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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부활 이후 40일이 준 선물(2)(요한복음 21:1~6)

by 강정훈말씀닷컴 2024.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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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이후 40일이 준 선물(2)

요한복음 21:1~6

  

서론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곧장 승천하지 않고 지상에 남으셨던 40일 동안, 제자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인들 대상의 회복 사역은 한()을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입니다.

응어리 근육이 뭉쳐서 된 덩어리입니다. 이게 종양이나 암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응어리는 가슴속에 쌓여 있는 한이나 불만 따위의 감정입니다. 그냥 놔두면 우울증이 되고 화병이 됩니다. 중년들에게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여기 여제자들은 대부분 중년입니다.

 

여인들의 응어리를 풀어주지 않으면 자포자기하고 폐쇄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홀딱 승천해 버리셨다면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이 됩니다. 그런 응어리로 주님의 일을 제대로 하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40일을 함께 하면서 한을 모두 풀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오는 죄사함의 구속과 기쁨, 재림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니 근심이 사라지고 감사가 넘쳤습니다. 남성 제자들을 얼마나 편안하게 섬겼겠어요?

여성들에게 한이 있었다면 남자제자들에게는 무엇이 남아있을까요? 수치감입니다.

수치감(羞恥感). ‘수치를 당한 느낌 부끄러움입니다. 자신들의 비겁한 행동이 주님에게, 서로에게, 여인들에게 부끄러워요! 스승을 부인하고 줄행랑을 쳤잖습니까?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졌고 아리마대 요셉은 당돌히 시신을 달라했고 니고데모는 몸에 바를 향을 가져왔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용기입니까? 여인들 중에서도 도망가거나 배신한 이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3년이나 사랑을 받고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내들이 참 부끄러운 행동을 한 것입니다.

 

부끄러움, 수치감은 죄책감으로 이어집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히면 감정이 불구(不具)가 됩니다. 자신감이 결여됩니다. 인간관계가 건강하지 못합니다. 100의 능력을 갖고 있어도 수치감과 죄책감이 있으면 50도 제대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사람 노릇을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수치감의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부활로 다시 모였습니다. 저들은 수치감으로 얼굴이 뜨뜻해집니다. 그래도 모른 척!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에게 사명을 받았다 생각해보세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룰루랄라~ 재미있게 사역할 수 있을까요?

 

성령이 임하시면 수치감이나 죄책감이 순간적으로 사라질까요? 내면에 숨겨진 수치감과 죄책감은 엄청나게 부정적인 힘이 강력합니다. 이를 만회하려고 별별 수단을 다 쓰며 거짓된 자기 모습을 세상에 내보입니다. 거짓된 모습으로 포장하기 시작하면 자신이 아닌 무언가로 됩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로 변형되어 가는 과정을 엘리스 밀러는 영혼의 살인이라 합니다. 그만큼 수치심은 자신에게 가하는 가장 폭력적이며 인간성을 말살하는 행위입니다.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질병을 유발합니다. 절셴 카우프만은 수치심에 대해 말합니다.

 

수치심은 내면에 혼란을 가져다주는 절망, 소외, 자기 회의, 고독, 외로움, 편집증과 정신분열증, 강박장애, 자아분열, 완벽주의, 뿌리 깊은 열등감, 경계선 성격장애와 악성 나르시시즘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가능성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려는 일종의 느리게 진행되는 자살입니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일을 해도 수치심에 매여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성인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수치심은 원초적입니다. 건강한 수치심이 있습니다. 수치심이 있기에 회개하고 행동을 반듯하게 하고 하나님께 나갑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수치심은 죄와 연결됩니다. 어릴 때 버림을 당하면 그게 수치심이 되어 다시 버림을 당하지 않을까, 불안합니다. 어린 시절에 성적 수치심을 당했다면 자칫 평생 수치심으로 살아갑니다. 성공신화에서 나오지 못하고 남에게 뒤진다 생각하면 자기 경멸, 거짓 자아 이런 수치심에서 숨으려 중독이 됩니다. 종교나 마약이나 술에 빠져 자기를 숨기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음이 부끄러워 나뭇가지로 가렸습니다. 부끄러움이 수치심입니다. 이런 부끄러움으로 어떻게 지도자나 사명자가 되겠습니까? 제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데.

예수님께서 이걸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40일을 함께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제거해서 건강한 자아상으로 회복시키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수치감과 죄책감을 없애고 사명자로 세우기 위해

1) 갈릴리에서 초심을 회복시킵니다.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와 만나자!”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부활하신 자리에서 사명을 주시면 될텐데 왜 그 먼 길 갈릴리까지 오라 하셨을까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는 대략 150km, 여기서(강서구 발산동) 대전시청까지 141km이니 먼 거리입니다. 예수님이야 부활하신 이후 영체(靈體)가 되었기에 1초 만에 예루살렘-갈릴리 순간 이동이 가능하지만 제자들은 다릅니다. 그 먼 거리를 이틀 이상 걸었을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배신한 것에 대한 심술인가요? 아닙니다! 갈릴리의 초심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뱃사람의 근성은 투지와 열정과 복종과 동지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3년 따라다니면서 도시물(?)을 먹었다고 갈릴리인의 근성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 제자들끼리 신뢰와 우정을 복귀시킵니다. 그러면 서로들 괜찮아 하게 되고 조금씩 수치심이 사라지고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평생 건강한 관계가 됩니다.

 

2) 식사하면서 관계를 회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면 당연히 책망이 마땅합니다.

어떻게 너희들이 내게 그렇게 배신할 수 있느냐?”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를 본받아라! 그들은 위기에서 오히려 빛을 발하는 믿음이었다! 상류층이라 너희들보다 잃을 것이 훨씬 많았음에도 내 죽음 앞에서 무대 위로 올라왔다!”

내가 포도나무 비유에서 말하지 않았더냐?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가지라고! 지금 그 말이 옳음을 증명하고 있지 않더냐?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느냐? 못 잡았다!”

제자들은 그런 책망을 들어도, 우리말로, 쌉니다! 그들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책망 대신에 다른 말씀으로 회복시킵니다. “여기 와서 밥 먹자

마크 러틀랜드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세 가지 말을 정의합니다.

너를 사랑해” “용서해줄게”(괜찮아!) “우리 밥 먹자~”

밥 먹자는 것은 한 식구라는 말입니다. 밥식()에 입구(), 식구(食口)입니다. 끼니를 함께 하는 식솔(食率)이 진정한 식구입니다. 가족은 멀리 있는 혈족보다 늘 같이 밥을 먹는 사람, 주일마다 밥을 먹는 사람들 우리가 한 식구, 늘빛가족입니다. 주일 식사를 못해 아쉽습니다!

예수님께서 밥을 먹자고 한 것은 배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족이요 식구다! 너와 나만이 아니라 너희끼리도 가족이다! 그러니 이런 일로 서로를 불신하거나 책임추궁을 하지 말라! 내가 가족으로 수용하는 것처럼 너희들도 가족이 되어 교회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수치감이나 죄책감에 시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사탄의 끈이 된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다시 뜨겁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활력!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신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가슴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가슴이 뜨거워지니 다시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뜨거우니, 적진(敵陣)으로 간 것입니다.

갈릴리바다에 다시 모여든 제자들, 베드로가 3,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했더니 다른 제자들도 나도! 하고 따라나섭니다. 어떤 심정이 보입니까. 스승을 버렸다는 수치감, 죄책감, 자신감 결여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웬 단풍잎을? 그래서 바다로 숨어버리려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물을 오른 편으로 던지라 했고 물고기를 가득 잡았습니다. 3년 전의 상황이 완벽하게 재현됩니다. 그때 예수님이다! 하는 요한의 소리에 베드로는 바다로 뛰어내립니다(7). 그리 반갑게 주님에게 달려들 형편이 못됩니다. 예수님을 세 차례나 부인하면서 여종에게 나는 모른다, 니는 아나?” 했던 뻔뻔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다! 해도 수치심으로 예수님이 곁으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야단맞을 것 생각하지 않고, 옷이 젖으면 어떻게 될까, 빠지면 어떻게 될까 앞뒤 생각하지 않고 뛰어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살아나셨다! 여기에 찾아오셨다! 그 사실 한가지만으로도 야단을 맞든지, 옷이 젖든지 이것이 되는 일인지 안 되는 일인지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함께 있던 도마는 의심꾼, 나다나엘은 사려 깊은 사람, 야고보와 요한은 나설 때, 나서지 않을 때를 아는 영리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생각이 없습니다. 예수! 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사람, 그 예수를 향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고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마음이 뜨겁지 않아서 실수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실수하더라도 뜨거운 심정을 주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이 일을 내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은 가슴에 불이 있는 열정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공하고 출세했습니다. 뛰는 열정에는 한()이라는 감정의 응어리도 녹아지고 수치감과 죄책감의 바위에 눌려 스스로를 자해하거나 숨어버리지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 나가 수치의 옷을 벗고 죄책감을 벗어던지고 뜨거운 심장으로 새 길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신앙입니다!

 

결론

1944, 당시 일본과 전쟁 중이던 미국은 미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인의 행동을 연구하고자 했습니다. 루스 베네딕트는 미 국무성의 위촉으로 2년여 동안 일본 문화를 연구하고 분석했는데, 일본인의 독특한 행동, 가치관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했다는 평가를 받는 책을 내놓습니다. <국화와 칼>입니다. 서양인은 의 문화, 일본은 수치 죄책감의 문화로 서로 다르다고 합니다. 서양인에게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죄를 지으면 신에게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서양에서 기독교가 부흥했습니다.

 

일본인에게 수치는 타인의 비판과 조소입니다. 일본인에게는 죄 자체보다는 타인을 의식하는 체면이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서양인들의 죄책감은 죄의식에 가까운 수치스러움이고, 일본인들의 수치는 당황스러움에 가까운 수치심입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남들에게는 깍듯한 예의는 있지만 그걸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믿음으로 연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가슴 속에 부끄러운 주홍글씨 하나쯤은 있습니다. 이런 수치심, 죄책감이 일반기준보다 현저하게 낮은 사람들이 사이코패스(Psychopath)’입니다. 반대로 스스로 망신과 수치를 당하는 것을 즐기고 추구하려는 일종의 피학증이 도덕적 마조히즘(masochism)입니다. 이런 성향이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풍성한 삶을 제대로 누릴 수 없고, 남을 섬기는 일에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훌륭한 자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에 앞에 수치감과 죄책감의 옷을 벗을 때 제대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고 달라진 제자들의 이후의 행동은 죄책감을 벗어버린 훌륭한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랬다면 우리도 그리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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