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사람은(2), 소중한 것을 잃어 우는 사람들
마태복음 5장 1~12절
서론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선교대국입니다. 선교 130년 만에 일군 기적이고 감사한 일이지요! 그런데, 매년 증가해오던 선교사 파송이 작년에 처음으로 선교사 파송 ‘제로(0)시대’를 맞았습니다. 정년으로 은퇴하는 선교사와 나가는 젊은 선교사들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선교동력(動力)이 떨어진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힘이 그만큼 약화된다는 경고입니다.
선교계에서는 이제는 선교 지형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많은’ 선교사보다 ‘좋은’ 선교사를 보내자는 제안입니다. 이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복(福)도 그래요! 세상에 축복을 "많이" 유통시키는 것보다 "좋은" 복을 유통시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5복(福)-장수(壽), 부귀(富), 평안(康寧), 유호덕(攸好德, 명예), 고종명(考終命, 제 명대로 살다 편히 죽음), 이런 복은 세상 유통센터에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복입니다.
교회는 그보다 나은 수준의 복을 유통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라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자 만복 자체입니다. 오복(五福)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15)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을 때 사람은 누구든지 ‘최고의 가치와 명예’를 얻은 최상의 복둥이들이 됩니다. 손에 잡히고 이름에 얹어지는 명예의 복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라는 복을 신분상으로 누리는 복둥이복을 세상에 유통시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중과의 첫 만남에 복을 화두(話頭)로 삼습니다. 복, 행복, 잘 사는 것! 그제나 이제나 사람의 관심은 동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을 구하는 대중들에게 일시적이고 신기루 같은 복, 짝퉁 복이 아니라 진짜 복, 만복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어떻게 나의 아도나이(주)로 삼아 복의 근원까지 올라가고, 그 복을 누리며 살까, 를 가르칩니다. 그게 팔복입니다.
팔복을 보세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주님을 위해 핍박당하는 자⋯ 복이 있나니⋯ 이게 어떻게 복 있는 자들입니까? 그렇게 살다가는 있던 복도 털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 자체가 복(福)이라 하지 않습니다. 팔복에 관한 마음자세들, 대인관계,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청결’… 이런 상태를 경건한 마음으로 유지하려 할 때 간절하게 하나님을 구하게 되고 구할 때에 제대로 여호와를 나의 ‘아도나이’로 삼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도나이’는 여호와-야훼라는 말과 함께 하나님을 말합니다. 야훼가 하나님께서 당신이 당신을 부를 때 사용되는 성호라면 아도나이 하나님은 사람들이 부르도록 주신 성호입니다. 의미는 주, 주님, 주인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주인으로 섬기겠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만복 하나님이 내 주인이 되고 당연히 그게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팔복의 첫 복.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유대선민으로 성결하게 살아야 하는데 사는 것이 변변치 못해 1년에 세 차례 성전 참배를 못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세리로 창기로 살아 죄가 많아서, 장애인이어서, 이방인이어서… 내가 작아진 느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아도나이로 삼았더니 하나님의 다스림이 커지고⋯, 이 얼마나 복된 신분이냐? 그겁니다.
제2의 복,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복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그야말로 멍~ 때리는 말씀 아닌가요? 예수님께서 제 정신이라면 복(福)을 찾아 여기 들판까지 나온 서민들에게 우는 자가 복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중들은 기대를 접었을까요? 이 사람 개똥신학자 아니야? 첫 복에서부터 기분이 잡치고 기대감을 접게 하더니 두 번째 가르침의 항목에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겠어요!
행복하다면 왜 울겠어요? 그것도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니⋯. 눈물이 복이라고, 우는 것이 행복이라는 가르침은 처음 들어보는 해괴한 가르침입니다.
그처럼 헬라어에서 ‘애통’은 모든 슬픔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슬픔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거나 친한 자에게 배신당했을 때, 가슴이 찢어지고 숨이 막히며 온 마음과 온 몸이 떨리며 뼈까지 쑤시며 고통을 느끼는 그 같은 슬픔, 통곡을 말합니다.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가장 큰 애통이 죽음 앞에서 흘리는 통곡이고 애곡입니다.
“애통하는 자 복이 있다”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유대장례법을 알아야 합니다. 고대히브리 장례법에서는 때 네 번의 곡(哭)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유대인의 애곡만 아니라 우리도 그렇잖아요! 부모나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면 첫 번째 슬픔이 임종 시의 순간입니다. 마음으로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지만 숨이 딱 멈추는 순간에 내 숨도 멎는 것처럼 일시적인 정지를 하며 눈물이 터져 나옵니다. 아무 생각도 없어요! 그 시간만큼은 나와 사자(死者)밖에 없어요!
다음이 입관입니다. 다시는 육신적으로는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 애석함이란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이 화장장에서 화로에 관이 들어가거나 땅에 하관할 때 그 절망감에 오열합니다. 이어 세상 장례법으로는 삼우제(三虞祭), 불교에서는 49제, 1주기 기일 2주기 기일⋯ 3년 상(喪)을 하고 나야 장례과정이 끝납니다. 힘들어요! 그만큼 정성을 다합니다.
유대인들도 고인에 대한 애통이나 정성은 이에 못지않습니다. 애통의 과정이 있습니다.
제1애통 과정, ‘아니놋’
우리 장례는 3일장 5일장⋯이지만 유대인은 임종(臨終)한지 24시간 안에 장례를 끝냅니다. 신명기 21장 23절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를 근거합니다. 멀리 살거나 여행 중에 있는 친인척의 도착을 기다리는 경우 약간의 시간은 연장됩니다.
사람이 죽은 순간부터 바위에 파 놓은 무덤에 들어가는 때까지 곡(哭)하는 기간이 ‘아니놋’이라 합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시체가 하늘이 보이지 않는 곳에 넣어두어야 합니다. 보통 바위에 파 놓은 무덤에 시체를 넣는데 이 하루가 유족들에게는 극심한 애통의 시간입니다. 가슴을 치고 슬픔의 표시로 옷을 찢습니다. 고인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통곡합니다. 누구의 위로도 받지 않습니다.
제2애통 과정, ‘쉬바’
무덤에 묻은 뒤의 7일 기간입니다. 7일 동안 유족들은 낮은 자리에 앉으며 비로소 친구나 친척들에게 위로를 받습니다. 상(喪)당한 유족들은 그 슬픔이 너무 크기에 공동체사회 임무에서 제외되는 배려를 받습니다. 먹을 것을 위해 일터로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욥기 같은 고난의 책만을 읽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가지 않아도 될만큼 유족들에게 관대합니다.
그러나 그런 대접은 부자나 먹고 살만한 사람들에나 해당됩니다. 유명한 사람의 장례식에는 조문객들이 많이 찾아와 애통하며 위로하지만 가난한 빈민장례식에는 오지 않습니다. 유족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합니다.
1주일동안 쉴 수도 없고 먹고 살기위해 일터로 나갑니다. 일하면서 슬퍼하고 슬퍼하면서 일하기에 제대로 위로 받지 못합니다. 안식일에 회당에나 가야 회당장은 위로를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시온에서 애통해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당신을 위로하시기를!”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겪고 애통해 하는 사람들에게 회당장이 위로합니다. 그때 유족들은 위로를 받고 마음에 안식을 취합니다. 행복한 상태로 다시 돌아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3애통 과정, 쉬로심
장례식 치르고 ‘쉬바’(칠일)를 지난 후의 30일 기간 ‘쉬로심’(盒余勖)은 ‘삼십일’이란 뜻입니다. 7일간의 쉬바가 끝나면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해요. 30일 동안 유족으로 금지사항이 있습니다. 일체의 축하파티, 댄스파티, 생일파티⋯ 등을 금하며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습니다.
자살자에게는 '쉬바'나 '쉬로심' 모두 적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스스로 깨뜨린 사람에게는 어떤 형태로건 존경이나 추모행위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부끄러운 마음으로 처리하면 됩니다. 어디 가서 내색도 못합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고인에 대해서는 30일 동안 최선을 다해 고인의 죽음을 애석해 하며 애도합니다.
제4애통 과정, 카디쉬
부모님의 상(喪)을 당했을 경우엔 11개월 동안 회당의 모든 공(公) 예배시간에 기도문(카디쉬)을 낭송합니다. 공평하신 하나님과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게힌놈(음부-저주의 장소)의 고통으로 부터 부모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1동안 유족에 의해 기도로 낭송됩니다.
유대 사후관은 사람이 죽으면 먼저 게힌놈에 들어가며 악인의 경우 정도에 따라 최소 1년 이상 고통받는다고 합니다. 부모가 악인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11개월로 그 기간을 줄였습니다. 1주기가 되는 기일(忌日)에는 24시간동안 촛불을 켜 놓고 카디쉬(기도문)를 읽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사랑하던 사람을 떠나보내면서 최고의 애통으로 슬픔을 겪습니다. 상(喪) 중에 있는 그들을 위로해 줄 이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오는 위로가 내 비통과 원통함에 위로가 되기까지에는 애통합니다. 경건한 신앙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자기 ‘아도나이’로 삼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그때 최고의 위로를 받습니다. 얼마나 행복한지… 고인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니… 나는 행복하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4절을 이리 해석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내게 소중한 것을 잃어 오히려 더 소중한 것을 찾은 기쁨!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복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칩니다. 그래서 만복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만 있다면 장례식이라는 불행조차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기에 고인보다 하나님이 더 좋은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고 형제가 됨을 마음으로 느끼게 하며 큰 위로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통은 만복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당하는 애통은 대략 세 가지 차원입니다.
-누구나 살면서 겪게 되는 애통. 육체의 질병으로나 물질로 오는 눈물, 사별이나 낙방⋯ 등등으로 오는 애통입니다. 다윗은 자식들 때문에 참 많이 울었습니다. 다말이 성폭행을 당하고⋯ 압살롬은 제 형을 죽였습니다. 다윗이 많이 기대했던 압살롬이 아버지에게 반역하고, 죽었을 때 다윗은 탄식합니다. 바울은 육신의 가시로 인해 평생을 애통했습니다.
-세상을 향한 애통입니다. 세상에서 되어지는 여러 악행들을 보며 비극을 보며 국가의 운명을 보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눈물의 탄식입니다.
예수님 당시 경건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백성들의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애통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님께서 생각하는 애통은 장례식에서의 애도보다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말합니다. 이것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만 나오는 애통입니다.
심령이 가난했다는 자체가 마냥 복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므로 하나님께 내 드릴 것이 없음을 압니다. 내드릴 것이 없는 가난한 인생으로 산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죄에 대해 슬퍼하고 애통의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이 애통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不義)에 대한 애통이며, 내가 자랑하던 도덕과 자기의(義)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발견하려는 애통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성전에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장면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를 믿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11절,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세리는 어땠나요?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가슴을 치며⋯. 죄의 근원지로서의 마음을 치는 깊은 참회와 애통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그는 세리라는 자기 직업을 통하여 범해온 죄 많은 생활들에 대한 애통입니다.
불쌍히 여기옵소서⋯.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동시에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세리의 모습이 역력히 나타나 있습니다. 지은 죄가 너무 많아 하나님 앞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모습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 아도나이로 삼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4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인이라 칭함 받았습니다. 유대인에게 최고의 가치는 의인이요 최상의 명예가 의인입니다. 의인은 모든 신앙심의 꼭대기입니다. 그런 말을 듣는 순간이 세리는 가장 행복하고 복된 시간입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행복입니다. 아~ 나는 행복하다~ 그러니 세리는 복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값진 애통입니다~
결론
금년도 사역주제! “세상을 향해 축복의 통로가 되라!” 어떤 축복을 전하겠습니까? 오복(五福)이나 받고, 칠복(七福)이나 받고 그거나 세상에 유통시키는 사람으로 끝날 것입니까? 그런 유통센터는 교회밖에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내가 아니어도 세상은 복의 유통자들이 많습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을 나의 아도나이로 삼아~ 나의 기쁨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복을 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복을 위한다면 심령이 더 가난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나의 의(義)가 너무 보잘것없음에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들로 살아야 합니다. 남에게는 의(義)가 보이는데 내게는 의(義)가 보이지 않음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그래야 눈물의 길을 통하여 위로의 아도나이 주님께서 오시고 아도나이의 위로를 받을 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축복을 누리시는 복둥이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일아침에 설교를 조금 변경해서 아래 설교를 했습니다! 대조해 보세요!
복의 사람은(3), 애통으로 복자(福者)가 되리!
마태복음 5:1~12
서론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선교대국입니다. 선교 130년 만에 일군 기적이고 감사한 일이지요! 그런데, 매년 증가해오던 선교사 파송이 작년에 처음으로 선교사 파송 ‘제로(0)시대’를 맞았습니다. 정년으로 은퇴하는 선교사와 나가는 젊은 선교사들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선교동력(動力)이 떨어진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힘이 그만큼 약화된다는 경고입니다.
선교계에서는 이제는 선교 지형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많은’ 선교사보다 ‘좋은’ 선교사를 보내자는 제안입니다. 이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복(福)도 그래요! 세상에 축복을 "많이" 유통시키는 것보다 "좋은" 복을 유통시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5복(福)-장수(壽), 부귀(富), 평안(康寧), 유호덕(攸好德, 명예), 고종명(考終命, 제 명대로 살다 편히 죽음), 이런 복은 세상 유통센터에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복입니다.
교회는 그보다 나은 수준의 복을 유통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라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자 만복 원복입니다. 오복(五福)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15)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을 때 사람은 누구든지 ‘최고의 가치와 명예’를 얻은 최상의 복둥이들이 됩니다. 손에 잡히고 이름에 얹어지는 명예의 복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라는 복을 신분상으로 누리는 복둥이복을 세상에 유통시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중과의 첫 만남에 복을 화두(話頭)로 삼습니다. 복, 행복, 잘 사는 것! 그제나 이제나 사람의 관심은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복을 구하는 대중들에게 일시적이고 신기루 같은 복, 짝퉁 복이 아니라 진짜 복, 만복의 근원이 되는 원복 하나님을 어떻게 나의 아도나이(주)로 삼아 복의 근원까지 올라가고, 그 복을 누리며 살까, 를 가르칩니다. 그게 팔복입니다.
팔복을 보세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주님을 위해 핍박당하는 자⋯ 복이 있나니⋯ 이게 어떻게 복 있는 자들입니까? 그렇게 살다가는 있던 복도 털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 자체를 복(福)이라 하지 않습니다. 팔복에 관한 마음자세들, 대인관계,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청결’… 이런 상태를 경건한 마음으로 잘 유지하며 간절하게 하나님을 구할 때에 제대로 여호와를 나의 ‘아도나이’로 삼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도나이’는 여호와-야훼라는 말과 함께 하나님을 말합니다. 야훼가 하나님께서 당신이 당신을 부를 때 사용되는 성호라면 아도나이 하나님은 사람들이 부르도록 주신 성호입니다. 의미는 주, 주님, 주인입니다. 바벨론 이후 나온 성호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만복 하나님이 내 주인이 되고 당연히 그게 참복-원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팔복의 첫 복.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유대선민으로 성결하게 살아야 하는데 사는 것이 변변치 못해 1년에 세 차례 성전 참배를 못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세리로 창기로 살아 죄가 많아서, 장애인이어서, 이방인이어서… 내가 작아진 느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아도나이로 삼았더니 하나님의 다스림이 커지고⋯, 이 얼마나 복된 신분이냐? 그겁니다.
제2의 복,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복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그야말로 멍~ 때리는 말씀 아닌가요? 예수님께서 제 정신이라면 복(福)을 찾아 여기 들판까지 나온 서민들에게 우는 자가 복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중들은 기대를 접었을까요? 이 사람 뜬구름 잡는 개똥철학, 개통신학자 아니야? 첫 복에서부터 기분이 잡치고 기대감을 접게 하더니 두 번째 가르침 항목에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겠어요!
행복하다면 왜 울겠어요? 그것도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니⋯. 눈물이 복이라고, 우는 것이 행복이라는 가르침은 처음 들어보는 해괴한 가르침입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헬라어 ‘애통’은 모든 슬픔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슬픔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거나 친한 자에게 배신당했을 때, 가슴이 찢어지고 숨이 막히며 온 마음과 온 몸이 떨리며 뼈까지 쑤시며 고통을 느끼는 그 같은 슬픔, 통곡을 말합니다.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가장 큰 애통이 죽음 앞에서 흘리는 통곡이고 애곡입니다.
“애통하는 자 복이 있다”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유대장례법을 알아야 합니다. 고대히브리 장례법은 네 번의 곡(哭)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유대인의 애곡만 아니라 우리도 그렇잖아요! 부모나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면 첫 슬픔이 임종 시의 순간입니다. 마음으로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지만 숨이 딱 멈추는 순간에 내 숨도 멎는 것처럼 일시적인 정지를 하며 눈물이 터져 나옵니다. 아무 생각도 없어요! 그 시간만큼은 나와 사자(死者)밖에 없어요!
다음이 입관입니다. 다시는 육신적으로는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 애석함이란 말할 수가 없지요. 다음이 화장장에서 화로에 관이 들어가거나 땅에 하관할 때 그 절망감에 오열합니다. 이어 세상 장례법으로는 삼우제(三虞祭), 불교에서는 49제, 1주기 기일 2주기 기일⋯ 3년 상(喪)을 하고 나야 장례과정이 끝납니다. 힘들어요! 그만큼 정성을 다합니다.
유대인들도 고인에 대한 애통이나 정성은 이에 못지않습니다. 애통의 과정이 있습니다.
제1애통 과정, ‘아니놋’-우리 장례는 3일장 5일장⋯ 유대인은 임종(臨終) 24시간 안에 장례를 끝냅니다. 신명기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에 근거합니다. 멀리 살거나 여행 중의 친인척의 도착을 기다리는 경우 약간의 시간은 연장됩니다.
사람이 죽은 순간부터 바위에 파 놓은 무덤에 들어가는 때까지 곡(哭)하는 기간이 ‘아니놋’이라 합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시체가 하늘이 보이지 않는 곳, 보통 바위 속 무덤에 시체를 넣는데 이 하루가 극심한 애통의 시간입니다. 가슴치고 슬픔의 표시로 옷을 찢습니다. 고인을 위해 기도하면서 통곡합니다. 누구의 위로도 받지 않습니다.
제2애통 과정, ‘쉬바’-바위에 묻은 뒤 7일 동안 유족들은 말석에 앉으며 그제야 친구친척들에게 위로받습니다. 슬픔이 너무 커 공동체임무에서 제외되고 일터로 나가지도 않아요. 욥기 같은 고난의 책만을 읽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가지 않아도 될만큼 유족들에게 관대합니다.
그런 대접은 부자나 먹고 살만한 사람들에나 해당됩니다. 유명인 장례식에는 조문객들이 많지만 빈민장례식에는 오지 않습니다. 유족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합니다.
1주일동안 쉴 수도 없고 먹고 살기위해 일터로 나갑니다. 일하면서 슬퍼하고 슬퍼하면서 일하기에 제대로 위로 받지 못합니다. 안식일에 회당에나 가야 회당장은 위로를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시온에서 애통해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당신을 위로하시기를!”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겪고 애통해 하는 사람들에게 회당장이 위로합니다. 그때 유족들은 위로를 받고 마음에 안식을 취합니다. 행복한 상태로 다시 돌아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3애통 과정, 쉬로심. 장례식 치르고 ‘쉬바’(칠일)를 지난 후의 30일 기간 ‘쉬로심’(盒余勖), ‘삼십일’이란 뜻입니다. 7일간의 쉬바가 끝나면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해요. 30일 동안 유족으로 금지사항이 있습니다. 일체의 축하파티, 댄스파티, 생일파티⋯ 등을 금하며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습니다. 30일 동안 최선을 다해 고인의 죽음을 애석해 하며 애도합니다.
제4애통 과정, 카디쉬. 부모 상(喪)을 당했을 경우 11개월 동안 회당의 공(公)예배시간 기도문(카디쉬)을 낭송합니다. 공평하신 하나님과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게힌놈(음부-저주의 장소)의 고통으로부터 부모영혼을 위해 1동안 유족에 의해 기도로 낭송됩니다.
유대 사후관은 사람이 죽으면 먼저 게힌놈에 들어가며 악인의 경우 정도에 따라 최소 1년 이상 고통 받는다고 합니다. 부모가 악인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11개월로 그 기간을 줄였습니다. 1주기가 되는 기일(忌日)에는 24시간동안 촛불을 켜 놓고 카디쉬(기도문)를 읽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사랑하던 사람을 떠나보내면서 최고의 애통으로 슬픔을 겪습니다. 상(喪) 중에 있는 그들을 위로해 줄 이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오는 위로가 내 비통과 원통함에 위로가 되기까지에는 애통합니다. 경건한 신앙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자기 ‘아도나이’로 삼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그때 최고의 위로를 받습니다. 얼마나 행복한지… 고인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니… 나는 행복하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4절을 이리 해석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내게 소중한 것을 잃어 오히려 더 소중한 것을 찾은 기쁨! 이것이 진정한 원복(原(福)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칩니다. 그래서 만복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만 있다면 장례식이라는 불행조차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기에 고인보다 하나님이 더 좋은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고 형제가 됨을 마음으로 느끼게 하며 큰 위로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례식을 통한 애통은 만복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문호 루이스에게는 살이라도 베주고 싶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찰스 윌리엄스였습니다.
이 친구가 사망했습니다. 루이스는 조사(弔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천국은 무척 가까워졌습니다. 멀리 생각되던 천국이 이젠 이웃집이 되었습니다. 내 친구 찰스가 살고 있으니 얼마나 가까운 곳입니까?"
1년 후에 사랑하는 아내 조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이는 유대인 이혼녀로 루이스가 노총각 때에 비밀결혼을 했습니다. 루이스는 그 날의 일기에 이렇기 기록해 놓았습니다.
“천국은 내 집처럼 가까워졌다. 조이가 있고 찰스가 있으니 그곳이 바로 내 집이 아닌가?"
애통을 통해 세상의 복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천국 소망으로만 가득 차게하는 그 애통은 하나님을 자기 아도나이로 삼는 유익한 고통! 축복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 116:16)이라 합니다. 유족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주는 애통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걸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당하는 애통은 대략 세 가지 차원입니다.
-누구나 살면서 겪게 되는 애통. 육체의 질병으로나 물질로 오는 눈물, 사별이나 낙방⋯ 등등으로 오는 애통입니다. 다윗은 자식들 때문에 참 많이 울었습니다. 다말이 성폭행을 당하고⋯ 압살롬은 제 형을 죽였습니다. 다윗이 많이 기대했던 압살롬이 아버지에게 반역하고, 죽었을 때 다윗은 탄식합니다. 바울은 육신의 가시로 인해 평생을 애통했습니다.
-세상을 향한 애통입니다. 세상에서 되어지는 여러 악행들을 보며 비극을 보며 국가의 운명을 보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눈물의 탄식입니다.
예수님 당시 경건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백성들의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애통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님께서 생각하는 애통은 장례식에서의 애도보다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말합니다. 이것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만 나오는 애통입니다.
심령이 가난했다는 자체가 마냥 복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므로 하나님께 내 드릴 것이 없음을 압니다. 내드릴 것이 없는 가난한 인생으로 산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죄에 대해 슬퍼하고 애통의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이 애통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不義)에 대한 애통이며, 내가 자랑하던 도덕과 자기의(義)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발견하려는 애통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성전에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장면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를 믿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11절,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세리는 어땠나요?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가슴을 치며⋯. 죄의 근원지로서의 마음을 치는 깊은 참회와 애통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그는 세리라는 자기 직업을 통하여 범해온 죄 많은 생활들에 대한 애통입니다.
불쌍히 여기옵소서⋯.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동시에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세리의 모습이 역력히 나타나 있습니다. 지은 죄가 너무 많아 하나님 앞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모습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 아도나이로 삼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4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인이라 칭함 받았습니다. 유대인에게 최고의 가치는 의인이요 최상의 명예가 의인입니다. 의인은 모든 신앙심의 꼭대기입니다. 그런 말을 듣는 순간이 세리는 가장 행복하고 복된 시간입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행복입니다. 아~ 나는 행복하다~ 그러니 세리는 복자-복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값진 애통입니다~
결론
금년도 사역주제! “세상을 향해 축복의 통로가 되라!” 어떤 축복을 전하겠습니까? 오복(五福)이나 받고, 칠복(七福)이나 받고 그거나 세상에 유통시키는 사람으로 끝날 것입니까? 그런 유통센터는 교회밖에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내가 아니어도 세상은 복의 유통자들이 많습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을 나의 아도나이로 삼아~ 나의 기쁨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복을 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복을 위한다면 심령이 더 가난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나의 의(義)가 너무 보잘것없음에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들로 살아야 합니다. 남에게는 의(義)가 보이는데 내게는 의(義)가 보이지 않음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그래야 눈물의 길을 통하여 위로의 아도나이 주님께서 오시고 아도나이의 위로를 받을 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축복을 누리시는 복둥이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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