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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하나님과의 거리 좁히기(이사야 29:13, 14)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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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거리 좁히기

이사야 29:13, 14  

 

서론

코로나 바이러스 기세가 많이 꺾여 이제 숨통이 트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오늘까지로 예정된 사회적 거리 두기를 다소 완화해 2주간 더 연장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는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지역사회 감염 차단을 위해 실시되는 캠페인입니다. 대중이 모이는 행사나 외출 자제, 재택근무 확대, 2미터 간격 등이 해당합니다.

 

지난 2월말 대한예방의학회 코로나19 대책위원장 기모란 교수가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을 제안하면서 널리 사용되었던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기화 되면서 관계 거리두기로 악성화되고 있습니다. 대면도 악수도 제대로 못하고 온라인으로 예배하고 수업하고, 재택근무하고 너도나도 마스크 복면들을 하니 당연히 사람들 간의 관계 단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야 문명이 발전하고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회적 거리가 관계의 거리두기로 장기화되면서 우울감을 호소하고 감정은 말라갑니다. 제주도에서는 상춘객이 몰릴까 아름다운 유채 밭을 갈아엎었습니다. 지자체에서도 제발 오지 말라 읍소합니다. 사회적 거리유지가 마음에 더 먼 거리를 만들며 우울하고 재미가 없습니다.

 

2월부터 영상예배를 드린 교회들은 두 달이 넘습니다. 영상예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영상예배 접속신자들이 재적교인 절반도 못 미치고 설교가 끝나니 영상에서 우르르 빠져나갑니다. 이게 무슨 예배인가요? 예배하다 설교만 듣고 나가는 이들은 없습니다. 예배당 예배가 온전한 주일성수요 정상적인 공예배입니다. 예배당이라는, 공동체라는 예배울타리가 무너지면 주일성수 개념이 없습니다. 주일에 집에 있으면서 주일성수를 한다? 예배한다? 그건 아닙니다.

 

온맘닷컴이 영상예배자들에게 물었더니 80% 온라인 예배 내내 교회당 예배가 그리웠다고 응답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차원의 영상예배는 예배당에서 멀어지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예배당 거리두기가 하나님과 거리두기로 같은 동선(動線)으로 움직입니다.

 

다시 예배당 예배가 회복되어도 그 후유증은 엄청납니다. 교회 이탈자 증가, 새신자 감소, 재정의 감소로 인해 교회에 극심한 위기가 옵니다. 21세기교회성장연구소 김두현 박사는 오는 9~10월이 되면 소형교회는 물론 중·대형교회를 포함해 30% 안팎의 교회가 극심한 위기를 겪을 것이라 예측합니다. 예배당예배를 전면 포기하다니, 뭔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거예요!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님은 금요일자 <국민일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론이 건강하고 예배의 신성함을 제대로 알았다면 한국교회가 이렇게 쉽게 예배를 포기할 수 있었겠는가. 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나고 두 달 가까이 지나니 이제야 한국교회가 정신을 차리는 상황이다. 한국교회는 다시 교회를 세우는 운동(처치 플랜팅)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사회적 거리두기에만 연연한 나머지 예배당과의 거리두기, 예배와의 거리두기가 결국은 하나님과의 거리두기까지 연장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영상예배로 예배를 드린다지만 예배는 모호해졌고 주일성수 개념은 무너졌습니다. 남은 것은 형식과 껍데기입니다. 하나님과의 물리적 관계는 다시 회복되겠지만 한번 세상맛을 보았으니 돌아오기는 해도 지난 세월, 주일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회복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님께 지적당했던 부분입니다.

 

본문을 보세요!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책망합니다.

13,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가까이하며” “공경하나 이는 공적예배 행위입니다. 이건 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여기서 멀리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마음이 멀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입술로는 공경의 찬사를 늘어놓습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위선입니다.

 

당시 히스기야 왕의 주도하에 남왕국 유다에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종교 정화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교도의 관행들과 우상들은 척결되었고 모세 시대의 예배 의식이 부활되었습니다(왕하 18:4). 그러나 이러한 종교개혁운동은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하달된 것이기에 백성들의 내면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모양은 갖추었으나 마음 공경심은 갖추지 못했습니다. 립서비스 종교! 하나님께서는 립서비스 예배, 입술의 종교를 혐오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어찌했습니까? 자기들은 제사를 엄격하게, 경건하게 안식일을 제대로 준수한다는 그 형식에 눈이 어두워 세리와 창기와 병든 자들과 부정한 자들을 성전에서 자기들에게서 접근을 금했습니다. 종교적 거리두기를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거리에서 멀어져 있으면서 타인을 정죄하고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하면서 마음의 거리두기 믿음을 책망셨습니다(15:7~9).

 

예레미야도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마음은 멀다”(12:2)고 비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거리두기에서는 좁혀졌지만 입술로만 그렇지 마음의 거리두기는 여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계의 실패로 이어졌습니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근접공간학에서 인간관계의 공간을 네 공간-친밀한 공간, 개인적 공간, 사회적 공간, 공적인 공간으로 분류합니다. 여기에서 '공간' '거리'라는 말입니다.

 

친밀한 거리. 46 이내로 사적인 영역으로 가족이나 연인이 들어오는 공간입니다.

개인적 거리. 46~120,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로 평소 호감을 가진 지인들과의 관계입니다.

사회적 거리. 120~360(2m) 정도로 일로 만나는 관계로 사회적 거리두기 2m 경우입니다.

공적인 거리. 강연이나 행사 등 360 이상의 거리로 이성적 영역입니다.

 

조금만 거리를 두었으면 더 좋았을 사람, 너무 거리를 두어 멀어졌던 사람들! 에드워드 홀은 어느 정도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감정적 소모를 줄일 수 있어 좋다고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사회적 거리두기 안에 예배당, 주일성수, 예배를 포함시켜 버렸고, 결국 본의는 아니었지만, 지금 스스로 자각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조차도 사회적 거리두기에 놓아버리고 2미터가 아니라 두 달이나 하나님과의 거리가 물리적으로 멀어졌고 두 달 동안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예배당과 멀어지면 하나님과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한국교회가 놓치고 영상예배를 드려도 예배이고 주일성수이다”, 라고 자기 합리화에 급급하다면, 한국교회는 하나님과의 거리 좁히기에 실패하고 맙니다.

 

그 결과는 어찌될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예고합니다.

14,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하나님의 지혜를 공급받지 못하면 예배형식을 자꾸 편의주의 인본주위로 바뀌게 됩니다. 결국은 형식만 남고 하나님께로 아무런 은혜도 공급받지 못할 만큼 먼 거리에 나앉게 됩니다.

 

바울은 결국 이런 상태를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라고 말합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회자이며 집필가인 팀 켈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계적 유행병은 글로벌 시대에 언제든지 다시 발생할 수 있다. 이 같은 시기에 하나님은 항상 세상을 향해 세상은 네가 아닌 나의 주관 아래 있단다. 넌 내게로 오면 된단다. 넌 나의 지혜와 도움이 필요하단다라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가까이 가야 합니다.

 

중견목회자 40여명의 화상좌담회에서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합니다.

코로나19 이후 교회가 더욱 정결해지고 거룩해지길 소원한다”(김지철 목사)

“‘삶이 곧 예배란 명제를 단순화해 주일예배를 소홀히 하는 우를 범해선 안 돼”(박영호 목사)

영상예배의 한계는 분명하다. 하나님과 만남의 경건성 확보에 많은 지장이 있다, 코로나19 이후에는 현장 예배의 의미를 발견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김동춘 연구원)

 

한국교회가 빨리 공()예배를 회복하고 바른 주일성수의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혀야 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정부의 방침,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공예배를 포기하고 예배당과의 거리를 두었으면 개인 영성에 더 치열해야지 영상예배로 드리느냐, 온라인 성만찬을 하느냐, 예배당에 사진 놓고 예배하는 쇼는 버려야 합니다. 영정사진도 아니고 그게 뭡니까?

 

주일예배를 온전히 드릴 때보다 더 치열하게 회개하고 반성하고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주일성수를 온전히 하지 못함에 집에서 눈물 흘리고 그리워해야 하는데 영상예배로 안심하게 하니 하나님과의 거리는 2미터가 아니라 2m도 더 멀리 간 것입니다.

 

아담은 불순종의 죄를 짓고 두려움으로 마음이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추방당함으로 몸과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늘 하나님과 거리두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라, 가까운 거리로 들어오라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거리! 사회적 기라는 걸 지키려다 하나님과의 거리도 2미터로 만들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2미터가 아니라 1미터 아니 50cm도 떨어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 시대 성가대 악장을 지냈던 아삽은 노래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73:28)

하나님과 거리 좁히기!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주일이요 예배입니다. 좁힌다면 눈에 보이는 예배당입니다. 가정에서는 훈련이 안 되었기에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론

스페인어에 케렌시아(Querencia)라는 말이 있습니다. 투우장의 싸움소들은 각각 다른 역할을 가진 투우사들에게 세 번의 공격을 받습니다. 경기장으로 말을 타고 들어온 첫 투우사는 소의 목덜미를 몇 차례 깊이 찌르고, 두 번째 투우사는 소의 어깨와 척추 부근에 작살을 내리 꽂습니다. 소는 급격하게 죽음의 공포를 느낍니다. 군중들은 함성을 지릅니다. 그러면 소는 이번이 마지막 싸움이 될거라는 위기의식 가운데 마지막 일전(一戰)을 앞두고 잠시 쉽니다.

그 공간이 바로 케렌시아입니다. 일전을 앞둔 싸움소는 그곳에서 쉬면서 숨을 고르고 마지막 힘을 다해 에너지를 모읍니다. 싸움소에게 케렌시아는 회복과 모색의 장소입니다.

 

소설가 헤밍웨이는 그가 쓴 죽음의 오후에서 케렌시아에서 소는 인간의 꺾을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갖는다고 씁니다. 지금은 이 단어가 투우장의 싸움소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쓰입니다.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재충전의 공간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예배당이 케렌시아입니다. 주일성수가, 공동체예배가 바로 회복과 모색의 장소 케렌시아입니다. 이건 영상예배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세상과 거룩한 일전(一戰)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배당 공간, 주일성수의 믿음, 공동체 예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 카렌시아들은 세상을 꺾을 막강한 힘을 공급받는 영성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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