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 있는 사람은(4) 청결, 화평, 핍박
마태복음 5장 1~12절
서론
우리는 금년 한 해의 사역주제를 “세상을 향해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정하고 정초부터 복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가 찾는 복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오복(五福)이니 칠복(七福)이니⋯ 하는 복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부에서 반입되는 축복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물고 있는 내면의 복이요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복(福)의 실체,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만복이시오 만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15)
자기 하나님은 ‘아도나이’ 하나님입니다. 아도나이는 주인, 주(主), 통치자입니다. 하나님을 단순히 복의 수여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하류유대인이요 하수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을 ‘아도나이’-나의 주인으로 삼는 사람만이 상류유대인이요 상수(上手) 그리스도인입니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을 자기의 아도나이로 삼는 방법을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것은 윤리적 요구입니다. 하나님을 아도나이로 삼으려면 그 행동이 윤리적, 행동이 따라야 하고 마음이 바르게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을 주제로 하나님을 자기의 아도나이로 삼아 복 받는 백성, 복민이 됨을 첫 수업시간 제자들에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아도나이로 삼을 수 있나? 예수님은 여덟 가지 비결을 제시합니다.
제1의 복. 심령이 가난한 자⋯ 자신을 작은 자로 여겨 하나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마음에 여호와께서 나의 아도나이가 되고 나는 그 분의 백성이 되어 보호 받는 복을 누립니다.
제2의 복, 애통하는 자⋯ 소중한 것을 잃어 애통하듯 내 안에 의(義)가 없음에 부끄럽고 죄송해서 슬퍼할 때에 의의 아도나이께서 나의 의(義)가 되어 위로의 복을 받습니다.
제3의 복. 온유한 자…. 남에게 상처도 주지 않고 나도 상처를 받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관대한 마음을 구할 때 땅의 아도나이가 되신 주권자가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제4의 복. 의를 사모하는 자…. 남을 돕고도 늘 모자라는 아쉬움으로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마음껏 도울 수 있도록 하늘과 땅의 것들로 풍성히 채우실 것입니다.
제5의 복. 긍휼이 여기는 자…. 타인을 긍휼히 관대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관대하게 대해주십니다. 점점 단계를 높여가는 이런 복들을 누리고 유통시켜야 복민입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 복, 마음이 청결한 자, 깨끗한 자들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헬라어에서 ‘청결’은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잘 세탁된 깨끗한 옷, 겨나 쭉정이를 깨끗하게 제거한 순전한 알곡, 다른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아니한 우유, 포도주! 그러기에 청결은 비어있는 마음이 아니라 한 가지 마음으로 집중된 단순한 마음입니다.
유대인에게 마음은 심장입니다. 사람은 심장이 튼튼해야 합니다. 혈액을 사방으로 공급해주는 심장이 멈추면 혈액순환이 멈추고 죽습니다. 정서적으로는 심장이 멈추면 열정이 식어지고 사랑도 식어집니다. 그러기에 심장은 깨끗해야 합니다.
여기서 마음은 단순히 심장이 아닙니다. 마음은, 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이며 지정의(知情意)를 총괄하는 중심부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율법을 마음에 새깁니다.
두 마음을 품은 것은 지휘부가 둘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도 충실하지도 못합니다. 나뉘는 것이지요! 마치 한 여자가 두 남자를 마음에 품고 있어 어느 한쪽에게도 온전한 마음을 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사람입니다.
인류최초의 우주비행사 러시아 가가린은 1961년 지구를 내려다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구는 푸른빛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우주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다.”
1971년 아폴로로 달나라에 갔던 미국의 어윈대령은 다르게 말합니다.
“나는 달나라에 있는 동안 하나님을 아주 가까이서 체험했다.”
그후 어윈이 헝가리대학에서 우주탐험에 대한 강의를 하던 중 대학생에게 질문을 받습니다.
“가가린은 우주에는 하나님이 없다했는데 당신은 어째 하나님이 있다면서 찬양하였느냐?”
이에 어윈대령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 마음의 깨끗함은 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라는 문구는 출애굽기의 모세의 이야기와 시편 24편을 배경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시 24:3-6)
성경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뵈었던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40일 주야(晝夜)를 금식하며 몸과 마음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했습니다. 그게 청결한 마음입니다
모세처럼 하나님과 대면하여 설 수 있는 사람, 즉 여호와의 산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 즉, 오직 여호와만을 구하며 그 분에게 집중하는 자가 바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모세처럼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의 의로움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혹이라도 덜 깨끗하면 하나님은 죽이실 것입니다. 그런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이라면 하나님은 완전히 그를 감싸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런 면에서 누더기 신앙자로 살고 있습니다. 마음을 더 닦아야 합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순수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과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보여주십니다.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일곱째 복은 화평하게 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히브리 전통에 대제사장 아론은 화평케 하는 자의 본보기입니다. 그래서 1세기 당시 히브리인들이 ‘아론의 제자가 되라!’는 말했으면 그것은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라! 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아론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화평을 이룰 수 있을까? 성전 제사장들과 연관을 시키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전 제사장들의 호칭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제사장들은 24개의 반차를 쫓아 일주일씩 봉사했습니다. 제사가 끝나면 제물이나 금품을 나누었으며 장자를 대속하고 드리는 은5세겔은 사비(私備)로 사용됩니다. 제사장으로 성전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와 함께 물질적인 축복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사장들은 모든 성전제사를 선호하지는 않았습니다. 전도회 강사도 남전도회보다 여전도회 헌신예배를 선호합니다. 교회마다 남전도회원들은 대접도 그렇고 강사사례비도 빡빡해요! 여성들은 강사 사례비가 더 많아요! 대부분의 교회가 그래요! 월급은 남자들이 타고 돈은 남자들이 버는데 교회의 돈은 왜 여성들에게서 나오는 건가요? 식당에서는 안 그런가요? 남자들은 된장찌개를 먹는데 여성들은 고급음식을 먹습니다. 그렇게 제사도 수입이 좋은 제사가 있고 수입이 적은 제사가 있습니다. 번제 같은 경우지요!
제사장들은 굳이 고르라면 번제는 덜 선호했을 거예요! 제물을 다 태워버리니 남는 것이 없습니다. 속죄제나 속건제는 제물의 일부만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들 몫이기에 은근히 환영을 받았습니다. 화목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제사장-제물 주인과 3등분합니다. 일부는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고 일부는 제사장들이 갖고 나머지는 제물주인에게 돌려줍니다. 그래서 화목제는 기름을 태워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도 만족. 제사를 대행하는 제사장도 만족, 제물주인도 일부는 다시 얻을 수 있어 만족하기에 명칭이 화목제입니다. 화목제는 즐거움의 제사입니다.
제사장의 입장에서는 화목제가 번제보다는 낫지만 속죄제나 속건제에 비교하여 별로 달갑지 않는 제사입니다. 나눌 것이 많아지므로 자기 몫-파이가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두 만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사장이 자기 몫을 줄여야 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 화평할 수 있습니다. 화평은 결국 모두를 만족시키자는 것입니다. 만족시키려면 상대방만 아니고 나도 만족하고 하나님도 만족하고 이웃들이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조금 더 갖는 것이 아니라 덜 가짐으로 모두가 흡족하게 만들고 평화를 만들어 갑니다. 이렇게 모두를 만족스럽게 하는 사람이 아론의 후손제사장이요 아론의 제자로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지금 이런 제사장들의 근거를 중심으로 일곱 번째 복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웃들과 화평하려면 내가 손해를 봐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천국의 상속자가 되는 축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
이런 축복 선언은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던 열심당원에게는 충격적 내용입니다. 그래서 열성당원 시몬도 결국 칼을 버리고 평화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평화를 만들어 가려면 내가 손해를 보고 양보할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그린 기준을 요구하십니다.
여덟째 복은, 핍박을 받는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10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여기 의(義)는 네 번째 복, “의에 주리고…” 할 때의 의(義)와는 다릅니다. 네 번째 의(義)는 자선행위, 구제입니다. 주고서도 아쉬움에 목마르고 미안한 것이 제4의 복입니다. 그러나 여기 여덟 번째의 의(義)는 구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부족한 의(義)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의로운 분입니다. 하나님나라도 완벽하게 의로운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닮아서 의로워야하며 적극적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내야 합니다. 영향력이 있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신체감각기관을 셋으로 나눕니다. 눈은 심장, 귀는 입, 발은 손과 연결됩니다.
눈과 심장은 사람이 보고 생각하고 결정하는 모든 것을 좌우하는 기관입니다.
귀와 입은 듣고 난 뒤 표현을 담당하는 기관입니다.
발과 손은 행동을 담당합니다.
세 기관 중 어느 쪽이 비중이 많으면 균형 잡힌, 온전한 의인이 안 됩니다. 그 사람은 공평한 사람이 아니라 어느 한 쪽에 편중됩니다. 하나님은 세 기관이 완전한 균형자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균형을 이룬 상태를 ‘의롭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생각하고 결정하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부분에서 완전히 균형을 이루신 의로운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해야 합니다. 악인들이 악을 포기하고 그들도 의로 새로워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언약 공동체입니다. 기쁨에서도 공동체, 슬픔에서도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해석할 때도 과거에 조상들이 체험했던 것을 자기들이 70년 포로생활을 했고 광야를 걸었다고 합니다. 만약 동족 중에서 누군가가 죄인이면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공동체에는 한 사람이라도 악인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죄도 그래요, 병에 담긴 포도 식초에 파리 한 마리라도 빠졌다면 모두 버립니다. 유대사회에서는 죄의 파리가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찾아가서 의인의 자리에 들도록 만드는 임무가 있습니다. 당연히 싫어하고 핍박 받지요! 그래도 꾹 참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수고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12절,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상(賞)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선지자들의 정의로운 삶을 제자들에게 연관합니다. ‘의로운 삶’은 예수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를 따를 때에 핍박과 조롱과 증오를 당해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크게 상급을 받게 됩니다.
결론
작년 9월 한국개혁신학회가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강의에서 이동영 박사(서울성경대), 정훈택 박사(총신대)는 구원론을 근거로 한국교회의 천박한 믿음을 질타해 관심을 모았습니다.
이동영 박사는 한국교회가 믿기만 하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면서 "오직 믿기만 하면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구원론은 개혁파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파적인 것"이라 지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성도들의 선행은 구원을 이루는 성화(聖化)에는 아무 관계가 없고, 오직 천국에서 상급을 수여받는 것만 관계가 있을 뿐이란 것입니다.
왜 구원파적인 구원관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정훈택 교수는 “성경 본문을 그대로 읽지 않아서”라고 지적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성경해석방법론이 종교개혁의 두 명제, 즉 '오직 믿음으로'와 '오직 성경으로' 사이에서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명제가 구원만 아니라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기에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제자도의 삶을 사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과 값싼 은총만을 추구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도덕폐기론자인 구원파와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파와 다른 모습을 보이려면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을 구해야 하고 그걸 얻으려 수고와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아도나이로 삼으려 몸부림 쳐야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윤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 긍휼이 여기는 자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주님을 전하면서 핍박을 받는 자…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거하시며 이런 사람들이 하늘나라 시민 복민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건 결국 생활을 통해 드러내야 할 증거입니다. 생활을 통해 드러내는 믿음만이 진짜이며 복민입니다. 그럴 때 저절로 한국교회가 좋은 복을 전달해 주는 좋은 유통센터가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늘빛맨의 엠블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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