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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아버지는 달린다!(누가복음 15:11~24)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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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고서적에서

 

아버지는 달린다!

누가복음 15장 11~24절

서론

본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내용 자체도 유명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화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을 통해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설교학 교수들은 웬만하면 탕자의 비유를 설교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무도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청중들이 은혜를 받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탕자의 비유를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1. 둘째아들, 떠난 탕자가 되다!

여기에 형은 나름대로 괜찮은 사람이고 동생은 나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12,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신명기 법전의 재산 상속의 율법은 재산 상속시 장자에게 재산의 2/3, 차자에게 1/3을 나누어 주도록 규정합니다(21:17). 그러나 재산상속은 아버지의 임종(臨終)이 임박할 때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 관습입니다. 아버지가 팔팔할 때 재산상속을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심하게는 재산을 분배해 주고 빨리 죽으시오! 하는 무언의 반항입니다. 그렇다면 둘째아들의 요구는 관례에 어긋납니다. 아버지 가슴에 상처를 남겼습니다.

 

둘째아들은 죽겠다 살겠다, 하면서 재산을 나눠받았습니다. 유대풍습은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재산을 물려받았을 경우 상속자는 임의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장사해서 이익금을 남겨도 그 이익들을 제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돌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둘째아들은 분배받은 재산을 어떻게 했나요? 13절입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거두어들이다’. 돈 되는 것은 숟가락 하나까지 챙기는 욕심을 보입니다. 아버지 심정이나 형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압니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다 모았다는 말은 헌금으로 바꾼다’. 보란 듯이 부동산을 몽땅 처리합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처리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심정이나 체면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불효막심한 행동입니다.

 

먼 나라에 가서. 3분의 1을 상속했으면 그만큼 아버지에 대한 부양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부양이 싫어서, 이익금을 드리기 싫어 먼 곳으로 사라집니다.

거기다, 며칠이 안 되어. 속전속결입니다. 참 야속한 아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집을 떠났으면 이윤을 남기는 장사를 해야 하는데 그 인간성이 어디 갑니까?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영어성경에는, wild living, ‘거친 삶을 사는 것이라 표현합니다.

돈 버는 것은 어렵고 쓰는 것은 쉽지요. 공짜유산은 아까운 줄을 모릅니다. 금방 거덜납니다.

 

14, 다 없앤 후에. 쫄딱 망한 것입니다. 흉년까지 들자 그의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15,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유대인에게 돼지는 불결한 짐승 중의 하나입니다(11:7). 따라서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을 뿐더러 돼지를 치는 것조차 꺼려하며 천시하였습니다.

 

16, 쥐엄 열매로. 열매가 약간 단데 가축 사료로 사용되며 흉년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 대용도 했습니다. 둘째아들은 배불리 먹지 못하는 최저생계자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인생이 참으로 비참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의 권위와 명예를 추락시키고 재산을 없앴으며 형과의 관계가 파괴됨으로 가정은 깨어졌습니다. 가정이 망가졌으면 성공해야 하는데 완전 쫄딱 망한 것입니다. 나쁜 새끼입니다! 

2. 큰아들, 남은 탕자가 되다.

둘째에 비하면 장남은 어떤가요? 온순하고 성실한 모범생입니다.

큰아들은 재산상속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집과 재산을 지켰습니다.

 

29,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종처럼 섬겼다! 고분고분, 순종파입니다.

 

29, 그것도 여러 해. 동생이 거지꼴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던 날도 큰아들은,

 

25, 맏아들은 밭에 나가 그 시간까지 노동을 했습니다.

 

나무랄 데 없는 아들이요 아버지의 자랑거리입니다. 그러나 자기 밖에 모르는 마음은 동생과 동일합니다. 동생이 방탕했다면 형은 인색합니다. 동생은 호탕한 남자라면, 형은 쫀쫀한 남자입니다. 동생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잔치를 베풉니다.

 

22,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잔치가 얼마나 크던지,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큰아들은 종을 불러 묻습니다. 도대체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관대한 형이면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집을 떠났던 아우가 돌아온 것입니다. 너무 기뻐하며 아버지가 베푼 잔치를 즐겼겠지요. 그 대신 큰아들은 뚜껑이 열립니다. 아버지에게 따집니다.

 

27, 건강한 그를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 돈을 쓰고 허랑방탕하면서 고생도 하지 않는 놈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30, 창녀들과 놀기 바쁜 놈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29, 자기와 벗들을 위해서는 이런 잔치를 베풀어 준 적이 없다!

 

30, 살진 송아지. 잔치도 최고급 고기로 열어주었다!

 

그래서 28, 노하여. 원어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다’. 우리말로는 화가 나서 식식거렸다! 일시적으로 격양(激昻)된 감정에서 나온 화가 아니라 깊이 쌓인 분노와 노여움입니다. 잔치자리에 낄 생각이 없다는 것이고 동생도 자신의 삶에 끼어 들어옴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누가 나은가요? 남편이라면 누굴 택하겠나요? 화끈한 둘째아들? 쪼잔한 큰아들? 사윗감이면? 방탕한 둘째아들? 일밖에 모르는 큰아들? 친구라면 누구를 택하겠나요? 창기들과 벗하는, 놀기 좋은 친구 둘째아들? 한 번도 잔치라고는 죽어라 모르고 일만 하는 큰아들?

 

아버지에게는 둘째가 좋은 아들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아버지 권위를 뭉개버리고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와 집안 망신시키는 작은아들은 절대 좋은 아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큰아들도 아닙니다. 동생도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동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걱정하고 기다리던 그 마음을 알았다면 어떻게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는데 잔칫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대문에서 버티며 아버지에게 따지며 잔치를 부정할 수 있나요? 그렇게 바른생활 아들에게서 융통성이 없는 모습에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최고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의 기준에서는 실격된 아들들입니다.

3. 아버지, 두 탕자 모두 사랑하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이 돌아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20,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달려가, 그래서 오늘의 설교제목은, “아버지는 달린다!”

왜 달렸을까요? 멀리서 보아도 아들 행색이 초라합니다. 쫄딱 망한 거예요! 그래서 거지꼴로 들어오지 못하게! 남들 눈에 창피하니 성공하기 전에는 못 들어온다고 당장 꺼지라고! 너 때문에 당한 망신을 생각하면 꼴도 보기 싫다고 그래서 쫓아내려고 아버지는 달렸을까요?

 

20,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도 거리가 먼데 멀리 떨어진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매일갈이 아들을 기대하며 먼 거리를 살폈다는 것입니다. 멀리서 보니 아들은 너무도 초라합니다. 금의환향이 아니라 쫄딱 망하고 갈 곳 없고 받아주는 사람 없어 집에 기어들어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잘못했다는 말을 듣기도 전에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모습에 측은함을 느낍니다. 도와주지 않으면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게 된 상태, 내장을 쥐어짜는 연민의 부성애(父性愛)입니다.

 

동양의 경우 아무리 급할 때도 연장자들은 달려 나가지 않습니다. 특히 당시 상류층 사람들은 전쟁이 아니면 뛰지 않습니다. 뛰는 일은 어린소년이나 종들이나 하는 품위 없는 행위입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더 그랬습니다. 그들은 신중하게 발걸음 떼어놓으며 체통 있게 걸었습니다.

 

특히 중동지역의 문화에서는 달음박질하는 아버지의 행위는 방정맞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아랍어 성경번역자들은 아버지가 달렸다! 하지 않고 아버지가 서둘렀다” “아버지가 출두했다 라고 짐짓 권위 있게 아버지의 달리는 행동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표현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달렸다! 아버지는 종을 보내어 아들을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맞으러 달려갑니다. 달렸다, 빠른 걸음이 아니라 운동경기를 하듯이 질주합니다. 아버지는 겉옷자락을 추켜올리고 품위가 있건 없건 누가 보던 말든 달립니다. 아들을 보는 순간 아버지는 그냥 기다려서도 안 되고! 걸어서 마중 나가서도 안 되고 달려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마을사람들에게서 순전히 아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아들은 마을을 지나옵니다. 찌질하고 피곤한 모습, 옷차림 기름기 흐르던 얼굴에는 노숙자의 행색이 보입니다. 마을사람들은 그런 아들을 흉보고 손가락질 하겠지요. 아이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놀려댈 것입니다. 여인들은 풍겨오는 냄새에 코를 막을 것입니다. 개조차 남루한 옷을 물고 찢으며 짖어댈 것입니다. 입구에서 아버지의 집까지는 사실 몇 백 미터에 불과했지만 쫄딱 망하고 돌아오는 아들에게는 예루살렘 성안 빌라도관정에서 골고다까지 십자가 지고 조롱과 모욕과 채찍에 맞으며 걸어야 했던 그 길만큼이나 길고 멀고 수치스러운 길입니다.

 

보나마나 망신을 당할 아들을 그냥 놔둘 수가 없습니다. ! 내 아들이니까! 아들이 망가지고 추잡하고 마약하고 술주정뱅이고 무엇에 중독된 인생이라도 내 아들입니다. 

내가 보호해주어야 할 아들입니다. 배고파서 외로워서 좋았던 날들을 그리워하며 집이라고 찾아오는 내 아들이기에 아들의 돌아오는 길은 내가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에서 아들을 보호해 주는 것은 아버지의 역할이자 책임입니다. 비록 아버지의 명예와 권위를 실추시키는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끝까지 책임을 져주어야 할 사랑스런 아들입니다.

 

그런 아들이 조롱당하고 놀림거리가 될까봐 사람들 눈에 띄기 전에, 조롱 받기 전에 보호해 주려고 체면이고 체통이고 상관하지 않고 아버지는 달리고 또 달린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를 보면서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 자비와 긍휼을 읽고 그 안으로 들어옵니다. 백 마디 말보다는 달려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더 이상 그 아버지를 배신할 수 없는 큰 사랑의 흔적, 용서의 흔적을 아들은 몸 안에 새겨둘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너무 크기에 이후에도 마을 누구라도 그 아들을 업신여기거나 수군거리며 뒷담화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잣집 영감님이 버선발로(?) 달려 나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영접했던 아들입니다. 그러니 누가 그 아들을 흉보겠습니까? 아들의 신분을 완벽하게 보호해 주는 아버지의 속 깊은 마음과 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늘아버지의 사랑이며 용서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눈물을 흘려보기 전까지는 아직도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탕자의 삶으로 살아버립니다.

 

큰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요? 집을 떠났던 동생이 돌아오면 형은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큰아들에게 묻지도 않고 덥석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잔치가 사달이 날 판입니다. 큰아들이 노발대발한 것입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대문에서 버티고 안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동생이 다시 떠나든 아니면 내가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당황하고 화가 나서 야단도 치겠지요?

 

이런 썩을(?) 놈이 있어?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이 살아 돌아왔으면 오히려 더 춤추며 잔치를 주도해야지? 너는 형이잖아!”

아버지는 야단을 치지 않습니다. 28,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큰아들을 달랩니다. 작은아들이 돌아왔을 때도 아버지의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입니다. 동생을 위한 페스티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큰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마음도 역시 측은지심입니다. 큰아들을 이해합니다. 그러고 보니 큰놈 위해 잔치 한번 제대로 열어주지 못했구나! 큰놈에게 미리 물어보고 잔치해도 늦지 않았는데 내 마음이 큰놈 마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큰애가 섭섭할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아들을 달랩니다.

 

31, 내 것이 다 네 것이잖니? 네 수고를 내가 왜 모르겠니? 대문에서 버티고 있는 큰아들을 껴안고 들어가자 합니다. 아들을 달랩니다. 작은아들에게 했던 모양과 꼭 같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이 큰아들의 마음을 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된 큰아들! 잔치를 열어준 적이 없기에 무정한 아버지라 생각했는데 내 재산이 다 네 것이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재산을 물려주어도 안심이 될 믿음직한 아들로 신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 큰아들은 동생을 받아들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 측은지심이 두 아들을 모두 살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탕자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작은아들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주인공이었던 것입니다.

결론

탕자 이야기는 기독교의 핵심교리입니다. 집을 떠나갔던 탕자가 눈물을 질질 흘리며 아버지, , 왔어요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탕자를 사랑하시는 하늘아버지의 러브스토리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나, 를 말해줍니다. 구원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있습니다. 그래서 탕자 이야기는 아버지가 주인공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용서의 열매입니다.

 

지금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집을 떠난 들토끼 작은아들입니까? 그래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헤매는 중입니까? 아니면 집을 떠난 적이 없는 집토끼 큰아들입니까? 그러면서도 정작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의무감에서 교회생활을 하는 큰아들믿음은 아닙니까?

 

달려오시는 아버지! 우리가 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저기에서 달려오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되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 아들이라, 죽었던 내 아들이 살아왔다고 춤추실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야 합니다. 하늘아버지의 사랑과 용서를 믿고 달려 나갈 때 우리 앞에도 잔치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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