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열전2]
욥기는 이중무대입니다!
욥기 2장 6~12절
서론
오늘 설교는 신수성득(神守聖得) 욥 시리즈 두 번째입니다. 지난주에 욥기 주제는 고난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고난이 욥의 주제가 된다면 욥은 자수성득(自守聖得), 즉 내 힘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달성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릅니다.
욥에게 고난은 다만 욥기의 주제를 밝혀주는 소재이고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신수성득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마치 요셉의 총리직분이 꿈이 실체가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요셉의 꿈은 총리를 통해 보여주는 그의 인격과 사역입니다. 그러기에 욥기도 고난의 사다리로 올라 더 큰 목표를 찾아내야 제대로 이해됩니다. 이걸 놓쳤기에 욥과 친구들은 고난의 사다리만을 붙들고 네 잘못이다 아니다… 논쟁으로 웬수 관계가 되어버립니다. 고난의 사다리에서 더 큰 하나님의 목표로 올라서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욥기는 이중구도입니다. 1층 무대와 2층 무대가 동시에 펼쳐집니다. 욥기의 이중구조를 파악 못하면 1층 시각으로 2층을, 2층 시각으로 1층을 잘못 이해합니다. 그러면 갈등이 나오지요. 욥기의 2층 무대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입니다. 천국을 무대로 하는 성경은 욥기밖에 없습니다. 굉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어느 정도로 귀하게 대하시는가를 보여줍니다.
천국무대에 6절, 하나님의 아들들, 천사들이 시중드는데 사탄이 왔습니다. 어떻게 사탄이 감히 천국에 입성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허용가운데 사탄이 천국에 잠시 출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어디서 오는 중이냐?(7절)
사탄:인간 세상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사탄은 참 바쁩니다! 이간질하고 미혹하고… 죄짓게 하는 일로 바쁩니다. 베드로는 사탄을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합니다. 사자가 울어요? 사실은 웃는 것입니다. 먹이를 잡아놓고 우와~ 맛있겠다! 입맛 다시면서 포호(咆號)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배당까지 들어와 너는 내 밥이다! 하면서 여기 밥덩이들보고 너무 좋아 어흥~ 웃습니다. 지금도 사탄은 잠잘 시간, 심지어는 커피를 마실 시간도 없이 돌아다닙니다.
사탄이 왜 사탄입니까? 사탄은 원래 천사장입니다. 천사는 선한 의미입니다. 천사는 착한 일에 바쁘니 천사입니다. 사탄은 나쁜 일에 바쁘게 돌아다니니 사탄이 됩니다. 우리도 나쁜 일에 바쁘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좋은 일에 바쁜 성도님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자랑합니다. 내 종 욥을… '종'은 노예보다 존경과 명예의 칭호로 욥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특별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1절,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자랑할 만한 하지요!
하나님께서 자랑하는 여러분이 되기 바랍니다. 목사가 자랑스럽게 내놓는 성도님들 되기 바랍니다. 그 분은 자랑할 만한 해… 믿음에서, 봉사에서, 헌금생활에서, 주일성수에서, 주의 종을 대하는 일에서… 목사가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여러분이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목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서로 자랑하는 교회는 부흥합니다. 항상 남들에게 자랑될만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랑하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자랑할 때 천사라면, 너무 너무 훌륭합니다. 저런 부자가 어떻게 저렇게 믿음생활을 착실하게 할 수 있습니까? 사업가가 어떻게 장부가 저렇게 정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랑할 만한 하시네요! 말하는 게 천사입니다.
천국무대에 들어온 사탄은 토를 답니다. 예! 하면 되는데 사탄의 특성이 비방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조건이 있기 때문이죠, 부자되게 해주니 믿는 것이지 복 받지 못하면 저렇게 경배 못합니다, 한 번 쳐보세요, 돌아설걸요…. 나쁜 일에 충동질을 합니다.
욥의 고통이 왜 생겼을까요? 1차적 원인이 이제 나옵니다. 사탄은 욥의 온전과 정직과 경외함의 믿음이 조건부이다, 하나님은 아니다, 사탄은 욥의 신앙이 축복을 위해서다! 하나님께서는 축복 때문이 아니라 나를 사랑해서다, 라고 주장합니다. 이를테면 네 아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 아나? 돈 때문이야, 아니야, 아내는 나를 순수하게 사랑해… 라는 두 주장이 엇갈립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대결은 이층 무대 천국에서 벌어지고 1층 땅의 무대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연속적인 불행으로 욥의 인생은 전쟁터가 됩니다.
욥은 가축과 짐승들을 약탈당하고 열 자녀들이 떼죽음을 당합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성적이 나옵니까? 욥은 21, 22절의 고백을 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은즉…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욥의 믿음은 어떤 신앙입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어떤 조건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닙니다. 조건 없이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다니엘 친구들처럼 “비록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A급 신앙이지요! 이런 신앙자들 되십시오!
이쯤 되면 사탄이 욥의 믿음이 대단하군요, 인정해야 하는데 사탄의 특징이 나쁜 일에 쑤시고 다닐 뿐 아니라 끈질깁니다. 도대체 포기를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은 사탄을 따르는 사람들이 더 많고 이단교회들이 부흥합니다. 이단들은 전도하는데 부지런하고 끈질깁니다. 우리는 한두 번 하다 포기합니다. 사탄은 끈질깁니다. 2장 3절로 갑니다.
하나님:봤지? 욥은 조건 없이 나를 섬기고 있지 않느냐? 내가 욥을 자랑할 만하지?
사탄:그럴까요, 욥의 건강을 빼앗고 온 몸을 망가뜨려보면 욥의 태도도 달라질 걸요?
하나님:그래?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한 가지! 목숨은 건드리지 말라!
그래서 재대결이 벌어집니다. 무대는 1층 인간세상입니다. 욥의 온 몸이 종기로 가득합니다. 종기는 악창(惡瘡)으로 유대인들은 나병(레 13장), 상피병(象皮病)으로 해석합니다.
이번에는 사탄이 효과를 보았습니다. 부인의 믿음을 흔든 것입니다. 부인이 9절,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 저주합니다. 그러나 악창으로도, 저주에도 욥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련으로 믿음은 더 강해집니다. 당신은 참 어리석은 말을 하구료,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를 받을 때도 있는 것이오! 그러면서 입술로 범죄하지 않습니다(2:10).
누가 이겼어요? 1차 2차 대결은 하나님의 완벽한 판정승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였겠어요? 욥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이 얼마나 신실했으면 내 종 욥을 흔들어봐라, 시험에 들지 않을 것이다! 자신 있게 사탄의 먹이로 내놓겠어요? 그리고 믿은 대로 되었습니다.
요즘은 너무 심약해요! 조그만 일에도 낙심하고 삐치고 시험 들고… 감리교 창시자 웨슬레는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시험 들기에 딱 알맞은 아슬아슬한 믿음으로 살아간다, 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도 사탄에게 내 주면서 마음대로 해봐! 목숨만 건드리지 마라! 할 수 있는 강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은 말은 쉽지만 현실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대결을 통해, 욥에게 고난을 허용하신 것만큼 사탄의 악(惡)을 선용하려는 섭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을 사랑스런 눈동자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걸 욥도 알면 좀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시험이 시작될 때, 시험 과정에서 시험 결과에 대해… 여차저차해서 잠시 시험을 줄 테니 힘들어도 참아라, 좋은 성적이 나오고 그 성적에 근거해서 더 좋은 일들을 보여줄게… 했다면 욥은 참는데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대가 2중이다보니 시작은 하늘무대이고 진행은 땅의 무대에서 연출됩니다. 하나님께서도 활동무대가 다르기에 알려줄 수가 없습니다. 이게 욥에게는 고통인 것입니다.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왜 착한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입니까?”
만약 고통이 욥기의 주제라면 하나님께서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너를 축복해 주기 위해 그래, 네 믿음을 온 세상에 자랑하려고 그래… 그러나 욥기의 주제는 고통이 아닙니다. 고통의 이유는 하늘무대에서 벌어집니다. 욥은 알 수가 없을뿐더러 욥의 세 친구들도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기에 고통에만 집착한 채 서로들 자기 생각을 하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세 친구 주장. 모든 고통에는 원인이 있다! 네가 벌을 받는 것을 보니 악인이다!
-욥의 반박. 나는 100% 순전한데 왜 내게 불행한 일이 생기냐? 이건 옳지 않다, 나는 억울하다! 이건 불공평해…. 내 죄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남에게 하나님에게 책임 전가!
-불가지론(不可知論). 왜 내가 불행해야 하는지 원인을 모르겠다, 내 팔자지 뭐… 운명론.
-유대랍비 쿠시너의 하나님 동정론. 내 불행에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 이해해 드리자!
어느 것이 맞습니까? 다 틀려요! 저들은 고난의 목표를 보지 않고 고난의 원인만을 보고 만 것입니다. 원인의 사다리에만 매달리며 싸우니 논쟁을 하다 폭발한 것입니다.
미국에 조지 워싱턴 카버라고 유명한 땅콩박사가 있습니다. 흑인 크리스천입니다. 앨라배마에서 별로 쓸모도 없는 광활한 땅콩 밭을 보면서 모두 한심했습니다. 땅콩을 까먹는 것을 농사의 중심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카버:창조주시여, 우주가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는지 말씀해 주세요.
창조주:너는 그렇게 하찮은 존재이면서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는구나, 네 머리에 담을 정도의 내용을 물어보라.
카버:창조주시여, 사람은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는지 말씀해 주세요.”
창조주:하찮은 인간아!~ 아직도 네 질문은 거창하구나. 네 수준을 낮추어라!
카버:네 하나님! 땅콩은 왜 만드셨나요?
창조주“그래, 한결 낫구나! 이제야 네 수준에 맞는 질문을 하는구나. 내가 알려줄게, 땅콩 소스, 마요네즈, 커피, 화장품, 얼굴의 분, 면도크림, 로손, 플라스틱 제품, 살충제, 접착제…
하나님께서는 땅콩을 원료로 하는 제품을 무려 300개도 더 되게 알려주었습니다. 땅콩은 미국 남부 앨라배마 경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람은 자기 수준의 것을 물어야 해요! 고난이 그래요! 고난은 어떤 원인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땅의 무대에서 비롯되는 고통들… 부부문제, 자식 문제, 인간관계로 오는 문제와 불행들에는 고통의 원인이 있습니다. 이건 그냥 잘못을 빌고 용서하고 화해하면 됩니다.
문제는 하늘에서 시작되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오는 고난은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해결방법이 없으니 고난의 이유를 물어봐야 답이 없습니다. 왜? 고통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목표는 다른 곳에 있기에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에 대한 답을 하나님께서는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고통에 답을 찾으러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게 되고 싸우게 됩니다. 사람이 고난을 통해 성화되고 정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성이 더 악해집니다.
한국인은 답이 있는 문제에 강합니다. 그래서 넷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다보니 답이 한마디 단어로 딱 정리되는 문제가 아니면 힘들어합니다. 유대인은 객관식보다는 주관식입니다. 하나님께서 1일에 무엇을 창조했느냐, 빛? 동물? 식물? 인간… 골라라 이게 한국식이라면 유대인들은 왜 빛을 첫 번째 만들어야 했을까, 그 이유를 생각해보라… 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학교지식은 생활에서 써먹을 지식입니다.
욥의 고난은 객관식이 아닙니다. 인간세상에서는 딱히 답이 없어요! 그럼에도 고난을 객관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니 네 탓이냐? 내 탓이냐? 하나님 탓이냐? 내 팔자냐? 하나님을 이해해 주자… 이런 답밖에 없지요. 친구들은 네 개 답을 놓고 싸우고 욥의 아내는 남편에게 죽으라고 합니다. 네 친구는 고통의 원인을 욥에게 두었기에 회개를 강요했고 욥의 아내는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에게 두기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고 말합니다.
부질없는 싸움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일로 땅에서 생겨나는 문제에 답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든지. 믿음생활 잘 하는데 회사가 순식간에 파산되었든지, 큰 병에 걸렸던지 자식이 장애가 생기거나 동성애자가 되던지… 이럴 때 내 잘못이냐? 누구 잘못이냐? 하면 안 됩니다. 원인이 없는 고통이기에 답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문제가 하늘무대에서 왔다면 답도 하늘에서 와야 합니다. 우리야 하늘무대에서 벌어지는 고난의 원인, 땅의 무대에서 벌어지는 고난의 진행사항들을 동시에 보고 있으니 다 압니다. 결과까지 보니 세 친구들처럼 누구 잘못이냐 싸우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욥을 어떻게 축복 주시나, 그것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욥에게 웃음을 보이고 세 친구들과 아내에게 비판할 수 있지만 당시 당사자들에게는 무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세상에서만 고난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니 답이 없이 서로의 탓만을 내세우다 우정은 깨어지고 본의 아니게 나쁜 친구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난이 왔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모를 때는 마음대로 원인을 만들어 내면서 누구를 원망하거나 자신을 탓하거나 하나님께 섭섭해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시작한 일, 하나님께서 하늘무대의 커튼을 여시고 하나님의 목적을 보여주실 때까지 묵묵히 참고 견디며 인내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때가 되면 다 알게 되고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요한복음 9장에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을 두고 제자들이 묻습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 죄 때문입니까? 욥의 네 친구들의 시각입니다. 장애의 원인은 죄다! 불행의 원인은 죄다. 자기 죄입니까, 부모의 죄 탓입니까? 제자들은 고통의 원인을 땅에서만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상처에 상처를 더 입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 시각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당연하지요! 제자들은 땅에서 원인을 찾으려 했기에 누구의 탓-부모와 본인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갔고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원인을 찾기에 그로 인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대해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통을 이해하는 성경적인 해답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있나요? 내 잘못으로 왔나요? 내 실수인가요? 그래서 고난이 왔고 불행한가요? 이건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일어난 고난이 아닙니다. 그냥 내 자신의 문제입니다. 그냥 회개하면 되고 다음에 잘 하면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이 없나요? 내 잘못도 아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지고 걸어가고 있나요? 이건 하늘에서 나를 두고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결입니다. 내가 너무 아까우니까 하나님과 사탄이 자기 것으로 하려고 싸우는 것입니다. 내가 뭐가 그리 아까웠을까요? 나를 통해 어떤 일을 드러내고 싶으신 것일까요? 차라리 그냥 두시면 나는 좋은데… 그냥 평범하게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해요? 그냥 인내해야 해요! 꾹꾹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한 높은 목적, 우아한 목적, 위대한 목적을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느새 더 높은 믿음의 단계로 점프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사다리를 통해서 점프한 그 목적지 말입니다. 이것이 신수성득(神守聖得)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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