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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600년 은혜의 가정이 파괴되다(창세기 9:18~29)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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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방주교회

600년 은혜의 가정이 파괴되다

창세기 9:18~29

 

서론

영국의 대 문호(文豪) 셰익스피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13~20세까지 사이에 내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그 시기는 잠들어 버렸으면 좋겠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나요? 실패와 고통의 시기, 기억조차 하기 싫은 시기 말입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17세부터 27세까지 10여년 정도가 힘들었습니다.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이지요! 그때는 지워버렸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그 고통과 부끄러움도 지워질 수 있을까요?

경건한 의인(義人) 노아는 950년을 살았습니다. 그랬던

노아에게도 지워버리고 싶은 시절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있었지요! 본문의 이 장면이 바로 지워버리고 싶은 내용입니다. 노아는 대홍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의인 집안의 가장(家長)입니다. 아내와 세 명 아들과 며느리를 구한 사람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인류의 조상입니다. 노아는 600년을 성공적으로 잘 살았습니다.

 

 6:9,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의인 완전 하나님과 동행 그것도 600년을!

어느 하나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방주를 짓고 370(홍수 7일 전 방주 속으로 대피하였으므로 노아가 방주 속에 머문 전체 기간은 377)을 거주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소돔과 고모라에 불심판이 임한다며 피신을 종용했지만 사위들은 농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노아가족들은 가장의 말을 좇아 120년 방주를 지었고 방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노아가 진실하지 않았다면 순종하지 않았겠지요. 노아의 성공! 누구도 이만한 성공이 없습니다. 그러나 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 950세에 죽었는데 350년의 세월은 성공한 생애였다, 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무의미하게 흘러가 버린 생물학적인 생애였을 뿐입니다. 사나마나한 생애였다는 것입니다.

왜냐? 18절 이하의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18절 이하는, 한 마디로 실패한 인생입니다. 본문만을 볼 때 노아는 더 이상 의인도 못 되었고 완전하지도 못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은 더더욱 되지 못했습니다. 세 자녀들 중에 함과 그의 자손들은 저주스러운 민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런 저주스런 예언을 듣고 함과 가나안 자손들이 제 아버지와 할아버지, 조상할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겠어요? 내 순간적인 혈기로 수고하고 거친 삶을 살아가는 함과 그 자식들을 바라보는 노아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는 것이지요! 350년 후회와 자책의 삶입니다.

 

노아는 600년 동안만 성공했고 성공 후에 350년은 오히려 실패한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살게 된 것입니다. 600년 건강했던 가정이 350년을 왜 불행한 가정으로 살아야 했을까? 그건 노아의 실수였고 실패였습니다. 한 때는 믿음에서 성공을 보였던 우리들의 실패이기도 합니다.

한국교회는 1885년에 시작된 이래 136년으로 성공적으로 성장했고 아시아의 예루살렘이라는 찬사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그 성공은 제대로 지켜낼 수 있을까요?

노아는 왜 실패했을까요? 

부정(不正, 不淨)이라는 단어가 들어오면서 은혜의 그늘에서 벗어났습니다. 죄는 부정(不正)에서 시작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노라(3:4), 하나님의 명령을 부정(不正)합니다. 인간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입니다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자라지 못하는 것이 부정(不正)이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부정(不淨)입니다. 부정(不正)적인 생각! 부정(不淨))적인 신앙! 항상 비딱한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길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행동하고 제멋대로 감정을 표현하게 됩니다.  노아가 그런 것입니다

 

-노아는 의인이지만 지금은 21, 포도주를 마시고… 비은혜의 식성을 보인 것입니다. 포도주는 경건을 해치는 부정한 음식입니다. 포도주를 마실 정도가 아니라 취했습니다. 몸을 가눌 수 없게 되면 판단력을 잃습니다.

 

2016년도 통계는 한국 성인의 음주량이 세계 1위로 러시아의 2배입니다! 한국인들은 한()이 많거나 화병(火病)이 많아서 울화를 달래려고, 아니면 흥()이 많아 술을 좋아합니다.

술은 대표적인 발암 물질입니다. 적절한 양의 술은 없습니다.

 

2016년 유럽연합(EU)의 암예방 권고에서 모든 유형의 알코올 섭취를 제한해야 하며,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암 예방에 더 좋다고 밝혔습니다. 2017 년 미국 임상종양학회에서도 하루 한 두 잔의 술도 암의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냈습니다. 이런 연구들에 따라 최근 개정된 한국 암 예방 지침은 소량이라도 알코올을 피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술이 낳은 죄악과 결과를 경고합니다. 노아는 술을 마시고 추한 모습을 보였고 롯은 술에 취해 딸들과 불륜을 저질러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을 낳았으며(19:3038), 술은 사람을 난폭하게(4:17) 바보로 만들며(20:1) 가난하게 만들며(23:20~21) 판단력을 흐리게 하며(31:4~5) 인간을 감정의 노예로( 4:11) 만들어 버립니다. 솔로몬은 술의 해악을 알기에 술을 보지도 말라. 뱀같이 물것이고 독사 같이 쏠 것이라 금주를 권합니다(23:31~32).

 

노아와 같은 의인도 포도주의 속성 앞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마신다는 것이 한 잔만! 딱 한 잔만 하다 보니 취기가 오를 때로 올라 절제력, 통제력, 판단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부정적인 행동을 합니다. 비은혜에 행동이 노출된 것입니다.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벌거벗은지라. 직역하면 그 자신을 벗었다’. 스스로 알몸을 드러낸 것입니다. 당대에 완전한 자로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노아도 잠깐의 방만(放漫)한 자세로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세상에 완전한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술은 죄가 되냐 안 되냐? 그걸 따지기 전에 성결을 무너뜨리는 천적입니다. 우리가 방심하기를 기다렸다가 순간에 마음의 방어선을 하나씩 제거하고 들어옵니다. 심리적 완화 기제로 몸을 무장 해제시킵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냅니다. 비은혜의 언어폭력입니다!

24, “노아가 술이 깨어” 25, 작은 아들에게 저주를 두 아들에게는 축복을 합니다.

감정은 훌륭한 하인이지만 끔찍한 주인이기도 합니다. 아담이 하와를 뼈 중의 뼈요(2:23)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다 여자’(3:12)라는 경멸의 표현을 합니다. 아담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으로 노아는 분노의 감정으로 판단력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감정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과학 저널리스트 대니얼 골먼은 지능지수는 성공요인의 20%밖에 되지 않는다, 성공의 80%는 감정지능이 차지한다 합니다. 제대로 된 성공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것입니다. 노아는 술에 취해 격한 감동에 휘둘리다 폭언을 한 것입니다. 분노 중에는 결정을 미뤄야 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생애에서 이렇게도 정반대적인 생애의 두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까요? 600년을 빈틈없이 의인으로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했던 노아가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요?

 

 6:8,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더라

은혜는 불쌍히 여기다’ ‘호의를 입다 여기서 은혜는 단순히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과 긍휼, 공의임을 뜻하는 헤세드’( 9:24)와는 다릅니다. 이는, ‘여호와의 눈에’, 노아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게 된 까닭이 그분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점이 있었기 때문임을 시사해 줍니다(9).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이 없다면 구원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그 사랑에 대한 인간 측의 적극적인 반응과 노력도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적인 면과 행동, 감정이 통제를 받고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600년을 의인으로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술을 먹고 하나님의 통제력을 놓치는 순간 600의 성공은 순간에 무너집니다. 그래서 350년을 왕년보다 못한 노인네로 살다 끝나고 맙니다. 아무리 왕년에 무엇을 잘 했고, 왕년에 잘 믿었다고 해도 지금 무너져 있으면 믿음 끝! 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합니다. 인생 성공 앞에서 자만하다 크게 떨어지는 실패를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론

요즘 한국교회가 고령화가 되어갑니다. 그래서 교회는 연세가 높으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왕년에는 대단한 믿음들이었습니다. 주일성수에서나 헌금에서나 봉사에서나 목숨을 걸었던 분들입니다.

그러나 은퇴하면서 노아에게 있었던 무의미한 세월 350년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왕년을 자꾸 꺼냅니다. 왕년에는 내가... 이런저런 일도 다 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절로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지 않게됩니다. 그게 바로 노아의 마지막 생애 350년입니다.   

그거 별로 자랑스런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950년 생애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세월이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지난날의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지금도 잘 유지해 오고 있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자신들을 맡기고 있습니까? 영적인 삶은 한번 성공했다고 자동적으로 성공이 보장되는 비행기의 자동항법 원리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숨어야 합니다. 사단은 언제나 성공 후에 찾아옵니다. 그러기에 긴장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코로나19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술에 취해 무너졌다면 우리는 두려움에 주저앉은 아닙니까? 지난 날, 소위 왕년의 성공이 오늘의 성공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대한민국이라는 방주의 노아요 늘빛교회라는 방주의 노아요 가정이라는 배의 노아입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더라! 우리가 지금 코로나시대에도 그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딱 한 가지!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더라(6:8) 그것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평생이 되기를 다시 다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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