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만큼 나이에 맞게 산다!
욥기 35장 9~11절
서론
기독교 2천년, 고대 근동의 작은 땅 가나안에서 출발했지만 단 기간에 로마제국을 복음화하면서 세계 최고의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종교이기에 가능했습니다. 불교(BC563년)는 우리보다 500여 년 전에 시작되었지만 산중에 들어가서 자기수행, 자기공부는 많이 했지만 소위 중생들을 교육시키지 못했습니다. 유교(BC551년)는 선비교육, 후생교육은 많이 했지만 권력 유지를 위한 특권교육이었기에 유교의 대중화, 세계화를 이루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는 교회가 태동된 날부터 교육에 힘썼습니다. 성령을 받고 교회가 되던 날 사도들은 가르쳤고 신자들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행 2:42). 이때부터 교육은 기독교의 핵심이 됩니다.
1. 나이 값 교육
유대인들과 초대교회는 아동교육을 별도로 하지 못했지만 1769년 영국의 출판업자 로버트 레잌스가 산업혁명으로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한 아이들을 모아 성경의 초보, 도덕교육, 읽기·쓰기·셈하기를 위해 주일학교를 개설하면서 교육으로 교회부흥은 물론 인재들을 키워냈습니다.
그러기에 좋은 기독교인이 되려면 잘 배우고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삶을 이해하는 지식을 배우고 타인을 세워주는 교육을 배워야 합니다. 남을 배려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한국인의 자녀교육은 유대인과 함께 세계 최고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신년교두에서 자녀교육에 목숨을 거는 한국 엄마들을 본받으라고 할 정도입니다. 한국부모의 자녀교육열은 한 마디로 못 말려~입니다. 학원비, 과외비 벌려고 부장급 ‘사모님’이 파출부로 뛸 정도입니다. 자녀들의 우유를 선택하는 것만 봐도 엄마들의 교육열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첫 아들. 어떻게 키우고 성공시킬까? 세계적으로 유명하라고 ‘아인슈타인우유’를 먹이며 키웠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는데 영 아니에요! 세계적 인물은 못 될 거 같아요. 그래서 서울대학교라도 가라고 ‘서울우유’로 바꾸었습니다. 중학교를 가니 서울대학도도 힘든 성적입니다. 아쉽지만 한 단계 낮춰 ‘연세우유’로 바꿨습니다. 중학교 상급학년에 성적 보니 연세대학교는 택도 없어요. 마음을 비우고 낮춰 건국대학교라도 가라고 ‘건국우유’를 먹였어요. 이놈이 고등학생이 되어 공부하는 것을 보니 건국대학교 근처도 못가요. 우유를 또 바꿉니다. 어느 우유로? 저어~쪽 지방에 있는 대학이라도 붙어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저지방우유’로 바꾸었습니다.
이게 말이나 되요? 우유와 대학이 상관이 없음을 알면서도 남편이고 시부모고 일단은 제쳐두고 자식에게 올인합니다. 배운 여성이나 덜 배운 여성이나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은 같습니다.
그런 자녀사랑으로 자식들도 그만큼 노력해서 성공했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행복할까요? 자녀들 행복이 나의 행복까지 보장해줄까요? 제대로 정리가 안 되면 짝사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걸 자녀들이 떠나고서야 알게 되면 빈둥지증후군이 나타납니다. 남편은 옆에 있지만 오히려 버겁습니다. 부부간에 관심도 없어지고, 지루합니다. 큰싸움은 없지만 갈등이 습관화됩니다. 걸핏하면 싸우는데 그게 싸움인지 잔소리인지⋯ 그냥저냥 삽니다. 보기에는 갈등이 없어 보이지만 재미도 없고 웃을 일이 사라집니다. 빈둥지 인생이 허~한 것이지요! 직장에서 은퇴하고 부장님 과장님⋯ 계급이 떨어지면 인생에 빈둥지가 됩니다.
교인들은 다른가요? 직분에서 은퇴하고 일을 놓으면 믿음까지 ‘맥까리’가 없어요! 늙어가면서 익어가고 존경의 대상이어야 하는데⋯ 처량하게 교회생활하고 신앙을 겨우 연명합니다.
목사님들도 교회에 올인합니다. 가정도 없어요! 취미생활이라고는 전무합니다. 은퇴하고 보니 노회에서도 소외됩니다. 돈이라도 있어야 실버인생 사는데 돈도 없어요. 그래서 초라하게, 추레하게 보냅니다. 왕년의 빛나던 설교자의 위용은 어디로 갔나요?
왜 그럴까요? 그동안 자기를 성장시키지 못해서 그래요! 목회의 빈둥지가 찾아왔을 때 어떻게 처신하고 긴 세월 어떻게 보내야 하나, 늘 배워야 하는데 은퇴준비가 겨우 돈입니다.
갈렙의 별명은 ‘성장하는 노인’, 얼마나 멋진 별명입니까? 늙지 않고 성장하는 것은 익어가는 것입니다. 계속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성장시키는 배움의 마인드가 될 때 가능한 별명입니다. 늦게까지 대학을 전전하는 분들, 어떻게 보면 대단하고 어떻게 보면 시간낭비 같아요! 나이에 맞는 것을 배워야 하는데⋯ 전문지식이나 배우고 있으니, 인생의 빈둥지가 왔을 때 그런 지식이 나를 지탱해 줄 수 있을까요? 지혜를 배워야 할 나이에 지식을 배우니 시간낭비입니다.
2. 낮의 교육
욥의 친구 엘리후는 인생을 교육시키시며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10절,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
밤중의 노래~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시각장애인과 시력 좋은 분, 누가 배움이 쉬운가요? 듣지 못하는 분과 듣는 분 중에 누가 배움이 쉬운가요? 당연히 건강한 분들이 배움에 유리합니다. 신체장애를 뛰어넘고 인생 승자가 되려면 열배 스무 배⋯ 더 많은 눈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의 배움도 그래요! 언제 배우는 것이 좋은가요? 낮과 같은 때에, 살만하고, 젊었을 때 큰 걱정이 없을 때 그 때 배워야 합니다. 인생이 늙고 삶이 힘들 때 배우려면 이중으로 힘들어요! 있을 때 잘해~ 그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좋을 때~ 제 나이를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금 욥을 보세요! 인생의 큰 타격을 받은 것입니다. 아들 일곱 딸 셋, 한 날에 죽었어요, 재산을 빼앗겼지요, 온 몸에 병으로 꼴이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부인이 죽으라 했겠어요? 너무 안 되니까 그런 겁니다. 친구들도 찾아왔다가 말도 못하고 칠일 밤낮을 울면서 아무런 위로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고난의 당사자 욥은 어떤가요? 1장!
21절,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22절,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부인이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악담을 하니 욥이 2장에서는 이렇게 답합니다.
10절,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와~ 대단한 믿음입니다. 누구에게서 배운 믿음이에요? 당연히 하나님에게서 배웠습니다.
1:1, “우스 땅에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언제 배운 거예요? 지금 고난 가운데서 배우는 거 아닙니다. 평안할 때 배웠습니다. 자식들이 잘 나갈 때, 재산이 불어날 때, 명예가 빛나고 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운 거예요!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알몸이 그리로 돌아간다는 것⋯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라는 것⋯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면 화를 받는 날도 있다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은 찬송을 받아야 한다는 것⋯
이걸 언제 배웠어요? 좋은 날! 잘 나갈 때! 밝고 찬란한 대낮에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거예요! 대낮에 잘 배워두었고, 평안한 가운데 믿음을 연단하고 언제 무슨 일이 있든지 유비무환의 자세로 준비했습니다. 좋을 때 신앙의 근력(筋力)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욥이 번영신학에만 물들어 돈 버느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면 눈물의 밤이 왔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하고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평안한 때 바르게 배웠고 대낮에서도 하나님과 격조가 높은 인생에 대해 배움의 끈을 놓치지 않았기에 어둠의 시련에서도 이겨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건강하고 잘 나갈 때는 하나님을 묵상함이 약해요! 그때 편안한 마음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준비해야 하는데 그냥 즐겨요! 그러다보니 배움을 통해 믿음의 근력(筋力)을 만들어 내는데 실패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가정의 빈둥지, 인생의 빈둥지가 되고 맙니다. 업적과 사역에서도 빈둥지가 됩니다. 인생이 허~ 하면 그럴 껄~ 저럴걸! 후회합니다.
저도 늘 은퇴이후를 생각합니다. 제가 누리는 목회의 삶은 정상급입니다. 교회에서는 항상 주인공 역할을 했습니다. 언젠가는 무대에서 내려오고 조연이 아니라 엑스트라가 되는 날이 옵니다. 목회빈둥지입니다. 그 빈둥지에 다섯 개 정도를 준비합니다. 설교에 대한 빈둥지가 크기에 <강정훈 말씀닷컴>을 운영 중입니다. 강단이 없을 때도 계속 설교하기 위함입니다. 글을 쓰고 돈을 저축했다 늘빛교회 나오지 못하는 주일에는 농어촌교회를 다니며 10만원씩 헌금하고 다니려 합니다. 추레하고 초라해 지는 빈둥지가 아니라 노년의 품격유지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언제? 해 있을 때~ 지금 잘 될 때⋯. 웰빙에서 웰다잉 준비해야지 죽음 앞에서 웰다잉은 너무 늦습니다. 자기 나이를 인정하며 웰빙의 삶을 살려면 밝을 때 준비해야 합니다.
3. 밤의 교육
다시 욥의 친구 엘리후의 말을 상기해 봅시다.
10절,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때때로 밤에 교육하십니다. 밤은 어둠입니다. 고난과 연단과 아픔과 상처와 시련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단어는 우리를 망하게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교육용어’입니다. 교육은 잘 되라고, 사람이 되라고, 사람 노릇을 하라고⋯ 책망도 하고, 그게 교육입니다. 그런 교육을 언제 하시는가, 밤에, 밤중에, 고난 가운데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합니다. 죽음의 박토에서 고난도의 교육을 받습니다. 목마르고 배고프고 많은 난관들을 만났습니다. 광야의 밤입니다. 이런 상황을 통해 인내하는 법, 기다리는 법,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 내려놓는 법, 모든 것을 맡기는 법들을 배웠습니다.
배우지 않으려는 기성세대들은 아예 정리를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도중하차를 시켰던 것입니다. 40년 후, 요단강 앞에서 보여준 모습, 도강 이후의 찬양은 한편의 감격의 드라마였습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배운 승리의 노래였습니다.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은 우상 중독으로 망가집니다. 성스러울 성(聖), 성민(聖民)이 아니라 성(性)의 노예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이 망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가 70년을 살면서 극심한 고난을 받습니다. 바로 그 고난학교를 통해 이스라엘은 다시 한 번 완전히 거듭납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청산하는 일에 100% 성공합니다. 고난의 교육이 가져단 준 승리의 열매입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카나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고 있습니다. 카나리아 조련사들은 밤중에 훈련시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새장에 카나리아를 넣습니다. 새는 너무 무서워 밤새도록 떨며 울부짖습니다. 처음에는 목에서 나오는 목소리였지만 가슴으로 내려갑니다. 가슴을 녹이는 애간장이 소리로 나옵니다. 아침에 찬란한 햇빛 앞에 서면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카나리아는 노래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맑고 밝은 노래입니다. 어둠 속에서 배운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흑인들은 오랜 세월 시련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노예로 팔려와 자유도 인권도 없이 학대를 받았습니다. 백인은 미워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백인에게서 배운 믿음의 힘으로 처참한 상황을 견디어 냅니다. 결국에는 슬픔을 기쁨으로 승화해 영가(靈歌)라는 찬양을 만들어 냅니다.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그 누가 나를 알아주랴…”
파티장에서 부르던 노래가 아닙니다. 채찍에서, 시련 속에서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음할 때 만들어 진, 어둠이 만들어낸 노래입니다. 미국의 두 흐름-경건과 영성, 백인 청교도들에게서는 경건이, 흑인들에게서는 영성이 나오면서 두 흐름이 오늘의 미국을 유지합니다.
이스라엘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졌던 나라들, 가나안의 원주민들, 왜 성공하지 못했습니까? 그들은 어둠 속에서 싸우고 욕하고 한숨 쉴 줄은 알았지만 노래를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사울은 좋은 출발에도 왜 단기간에 끝나고 말았습니까? 어둠이 왔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내려놓고 순종하는 어둠의 노래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아름다운 찬양입니다. 그 찬양은 대부분 솔로몬의 지혜에서 나오는 입술의 찬양이 아니라 다윗의 가슴에서 나오는 영가들입니다. 시편에는 눈물이 있고 아픔과 고뇌가 있습니다.
다윗은 어디에서 이런 노래를 배웠습니까? 그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카나리아처럼 어둠 속에서 노래를 배웠습니다. 사울에게 공연히 미움을 사 망명생활을 하면서 억울해서, 무서워서, 힘들어서 신음하고 부르짖고 호소했더니 그 모든 것이 노래가 되고 경배가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만든 시편은 3천이 넘습니다. 자연을 알고 우주를 알고 동물세계를 꿰었던 최고의 지혜자! 그럼에도 아버지의 감동이 없음은 무슨 이유입니까? 어둠이 없었습니다. 이방여인들과 정략적으로 결혼하고 나라는 튼튼해서 태평성대 이루었지만 그 번영이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 밤을 삭제해 버렸습니다. 어둠에서 하나님의 교육을 받으려 하지 않았기에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어둠에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대낮에 좋은 날에 내게서 배움이 없고 세상과 같은 물에서 놀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밤을 보내십니다. 카나리아처럼 밤에 교육시키며 노래를 만들어 내셔서 밤중에 노래 부르게 하십니다. 이런 노래들이 우리들을 성화시켜 나가며 제 나이에 맞게 지혜롭게 살면서 빈둥지 증후군을 메꾸게 할 것입니다.
결론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도할 때에 형통과 고난을 병행하신다고 합니다(7:14). 왜 형통을 주실까? 밝은 그리스도인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밝고 상냥한 얼굴로 축복의 통로가 되지 못한다면 세상은 어디에서 천사 같은 얼굴을 볼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런 모습으로 세상의 빛이 되라고 밝음을 주시고 밝음에서 교육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밤은 왜 주십니까? 고난은 내 가슴에서 성자를 드러내거나 지옥을 꺼내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것이 지옥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잔소리로 취급받는 것이 불신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의 “하찮은 것에 영향을 받고”(루이스) 감동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빈둥지로 가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고난은 인생의 위기가 아니라 생각을 하늘로 올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게 하는 ‘변장된 축복’입니다. 현재의 고난에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희망이 되시는 예수님을 기대하는 축복으로 만들어 내는 밤의 교육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밤의 교육이 필요한 이유이고 밤의 교육이 주는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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