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코헬레트입니다!
전도서 1장 1~11절
서론
멕시코만(灣)에서 고기잡이를 업(業)으로 살아가는 산티아고 노인은 84일을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하다가 85일째 되는 날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듯한 엄청난 고기를 잡습니다. 나룻배보다 2피트나 더 큰 엄청난 대어(大漁)를 낚았을 때는 너무 놀랐고 언론에 대서특필될 생각으로 꿈에 부풀었습니다. 팔자가 편 것입니다. 그래서 금의환향하는 심정으로 의기양양하게 포구로 돌아왔는데 세상에~ 고기는 뼈만 남은 것입니다. 뒤따르던 상어 떼가 다 뜯어먹어 뼈만 남았습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꿈도 크고 성공이 컸던 만큼 허무함과 낙심도 컸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아시지요?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 작품 <바다와 노인>,노벨상문학상을 받은 대단한 작품입니다. 노벨문학상심사위원회는 대단한 분량의 소설이 아님에도 왜 이 작가에게 영광을 안겨주었을까요? 인간의 덧없음을 잘 그려낸 것입니다. 85일 만에 얻은 성공-그러나 하루를 넘기지 못한 행운, 이것이 인생입니다. 헤밍웨이는 인생의 그 덧없음을 이기지 못했기에 끝내 권총자살로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전도서는 사람들에게 인생이 무엇이며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 를 보여줍니다.
2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인생이 헛되도다, 5회나 나옵니다. 한 절에 5회나 나오는 성경구절은 없습니다.
인생이 무엇이더냐, ‘헛된 것들 중의 헛된 것’ 그런 말입니다. 인생의 헛됨을 노래하는 허무가 전도서! 그러나 전도서가 허무로 출발하고 허무를 노래하지만 전부가 아닙니다. 인생의 허무를 논하면서 허무를 극복하는 길도 보여줍니다. 의사는 병명을 알려주고 환자의 노력을 요합니다. 그래야 치료가 됩니다. 병명이나 원인을 알려주지 않고 병을 고치려면 좋은 의사는 아닙니다.
허무감 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에게는 허무가 인생의 실제임을 알려주고 다음에 허무감을 극복하는 처방약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서입니다. 사람은 원하던 목적을 이룬 후에 허탈하고 성공 후에 허무함이 들고 인생 황혼기에 그 허무감은 최고조로 오릅니다. 인생을 다 살고나면 뿌듯하고 자기가 남긴 업적으로 보람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인생이 참 덧없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바로 이런 감정을 극복하게 합니다.
성경에 인생의 허무를 말하는 단어들이 나옵니다. '헛됨'이라는 히브리어 원어는 “호흡‘ ’바람‘ ’안개‘를 뜻합니다.
이사야는, “인생이 코에 있다!” 생명이 돈이나 권력에 있는 게 아니라 숨 안 쉬면 끝이다, 인생은 그렇게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14절, “인생은 바람과 같다”
인생이 사는 것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바람을 잡는 것 같지만 손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뭔가 잡은 것 같지만 결국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인생은 안개와 같다”
-안개라는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이처럼 인생을 호흡, 바람, 안개로 표현했는데 공통점은 ‘일시적인 것’ ‘짧음’ ‘덧없음’, 어느 날 문득 “어느새 늙어버렸네” 라는 탄식이 나오면 그때부터 허무감, 허무병에 시달립니다.
화가들은 인생의 허무감을 표현할 때 만개(滿開)된 화사한 꽃을 그렸습니다. 허무함이라면 흰머리에 이빨 빠지고 등 굽고 지팡이 짚고 석양을 향해 걸어가는 노인의 모습을 그려야 할텐데 화가들은 왜 화사하게 피어있는 꽃,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꽃으로 허무함을 표현할까요?
아름다운 꽃이 왜 허무의 상징일까요? 아름다웠기에, 화사했기에 지고 나면 더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인일수록 더 허무하고 대통령은 권력이 사라졌을 때 더 허무하고 부자들이 제대로 돈도 못쓰고 죽어야 할 때 그 허무감은 더 심각하기에 화사한 꽃으로 표현했을 것입니다.
남자는 무르익은 장년에 허무함에 노출됩니다. 정년과 은퇴로 일을 놓고 쉬게 되면 그때부터 허무함에 시달리게 됩니다. 아내도 밖으로 돌고 아이들도 나가버리고 집을 지킴이 신세로 전락하면 인생무상이라는 허무병에 걸립니다.
여인들은 남편을 출세시키고 아이들이 출가한 후에 허무감에 걸립니다. 역할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역할이 사라졌다는 것은 존재의 이유도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청소년이나 아이들도 허무감에 걸립니다. 그래서 동반자살이 있고 마약이나 컴퓨터중독으로 몸을 망가뜨려 버립니다. 한때 유행처럼 번지던 사회지도층의 한강 투신자살은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보여줍니다.
아담이 첫아들을 낳고 이름을 ‘가인’이라 했습니다. 가인-‘얻었다’ ‘아들을 얻었다’입니다. 불순종으로 죽을 몸이지만 죽지 않고 살아나서 하나님께 아들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즐거운 마음을 표현하는 심정으로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즐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둘째 아들 아벨의 뜻이 ‘허무’ ‘공허’입니다. 첫 아들로 기뻐했지만 자식 키우고 땅을 파면서 수고하게 되었을 때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둘째를 ‘허무’라, 인생의 덧없음을 예견했습니다. 둘째가 형의 손에 죽었을 때 부모는 인생의 허무함을 더 느꼈을 것입니다.
영화 <시티 오브 엔젤>에서 천사가 여의사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사랑과 행복은 하룻밤에 불과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맛있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자전거로 시장을 보고 오던 여인은 트럭에 부딪쳐 죽고 맙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여인을 위해서 천사의 영생을 포기했는데 오히려 여인은 죽었으니 인생의 허무입니다.
이 모든 인생과 문학과 미술과 예술의 주제를 종합해서 전도자는 “인생은 헛되고 헛되고…”를 말하면서 인생에서 허무(虛無)라는 적을 물리치지 않고서는, 손에 잡는 어떤 것도 인생을 성공적으로 만들 수 없다 합니다. 그러면서 허무감 극복대안제시가 전도서입니다.
전도서 저자는 자신을 1절, ‘예루살렘 왕 전도자’라 합니다. 전도자는 히브리어로 ‘코헬레트’, 일종의 직책으로 ‘회중에게 이야기하는 자’ 전도자, 설교자, 대변인입니다. 코헬레트는 무엇을 설교하며 전도하며 대변하는가? 허무를 극복하는 길이 예루살렘에 있음을 설교하는 자입니다.
솔로몬 당시에 많은 주변 국가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방문 목적이 각각이었겠지요? 군대 조직을 배우려는 왕, 건축에 관심 있는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살펴보고 그런 신전을 지으려 했겠지요. 시바 여왕은 궁중의 예절과 규모를 배우려 왔을 것이고, 솔로몬에게 딸을 준 이방 왕들은 딸을 보려고 왔겠지요.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거나 영토 확장의 비결을 탐색하기 위해 찾아온 왕이나 사절단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방문객들이 찾아 올 때 솔로몬은 자신의 역할을 잘 알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의 코헬레트다, 세상 사람에게 하나님을 대변하는 대변자이고 하나님을 설교하는 설교자, 하나님을 전도하는 전도자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인생의 허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왜 이곳에 왔는가? 건축술을 배우기 위해? 권력을 쥐는 법을 배우기 위해? 나처럼 부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많은 여성들에게 매력 있는 남자가 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솔로몬은 말합니다.
2절, “그것은 다 헛된 일이다.”
14절, “그것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3절,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것을 다 부질없는 일이다!”
2:11, 내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들이 다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헛됨을 널리 전하는 니힐리스트(nihilist), 허무주의자가 아닙니다. 이 허무를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허무를 극복하지 않으면 당신의 권력이 무상하고 돈들이 당신을 더 바보로 만들고 여인들의 사랑과 그들을 소유했던 인생은 일장춘몽에 불과하다,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에서 권력과 궁중 예의와 강대국을 만드는 것을 살펴보기 전에 당신의 허무를 극복하는 비결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 왕의 허무, 여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살았던 남자들의 허무를 극복하는 길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1절에서 자신의 이름을 익명으로 합니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이것은 예루살렘의 왕은 바로 코헬레트의 직책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왕은 단순히 강대국을 만드는 정치가가 아니라 인생의 덧없음과 하나님만이 영원하고 그 안에서 영생하는 법과 허무를 극복하는 법을 세상에 알려주는 코헬레트의 사명으로 왕의 직분을 수행하라고 가깝게는 아들 르호보암에게, 멀리는 이스라엘의 후대 왕에게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인가요? 교회를 찾는 자들에게 교회는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결? 축복을 받는 비결? 성공하는 비결? 그것보다 교회는 코헬레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인생은 덧없는 것, 인생은 유한한 것, 인생은 안개와 같은 것-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만이 영생이고 인생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교회는 그 사실을 알려주는 설교자, 전도자, 대변자, 즉 코헬레트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만이 아니라 모두가 코헬레트의 사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를 통해 허무가 극복되고 하나님으로 영생을 기뻐합니다. 그걸 위해 늘빛교회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코헬레트 솔로몬은 방문객들에게 말합니다.
4절,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인생의 어떤 교훈을 전합니까?
-자기인생의 무대에서 제 역할들 잘 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한다, 당신들의 권력도 영원하지 못하다, 나와 당신들의 세대는 가고 우리 후대의 세대가 온다, 오늘이 내일에는 과거가 된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순환을 모르고 영원히 권력을 누리려 하고 무대에서 내려와야 할 때에도 주인공을 독차지하려는 심뽀가 결국 허무함에 빠지는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땅은 인생의 무대입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고… “한 세대”-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무대입니다. 이 무대가 막을 내리면 다시는 오를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무대에 있는 동안에 자기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방문객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의 역할은 무엇인가? 당신은 왕이잖은가? 그렇다고 당신이 통치하는 국가가 당신의 개인 소유물로 알아서는 안 된다! 당신의 왕국은 당신의 무대일 뿐이다, 그 무대에서 당신의 역할은 무엇인가? 언젠가는 당신의 무대에서 내려올 날이 온다, 당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역할이 무엇인가? 그것을 알고 예루살렘을 떠나라! 그러면 당신은 최고의 답을 얻고 가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을 말해주고 있는 책이 <전도서>입니다.
-무대에서 내려올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허무함에 빠지지 않으려면 인생의 무대에서 나의 역할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무대에는 주인공이 있고 조연들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연기를 잘 해야 합니다. 조연은 조연대로 주인공들을 세워주면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작품도 살고 주인공도 세워주고 자신의 역할도 빛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나름대로 주인공이 되어 살아왔습니다. 학교에서 당신은 우등생일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 사회에서 사람들이 당신 주변에 있었습니다. 모두들 성공했다고 우러러 보았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역시 그랬습니다. 당신들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당신들은 무대에서 내려오는 날이 옵니다. 무대에서 내려오고 허무하다고, 헛살았다고, 교회가 비정하다고 허무한 심정으로 울분을 삭히지 마세요.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옵니다. 무대에 올라설 때가 있고 내려올 때가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내 무대입니다. 내 직책이 내 무대고 사는 현장이 내 무대입니다. 현재는 내 무대가 설교단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회중석에서 설교를 듣는 날이 옵니다. 지금은 내가 지휘하고 반주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회중석에 앉아있을 때가 옵니다.
그 때 인생의 무상함을 슬퍼하겠습니까? 야속한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부장에서 물러났다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고 방관자가 되고 허무함을 토로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때 우리는 나름대로의 역할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금 무대에서 감동을 주는 연기를 해야 합니다. 역할은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 조연도 되지만 뭔가 특별한 캐릭터를 만들어내 합니다.
자신의 배역을 알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 존재도 모릅니다.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관계를 일생의 과제로 설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안 되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흔들리게 되고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자를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먹여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된 일만 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었습니다. 세상 성공이 그가 맞춘 다이얼이 아니고 하나님이 중심이었기에 33세의 짧은 생애였지만 허무한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생애입니다.
예루살렘을 찾은 방문객들이 하나님을 찾게 되면 자신의 배역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부름 받은 삶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몰랐기에 좇아다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쫓기는 삶이고 인생의 허무함입니다. 그러나 부름 받은 삶으로 자신의 인생 궤적을 바르게 세우게 되면 허무라는 병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 인생의 무대에서 자기 역할을 잘 감당하고 다른 무대에서 또 거기에 맞는 역할을 잘 감당하면 우리도 죽음 앞에서 다 이루었다! 허무를 극복하는 선언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결론
8절에, 만물이 피곤하다⋯.
만물이 기다리는 것은, 누가 멋진 연기를 하나? 그걸 기다렸지만 만물은 피곤합니다. 왜? 사람들 하는 짓이 너무 형편없는 것입니다. 제 역할은 하지 않고 남들 헐뜯고, 고집 부리고, 남이 연기를 부러워하고… 그래서 내 연기가 재미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결과가 나오기 전에 허무하지 않게하실 하나님을 늘 기억하며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라틴어로 “메민토 모리”입니다. 고대로마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의 뒤에 노예 한 명을 세워 장군의 귓가에 속삭이던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쏟아지는 찬사에 도취된 장군에게 오만함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노예를 시켜 이렇게 말하도록 했습니다.
“당신도 한낮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하시오! 사후를 잊지 마시오!”
지금 예루살렘의 코헬레트가 말합니다. 기억하시오! 인생이 헛됨을! 당신도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12장 13, 14절 결론을 봅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하나님은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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