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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당신이 조금만 참으면... (요한복음 16:16~20)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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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조금만 참으면...

요한복음 16장 16~20절

 

서론

한 교회를 오래도록 담임하는 목회를 해보니 장수목회의 비결이 무엇인가, 한 단어로 요약하면 인내입니다. 그동안의 세월에 대해 여러 아쉬움들이 있다면 그 중에서도, “그때 내가 더 참을 걸~” 바로 그겁니다. 물론 나름대로는 참다가 화를 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냥 두면 교회가 산으로 올라가고 개척교회 시절에는 작은 교회 목사라 너무 우습게 아는 것 같아서 무례한 언사와 행동에는 참을 수 없어 그냥 두면 버릇없는 교회가 될까봐 화를 내고 소리도 질렀습니다. 

 

제 목회가 인내와 인고, 기다림과 속으로 꾹꾹 삼키는 목회리더십이지만 그래도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마저도 참을 걸 하는 아쉬움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하지 못하면 가장 먼저 잃게 되는 것이 기쁨입니다. 화를 내고 나면 화를 내게 한 그 사건에 화가 나고 그 사람에 대해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하고 나중에는 내 자신에 대해 후회하고 기쁨이 없어요! 기쁨의 목회~ 춤추는 목회를 못하는 거지요! 

인내의 비결  

히브리어로 기쁨은, ‘회전하다’, ‘빙빙 돌다는 뜻으로 춤추며 기뻐하다’, ‘기뻐 날뛰다는 의미입니다( 3:22;  9:15). 우리가 추구하는 풍성한 삶! 춤추는 인생은 바로 기쁨이 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믿을수록 기쁨을 자꾸 잃고 춤을 잃어버리고 교회생활을 하게 되나요? 주님께서 2천 년 전에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16, 조금 있으면 또 조금 있으면,

17, 조금 있으면 또 조금 있으면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19,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또 조금 있으면

 

조금 있으면 조금만 참으면으로 읽어보세요! 조금만 참으면 많이도 아니에요! 조금만 참으면 아주 조금만 참았다면

 

20,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기쁨이 되리라~ 춤추는 풍성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놓친 기쁨들, 교회공동체는 많이 참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조금을 못 참아서 조금만 참았으면 기쁨을 놓치지 않았을 텐데.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여러 노력도 필요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 인내입니다. 그것도 조금’! ‘조금! 더 참는 작은 인내입니다. 내가 많이 못 참아내서가 아니라 조금을 못 참아서 모세처럼 버럭 화를 내고 가룟 유다처럼 제자공동체를 떠나고 그래서 성숙되지 못하고 성화되지 못하고 기쁨으로 충만하지 못하는 쭉정이 신자 느낌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여기서 조금, 시간적으로 짧은 시간이요 끝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내 시간으로 계산하지 말고 하나님의 시간으로 계산하며 살아야 부귀영화에 타락하지 않고 환란에 무너지지 않게 됩니다. 내 부귀가 영영하다 생각하니 타락하고 고난이 영영하다 생각하니 배교하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순교 동력은 고난은 곧 끝나고 영생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니 조금만 참자~ 그래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걸 내 시간으로 생각해서 얼마나 더 참아야 할까, 이렇게까지 참았는데 그러니 그 조금을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최남선과 이광수는 우리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지금도 그들 이름을 모르는 이들이 없습니다. 그만큼 근대조선에서 우리에게는 굉장한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명예 속에 오명도 있습니다.

육당 최남선, 와세다대학을 나와 <소년>잡지를 창간,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중 한 분입니다.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33인에 서명을 하지 않았음) 중 하나였지만, 이어 친일 활동을 하는 변절자로 오명을 썼습니다.

 

춘원 이광수. 와세다대학교 철학과를 중퇴한 대한민국 근대문학의 발원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소설가입니다. ‘사랑’ ‘무정’ ‘유정’ ‘마의태자 등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 대단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꼬리표는 배신자, 변절자, 친일반민족행위자입니다. 민족개조론이라는 대단한 글을 발표해서 우리민족이 쇠퇴한 것은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 말했지만 정작 자신은 정신적 타락 때문에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두 사람이 오래도록 친일했나요? 아닙니다. 최남선이 변절한 것은 1941년이고 이광수는 1944년입니다. 언제 해방이 되었나요? 1945 8월입니다. 결국 최남선은 해방 3년을 앞에 두고, 이광수는 겨우 1년을 앞두고 변절합니다. 그들이 조금 있으면 해방이 된다는 조금의 마음을 가졌더라면 친일협력자라는 오명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리고, 그들을 욕하고는 있지만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기에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기쁨을 놓아버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세요!

조금 있으면 좋은 일이 온다! 조금만 참아라! 많이도 아니다, 조금만 더 참아라! 조금만~ 그랬다면 더 많이 참을 수 있을 것이고 더 많이 풍성한 기쁨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인내의 근원

그런데, ‘조금 있으면이라는 인내가 내게서 나오는 자가발전이라면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생물에게는 없는 특별한 감정이 있습니다.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접했을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기분이 김정입니다. 감정은 84,000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제어가 안 됩니다. 이런 감정들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고, 언제 터질지 모릅니다.

 

이걸 제어하는 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조금만 견디면, 조금만 참으면, 조금만 버티면 조금 같지만 최남선은 3년 그 조금을 버티지 못해 이광수는 해방을 앞두고 1년을 버티지 못해 변절자가 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걸 버티지 못했나, 쉽게 비난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그 조금의 시간이 3년이나 1년이 아닙니다. 그들은 30년을 버티었다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시간관입니다. 30년을 버텨도 안 되니 일본이 영원할 것 같고 차라리 일본과 하나가 되면 오히려 낫겠다는 생각이 결국은 변절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잠깐이라는 인내조차도 내게서 나오면 욱~ 하고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옵니다. 우리의 인내는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만이 여러 다양한 상황에 대해 제대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경배할 때 모세는 참지 못하고 40일을 기도하면서 얻은 돌비를 내던집니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며 말씀을 경시하는 태도는 백성들과 다르지 않아요! 그때도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34:6,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지금도 인간의 구원을 위해(벧후 3:15), 회개를 위해( 55:6-7 벧후 3:9), ()를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3:25),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15:5-6)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성경의 위인들, 특히 아브라함과 야곱이 나오게 되고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을 마음에 말뚝처럼 박았던 요셉은 인내함으로 신수성가의 삶을 살았고 구약에서 예수님을 예표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조금 있으면 오해가 풀리겠지 조금 있으면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겠지, 이 환란은 조금 있으면 끝나겠지 조금 있으면 신앙으로 변절되지 않는 일편단심의 생애를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에게서 나오는 조금은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허물어집니다.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하찮습니까? 내 인내가 얼마나 됩니까? 그렇게 새벽기도를 작정하고서도 작심3일을 제대로 넘기지 못합니다. 비싼 운동 기구 사놓아도 한 달을 넘기지 못합니다. 인간의 의지가 그런 것입니다. 이런 의지로는 조금 있으면 그 시간이 엄청 긴 시간으로 착시현상이 일어나기에 감당을 못하고 화를 내고 포기해 버리고 변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마음을 도배질을 하고 아예 말뚝을 박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을 더욱 알고 하나님의 속성으로 영적 체질개선, 성품적인 체질개선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고 애쓰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내 안의 죄들에 대해 항상 경계심을 품고 그것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누르고 또 눌러야 합니다. 성령으로 콘크리트가 되어야 합니다.

 

공자와 맹자는 잘 나갈 때의 규범을 “4이라는 말로 교훈했다면 노자와 장자는 일이 잘 안 풀리고 제대로 나가지 못할 때 견디는 네 가지 인내를 말해줍니다.

 

내냉(耐冷)-냉대를 참으라. 조금 냉대한다고 나도 같이 냉대하거나 비판할 게 아니라 오히려 내 따듯함으로 상대방을 내 편으로 만들라

내공(耐空)-쓸쓸하고 한가함을 참으라.

내고(耐苦)-고생을 참으라.

내번(耐煩)-번민을 참으라.

 

이런 인내는 기독교의 오래참음과는 다릅니다. 세상은 참음의 주체가 입니다. 내가 견디고 내가 참고 내가 인내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인내는 참기는 내가 참지만 하나님의 참음의 영향으로 내가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을 수 없을 때 기도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누르며 하나님의 인내로 참게하소서!” 부르짖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인내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내가 믿고 은혜는 네가 받는다”(김익두)는 영적공식이 성립됩니다.

인내의 열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인내는 단순히 꾹꾹 참고 기다리는, 양적인 시간만이 아니라 질적인 시간까지 포함합니다. 한국인의 인내는 그냥 꾹 참는 것입니다. 시집가면 입 다물어 3년 귀 막아 3년 눈 감고 3년이라는 인내의 세월을 말했습니다. 인내라기보다는 인고(忍苦)입니다. 그러다보면 감정이 다 죽습니다. 애정이 식어져버리고 의무와 책임과 애증만이 남습니다.

 

성경은 이런 인내가 아닙니다. 성경의 인내는 그냥 참고 견디는 시간들이 아니라 이 환란을 통해 내가 어떻게 성화가 되고 이 가시를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은혜들은 무엇인가 이런 기대와 훈련 속에서 조금 있으면 좋은 일이 있으리라!~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리라는 확신을 갖고 인내할 때 그 조금 1,2년이 아니요 30년 되고 50년 되고 심지어는 평생이 되어도 뜻을 못 이루었다 억울하지 않습니다. , 

 

내가 조금 참고 조금 견딘 세월에 비해 하나님은 엄청난 은혜와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는 고백이 나올 때 우리는 인내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인내했는가, 그런 이야기입니다. 특히 바울을 보세요! 바울에게는 육신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 때문에 기뻐하지도 감사하지도 못했습니다. 왜 내게 이런 가시를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고 그때마다 퇴짜를 맞았습니다. 계속 인내하며 기도했더니 깨달음의 응답이 왔습니다. 고후 12!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전에는 고통의 깊이, 고통의 기간만을 보았기에 무거운 짐이라 생각했고 벗겨달라고 기도했지만 깊은 묵상과 기도 속에서 고통의 의미들을 생각합니다.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가?

 

7,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자 조금 있으면 고통의 무게 크기를 줄이면서 의미를 키우게 되고 그 가시는 유익이 됨을 알고 감사 찬송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언제까지 인내할 것인가? 사람의 시간으로 조금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시간으로 조금만 인내해야 합니다. 그 인내 속에서 우리를 만들어 내는 하나님의 용광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인내의 달인입니다. 수모에도 참고 더딤에도 참고 배신에도 끝까지 사랑하시며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죽기까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참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순한 양처럼! 번제단의 제물로 죽어가는 희생제사의 양처럼 그렇게 참아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내가 없었다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무슨 일을 당했을 때 주님을 생각하며 그 분의 참음으로 참고 조금만 더 참고 그럴 때에 인내가 우리를 성화시킵니다.

결론

로마제국 치하의 시절, 황제에게는 황제의 투사라는 부대가 있었습니다. 검투상 중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황제 친위부대입니다. 로마제국에 기독교박해가 불었을 때 이들 중에서도 크리스천을 색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40여명의 용사들이 자신의 신앙을 밝혔습니다.

 

갑옷과 투구와 몸은 빼앗을 수 있어도 그리스도께 있는 마음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

 

지휘관은 40개의 얼음 구멍을 내고 집어넣습니다. 옆에는 장작불이 타고 있었고 이교의 신에게 경배할 제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따뜻한 물을 가득 채운 욕조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병사들은 유혹에 굴하지 않습니다.

 

주여, 우리는 모두 40명입니다우리는 40명은 생명의 면류관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우리의 이 거룩한 숫자는 변함없을 것입니다

 

3일째, 한 명이 얼음 구멍을 뛰쳐나와 이교의 제단에 희생제물을 바쳤습니다. 배교의 대가로 따스한 물이 담긴 욕조에 뛰어들었지만 욕조 안에서 바로 죽습니다. 오랫동안 추위에 노출되어 얼어 있던 몸이 따뜻한 물에 닿자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입니다. 동료의 배교를 지켜본 39명의 병사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기도는 계속됩니다. 

 

그런데 다음 날에 숫자를 세어보니 다시 40명입니다. 지휘관 중의 하나가 빈자리를 채운 것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지휘관이 꿈을 꾸었는데 천사가 면류관을 씌워주는데 한 명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게 너무도 황홀해서 강물로 뛰어들어 합류한 것입니다. 3일이 더 지나자 대부분 동사하였고 단지 몇 명만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병사들의 팔과 다리를 잘랐습니다. 십대였던 병사 멜리토만은 남겨 둡니다. 곧 죽을 것이라 생각해서 자르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이 떠난 뒤에 멜리토의 어머니가 죽어 가는 아들 곁에 다가왔습니다.

 

고통은 곧 끝날 것이며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

 

멜리토 역시 승리를 손에 쥐고 순교했습니다. 이 장엄한 집단 순교는 로마 제국의 동방지역에서 자행되던 기독교의 박해를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순교할 수 있었을까요? “조금 있으면 조금 참지 못해 지옥의 구덩이에서 사는 것보다는 조금 있으면, 영원히 누릴 하늘나라 영생 영화를 생각하면서 견디어 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어떤 신앙이어야 합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그게 바로 세상을 이겨내는 큰 믿음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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