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단 강물이 작다 하여도
열왕기하 5장 8~14절
서론
지난주일 신은경 권사님 말씀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집회가 끝나면 강사들은 대부분 모든 게 끝! 입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감사문자나 전화를 드립니다. 신권사님은 곧장 감사 문자를 보내왔어요! 교인들이 보여준 친절과 대접에 감사하다는 내용입니다. 연락을 맡아 수고한 김목사님에게도 감사문자를 보냈어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국민 상대로 살아왔던 분이 작은 일에까지 배려한다는 것은 참 귀한 분이다, 생각합니다.
아무개 유명목사님은 집회가 끝나 내가 전화 남기고 문자 보냈는데 연락이 없습니다. 권사님의 겸손과 겸양은 시험과 시련들의 결과요 아프면서 큰다는, 그런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권사님 말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둘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누구인지를 알면 그에 맞게 살 수 있지만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인생 전반기는 내가 누구인가, 정립해 가는 시간이고 인생 후반기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의미 있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말씀의 요점입니다.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의 작품 ‘미운오리새끼’는 정체성의 중요함을 말해줍니다. 백조는 모든 새들이 동경하는 우아한 철새입니다. 여기에 비해 오리들은 주둥이나 몸매나 걷는 폼도 없고 더욱이 날지 못합니다. 백조는 가장 아름다운 것의 상징이고 오리는 가장 못난 것이 상징입니다. 그러나 백조조차도 내가 누구냐, 그걸 모르니 불행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습니다. 자기 정체성이 백조라는 것을 알게되니 그때부터 행복한 백조가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라는 정체성을 알면 내가 얼마나 사랑스런 존재이며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그 길이 보입니다. 내가 누구냐, 그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디에서 배워야 하나요? 누가 가르쳐 주지요? 내가 누구라는 사실을?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어느 학교가 가르쳐 줍니까? 어느 종교가 답을 줍니까? 불교는 내가 누구냐? 그걸 찾다 날밤을 샙니다. 내가 누구인가, 알게 될 때쯤이면 죽음을 앞에 둡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걸 놓치게 됩니다.
이것을 가르쳐 줄 곳은 우주에 단 한 곳! 교회입니다. 교회만이 여기에 대한 답을 줍니다. 그래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교회이고 큰 사명을 감당하는 곳도 교회입니다. 교회는 깨끗하고 거룩해서만 교회가 아닙니다. 비록 일부 목회자, 교회가 잘못된 일을 해도 교회는 그 자체가 아름다운 곳이고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에 특별한 곳입니다.
백만 원짜리 수표가 구겨졌다고 더럽다고 그 가치가 사라집니까? 아무리 구겨져도 백만 원의 가치를 지닙니다. 그래서 어디 가든지 백만 원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그만큼 대접을 받습니다.
1절, 아람이 나옵니다. 셈족의 후손으로 성경에 ‘수리아’라고도 합니다. 아람나라의 나아만 군대장관, 국방장관이나 참모총장입니다. 그렇게 굉장한 장군도 한센병, 나병에 걸리니 계급도 지위도 무용지물입니다. 별의열 의원이나 약을 써도 낫지 않습니다. 집안에 포로로 잡아와 부인 심부름을 하던 유대소녀가 있었습니다. 이 소녀가 주인이 나병으로 고생하면서도 효험이 없는 것을 보고 유대 엘리사 선지자라면 이적으로 나병을 고쳐줄 수 있을거라 말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병졸들을 거느리고 멀리 엘리사의 처소까지 찾아갑니다. 선지자는 영접은커녕 내다보지도 않고 심부름꾼을 통해 말만 전합니다.
10절,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너무 화가 났습니다.
11절,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
당연하지요! 당시 이스라엘은 아람왕국에 함부로 대할 입장이 아닙니다. 나아만은 갑질을 할 수 있는 왕국의 장군입니다. 맨발로 달려나와 영접하고 안수기도를 해주면 혹시 나병을 고쳐질 줄 알았는데 코배기도 보이지 않으니 화가 납니다. 나아만 장군이 이런 말을 합니다.
12절,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요단강만한 강도 아람에 많습니다! 요단강보다 크고 깨끗하고 유명한 강이 많이 있는데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면 낫는다고? 나를 놀리나? 요단강을 우습게 알고 돌아가고자 합니다.
13절,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이런 뜻입니다.
“주군! 그러시면 아니되옵니다! 생각해보세요. 요단강에 물을 씻는 것보다 더 큰 일을 요구했어도 고침만 받는다면 당장 시행하지 않겠습니까? 밑져야 본전 셈치고 요단강에서 목욕을 합시다. 선지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나중에 벌주어도 됩니다.”
그럴듯한 말입니다. 그래서 14절,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나아만 장군에게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작은 것이라 멸시하고 우습게 알아도 요단강은 기적과 능력이 나타났던 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군대에서 구원해 준 강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이 있는 강입니다. 그래서 아이처럼 순종하는 마음으로 군이라는 계급장 떼어놓고 강물에 발을 담그고 온 몸을 담기었을 때 병이 낫습니다. 별의별 약을 쓰고 용한 의원을 다 찾아다녀도 낫지 못했던 병이 낫는 기적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교회가 하는 일이고 교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치유의 역사입니다. 교회에 가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저 작은 교회가 나를 구원하겠어? 신통치 않는 목사에게 은혜를 받겠어? 저 교회에는 특별한 프로그램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대단하겠어? 대한민국 사람이 나아만처럼 그렇게 요단강을 무시하고 한국교회를 무시해도 교회만이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교회가 성전이라 했습니다. 성전은 솔로몬 왕이 건축해서 봉헌했습니다. 그 봉헌식에서 성전이 무엇인가, 성전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열왕기상 8장,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언약궤를 안치해 놓으니 여호와가 임재합니다. 성전은 어떤 곳이냐?
1.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6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언약궤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심벌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교회도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나! 죄로 인해 형상이 타락된 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회복된 나! 이것이 나의 정체성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자녀다! 이런 신분, 정체성을 알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게 나옵니다. 교회만이 내가 누구이며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하던 일 멈추고 주의 종이 되고 일꾼이 되었습니다.
2. 교회는, 성경말씀으로 변화를 받는 곳입니다.
9절,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돌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키고 살아야 할 계명이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알 수 있는 말씀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아무리 사서삼경이 훌륭하고 팔만대장경이 훌륭하다 해도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성경만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줍니다. 내가 할 일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만이 보존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위대한 것입니다.
3. 교회는, 기도가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성전건축봉헌식에서 기도합니다.
30절,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질병이 있을 때 기도하거든 치료하여 주소서~
-범죄자들의 기도할 때 들으시고 죄를 용서하소서~
-전쟁에서도, 설령 패배했다 해도 지켜주소서~
-기근과 가뭄으로 심판 당할 구하소서~
-이방인들도 성전에서 기도하면 들어주소서~
솔로몬의 대표기도를 들으면 기도의 충동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교회는 기도집입니다. 다양한 제목을 놓고 다양한 상황에서 기도하면 우리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치료될 줄 믿습니다! 회복될 줄 믿습니다! 이만한 집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기도의 집 교회는 위대합니다.
4. 교회는, 희생제물이 있습니다.
62절, “이에 왕과 및 왕과 함께 한 이스라엘이 다 여호와 앞에 희생제물을 드리니라”
희생제물은 죄사함을 비는 예배입니다. 죄인을 대신해서 어린 양이 피를 흘리며 죽었습니다. 제사드리는 자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짐승은 죽었습니다. 희생의 제사요 죽음입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뒤집어쓰고 죽으시고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예표합니다. 성전의 위대함은 죄사함이 있기 때문이요 교회의 위대함도 죄사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들은 도덕과 윤리를 말합니다. 성령 죄사함을 말한다하나 스스로 자력윤리와 종교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 길을 가르칩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보혈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해주셨고 우리가 그 사실을 믿어 그분과 결속하면 우리도 어떤 죄든지 사함을 받고 정결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기에 위대한 곳입니다.
5. 교회는, 은혜가 있습니다.
66절,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더라”
성전 낙성식에 참석해서 은혜 받고 돌아가는 백성들 마음이 즐겁습니다. 은혜로 덮어줌을 받고 은혜로 용서함을 받고 은혜로 죄사함 누리니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우편그늘이 되어주시니 감사한 것입니다. 성전에서 두고두고 누릴 은혜와 축복들을 생각하니 새로 건축된 성전을 바라보며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던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곳입니다. 교회가 은혜가 흘러야 합니다. 은혜의 눈으로 서로를 용서하며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남들의 허물을 묻어줄 있는 은혜의 무덤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의 기독교, 은혜의 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미스터 션사인’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었습니다. 신미양요(1871년) 때 군함에 승선해 미국에 떨어진 한 소년이 미국 군인 신분으로 자신을 버린 조국인 조선으로 돌아와 주둔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드라마입니다. 천민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는 맞아죽고 어머니는 정절을 지키려고 우물에 빠져 죽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마음에 조국에 대한 증오, 원수들에 대한 보복심으로 마음이 얼어붙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에 뿌리처럼 내린 자화상이 있습니다. 그를 구해준 요셉 선교사는 항상 그에게 ‘위대하고 존귀한 사람 유진, 나의 아들’이라고 불러줍니다. 편지마다 그렇게 불러줍니다. 이런 정체성이 최유진에게 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여염집 규수를 만납니다. 왕의 스승인 대감집 손녀입니다. 천민과 양반가문! 뛰어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입니다.
그러나 최유진은 위대하고 존귀한 사람이라는 선교사의 말에 자신감을 갖고 고애신에게 다가갑니다. 그는 다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또한 신분의 차이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여인에게 ‘차이’에 대한 의견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 세상에 차이는 분명 존재하오. 힘의 차이. 견해 차이. 신분의 차이. 그건 그대의 잘못이 아니오. 물론 나의 잘못도 아니고.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진 것뿐이오.”
그리고 한 여인의 불꽃을 피워주기 위해, 그렇게 비웠던 조선독립이라는 위대한 꿈을위해 자신을 버립니다. 그는 천민의 신분이지만 위대하고 존귀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한 선교사가 만들어준 아름다운 정체성입니다. 그 정체성에 맞게 션사인(sunshine)-찬란한 햇빛으로, 한 여인에게 사랑을 알려주고 행복을 알려준 햇살로 빛나다 간 것입니다. 정체성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결론
병원은 크고 유명하다고 꼭 좋은 것은 아니고 작다고 해서 시시한 병원, 시시한 의사는 아닙니다. 병원은 내 병이 나으면 크던 작던 좋은 병원이요 고마운 의사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은 요단강이 작다고 우습에 여겼습니다. 본인이 병을 고침 받고 체험을 했을 때 요단강은 그에게는 세계 최고의 강이요 좋은 강이요 어머니의 강입니다. 그의 나병을 고쳐준 강이 세상에 어디에 있고 어떤 종교가 있었습니까? 어느 선지자가 고쳐주었습니까?
요단강이 고쳐주었나요? 선지자가 고쳐주었나요? 그는 요단강에 감사하지 않았고 요단강물의 신에게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국교회가 비웃음을 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구약성전의 5대기능이 있어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처럼 성전 안을 채운 성소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항상 깨끗해야만 교회로 인정하고 싶어합니다. 제 구실을 못하면 교회가 아니라 합니다. 교회의 제 구실이 무엇입니까? 사회봉사, 소금과 빛의 역할, 인권문제⋯ 이런 것입니까? 이런 것에 너무 치중하면 종교 중의 하나로 평준화되며 그건 아람나라의 여러 강물 중의 하나가 되며 종교 중의 하나가 됩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 규모나 신자들 숫자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이 자기네 강보다 작다고 깔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큰 강에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작다고 깔보았던 요단강에서 치유와 회복이 나타났습니다.
한국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었다 해도 교회만이 갖고 있는 귀한 기능을 기대하면서 비판과 실망보다는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자체로서 위대한 곳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하여 오는 은총과 은혜들을 두루 누리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악기가 되라!(로마서 6:12~14) (2) | 2023.09.19 |
---|---|
할 수 있다! 이 말의 믿음은?(빌립보서 4:10~13) (0) | 2023.09.19 |
몸이 성전이다(8)-발(이사야서 52:7-10) (3) | 2023.09.18 |
몸이 성전이다(7)-혈관(레위기 17:10~14) (1) | 2023.09.18 |
몸이 성전이다(6)-근육(디모데전서 4:6~8) (1) | 2023.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