니다. 

 

솔로베이치크가 말하는 고통의 최종목적은 인격 결함을 수리함입니다! 아브라함 선민은 이미 의로운 사람! 생활이 의롭지 못하기에 거룩한 성품을 만들려고 고통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기 무대는 아브라함과 달라요! 욥은 선민이 아닙니다. 두 사람은 주전 2천 년 동시대사람이지만 욥은 동방사람입니다. 동방은 남으로는 에돔, 북으로는 아람을 포함하는 요단 동편의 광대한 지역입니다. 이곳 부족들도 소수가 하나님을 믿었는데 언약믿음이 아니라 자연계시의 창조주 하나님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특별히 계시된 여호와종교였기에 제대로 알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의(義)를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선인이나 악인에게 고통이 왔을 때, 인격 속의 결함을 고치기 위함이라고 해석합니다. 

 

욥에게는 이런 공식이 성립 안 되지요. 욥은 더 이상 올라갈 의(義)가 없는 순결자입니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1:1)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3절)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다”(8, 2:3)

 

욥은 정직 순도가 100% 정품이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한 사람입니다. 이런 정품에게 아브라함 계열에게 사용되었던 품격 상승의 수단, 즉 인격속의 결함을 고치려 고통을 사용하신다? 고통은 검은 보자기에 싸여 내려오는 축복이다? 라고 쉽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욥과 세 친구의 견해차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세 친구의 주장을 장형(長兄) 격인 엘리바스가 요약합니다. 4:7, 9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네가 불행으로 망하게 된 것은 죄 때문이다. 정직하면 이런 일 당할 수가 없다는 거지요.)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하나님께서 죄인 욥의 형통을 훅~ 불어버리시니 바람의 겨와 같이 모든 재산과 자녀들이 날라 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욥의 반박이 본문입니다.

 

24절,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욥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직접적으로 지적하라고 요구합니다. 자신은 엘리바스의 비난을 받을 만한 범죄를 결코 자행하지 않았다는, 소위 자기 의(義)에 대한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29절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아름다운 우정의 친구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간에 셋은 하나에게 죄인이다! 하나는 내가 불행을 당해야 될 죄가 전혀 없다, 오히려 나의 의는 건재하다! 팽팽하게 맞섭니다.

 

 왜 이런 대립이 일어날까요? 여기에 두 무대가 필요합니다. 만약 아브라함 무대였다면 욥에게 불행이 왔을 때 큰 죄는 없지만 그래도 죄가 없을 수는 없다, 이번 계기에 하나님께서 성품과 인격을 고고하게 만들어 낸다는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 결백을 얄미스러울 만큼 끝까지 고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른 말을 하는 세 친구를 책망하고 욥의 편을 들어줍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이 욥기의 주제입니다.

욥은 아브라함 계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계통은 하나님의 언약에 담긴 내용에 아멘! 하면 무조건 의인(義人)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의인입니다. 그 아멘은 자기행위나 인격, 율법에 의지하지 않고 장차 오실 구속자의 보혈로 정결하게 된다는 방식에 동의하는 아멘! 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자손들에게 허락하신 특권입니다.  

 

그러나 욥은 아브라함 계통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자연 계시로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보편적 사람입니다. 언약의 약속도, 구속자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오는 정직함의 자기 의(義)입니다. 요즘 비신자들이 갖는 정직함입니다. 

욥의 하나님 경외는 사랑과 두려움입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했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순진했고 정직했고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납니다. 당시 사람들이 인정했고 사탄도 인정했고 하나님까지도 자랑할 만한 의로움입니다.     

 

욥의 한계는 여기까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창조주입니다. 욥의 의는 양심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수준입니다. 이만한 정직함으로도 얼마든지 자연적 축복, 물질축복, 자녀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존경과 칭송의 대상이 됩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것은 내 손으로 입혀지는 자기 의(義)입니다. 칭의가 아니라 율법으로 오를 수 있는 자기의(義)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의는 내게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막연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자 그리스도를 통해 내려와야 하고 입혀주어야 합니다. 욥에게는 아직 구속자 개념이 없어요. 아브라함처럼 멀리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기뻐하는 대망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혈통은 아니지만 욥의 일반적인 종교심과 정직함에 의(義)의 옷을 이번 기회에 입혀주고 싶었습니다. 언약과 약속이 있는 아브라함 계열만 아니라 아브라함 밖의 계열,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의 의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걸어오는 시비를 기회로 욥에게 고난을 주셨습니다.

 

착한 사람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 욥은 나중에 자기 불행의 주제는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義)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의(義)의 옷은 자수성득, 내 손으로 취득해서 내가 나에게 입혀주는 것이 아니라 신수성득,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겨서 나에게 입혀줄 때에만 비로소 참된 의의 신분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신수성가 요셉과 같은 맥락입니다. 요셉은 자기 비전과 노력으로 꿈의 옷을 입으려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채색 옷을 입혀주면 영광의 신분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채색 옷을 벗겨버렸습니다. 대신에 노예 옷, 노동복을 입혔습니다. 자수성가의 옷을 벗기시고 신수성가의 옷을 입히신 것입니다. 형제들을 섬기고 민족을 위해 하나의 밀알이 되는 것이 요셉의 사명이었고 성공이었고 비전이었던 것입니다.   

 

욥도 종교적 양심으로 살아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든 악에서 떠나면 자수성득의 길에 이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義)의 기준은 훨씬 높았습니다. 사람들 앞에서의 의는 자수성득, 내 힘으로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의는 내 양심과 선행으로 얻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전에는 그것을 몰랐는데 고난을 통과하면서, 까닭 없이 불어 닥친 고난이야말로 신수성득이라는 참된 의를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자 의에 오르게 하는 사다리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설교하면서 누차 욥기 주제가 고난이라는 등식을 깨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욥기의 주제는 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 당하는가, 하는 고난이 아니라 의(義)는 내 손으로 얻을 수 있나, 하나님의 손으로 선물로 받는 것이냐? 그 문제를 최고의 정직자 욥을 대상으로 보여주는 셈입니다.

 

결론

우리는 아브라함과 욥을 비교해 보면서 믿음의 가정에서 출생했다는 것이, 일찍 예수님을 믿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알았습니다. 모태신앙이기에 고난도 아픔도 없이 교회 다녔습니다. 일찍 믿었기에 창조와 동정녀탄생과 십자가와 부활, 의의 신분에 대해 큰 갈등 없이 받아들였고 믿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언약의 자손 아브라함의 혈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처럼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얼마나 큰 시련과 고난을 대가로 지불했던가요? 욥은 재산을 잃고 자식들 죽고 스스로를 의롭게 여겼던 몸이 망가지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의 진리를 발견하게 되고 붙잡게 되는 과정에 너무 큰 희생을 치른 것입니다.

 

늦게 믿었기에 성경이 믿어지지도 않고… 습관을 끊기도 힘들고… 나는 괜찮은 사람으로 알았기에 죄인 신분을 인정함에 자존심이 상했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시험과 고난을 통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님을, 내게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고 십자가 앞에 눕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고난의 사다리를 통해 오를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에게서 나를 보게 되고 욥이 바라보고 사모했던 2천 년 후의 구속자 그리스도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입니다.

 

이제 욥이 걸었던 길은 내가 가야할 방향입니다. 욥 스승님을 통해 자기 의(義)라는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義)의 옷을 입고 더욱 겸손해지고 정결해지고 시야를 넓혀가는 신앙인들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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