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간이 되었다!
갈라디아서 4장 1~7절
<서론>
성경의 역사는 이중구조입니다. 사람 눈에 보이는 역사와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 사람 눈에 보이는 시간을 헬라어로 ‘크로노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카이로스’라 합니다. 내게 벌어지는 일들이 우연히 생긴 것이다, 라는 판단에서 운명론이나 팔자소관에 맡기는 것은 사람의 시간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볼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운명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사건 하나하나, 걸음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善)을 이룬다는 확신에 살 때 바른 믿음생활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 거주 400년, 막판에 끔찍한 어명이 내렸습니다. 사내아이를 낳으면 다 죽이라는 살인명령입니다. 아므람과 요게벳 부부는 둘째아들이 너무 아름다운 아기였기에 차마 죽일 수가 없습니다. 석 달 키우다 갈대상자에 눕혀 나일 강에 떠내려 보냅니다.
강물에 흘러가는 시간은 인간의 역사 크로노스입니다. 아기의 시간은 운명이 정해져 있습니다. 갈대상자가 물결 따라 흘러가다 전복되거나 짐승에 잡혀 먹히거나 애굽인에게 발각되어 죽게 되겠지요. 이게 인간 역사, 크로노스 안에 펼쳐지는 모세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가 배후에 펼쳐집니다. 갈대상자 아기는 바람 따라 강물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한 시간, 타이밍에 애굽 공주가 은밀히 목욕하는 장소로 흘러갑니다. 그 날 공주가 왠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기가 히브리 혈통임을 알면서도 아기천사로 보이게 했습니다. 그래서 거두어 양자로 삼고, 이 아기가 자라 이스라엘 해방자가 됩니다.
바벨론 포로시절의 유대인들, 바사제국이 바벨론을 무너뜨리면서 유대인들은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아말렉부족 하만이 앙심을 품고 유대인 멸족계획을 세워놓았는데 전날, 왕이 잠이 오지 않습니다. 보지도 않던 궁중역사책을 뒤적이는데 한 유대인이 왕을 구해준 일을 읽게됩니다. 그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않아 궁중역사책을 읽는 그 순간, 유대인은 살고 아말렉부족은 죽는, 운명이 바뀝니다. 인간역사와 함께 하나님의 역사가 이중으로 흘러가고 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오셨습니다. 좀 더 일찍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담아들로 올 수도 있고 아브라함아들로 올 수도 있었겠지요. 다윗아들로 탄생했다면 고생도 않았을 것입니다. 왕 중의 아들로 탄생했다면 왕자 신분으로 편하게 살면서 구원 사역을 감당할 수도 있었겠지요.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오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으며 바벨론에서 70년 종살이 때 오셨다면 유대 민족은 훨씬 덜 고생하고 더 희망적인 시대를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의 번영기에도, 유대인들이 조국을 잃고 신음하는 시기에도 메시아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유대인들은 지쳐서 “메시아여, 언제 오시렵니까?” 탄식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때는 사람의 때 크로노스 시간이지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은 아닙니다.
바울은 4절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이 드디어 “때가 차매” 오셨다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때가 찼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때가 찼다는 것은 복음이 씨앗을 내리고 잎사귀가 무성해 지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갖추어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많은 시간대를 놔두고 이때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때가 하나님의 시간이 움직이는 카이로스입니다.
이때가 하나님의 눈에 왜 카이로스일까요?
당시는 온 세계에 평화가 말라버린 시대였습니다. 로마제국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통치부터 5명의 황제까지 약 200년간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오랜 평화를 누렸습니다. 이때의 평온했던 시대를 팍스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 합니다. 로마영토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있었으며, 지중해는 로마의 안마당이었고 한 때는 페르시아만(彎)까지 진출했던 엄청난 세계제국입니다.
국경수비도 견고했고, 이민족의 침략도 없었으며 국내 치안도 확립되어 교통, 물자 교류도 활발하였고 도시(都市)가 번영하여 모두 평화를 구가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남의 고통을 대가로 얻은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부패와 타락에 평화라는 페인트칠을 했을 뿐입니다. 로마의 평화는 거짓된 평화이고 위장된 평화입니다.
로마 제국 하에 있는 속국민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전쟁과 기아가 휩쓸고 지났습니다. 인류는 평화를 갈망했습니다.
로마제국에 십자가 형벌이 등장합니다. 로마는 수리아 등지에 널려 있는 끔찍한 처형 형틀 십자가를 가져왔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혐오하시며 죄인을 어떻게 다루실까? 를 보여줄 수 있는 끔직한 형틀이었습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주님은 아직 올 수도 없습니다.
로마제국의 도로망이 세계 곳곳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그 도로는 복음의 ‘실크로드’ 즉 가스펠 로드였습니다. 로마의 도로망을 통해서 복음은 순식간에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로마의 군사 도로망이 없었다면 복음 전파는 그만큼 비효율적이고 더디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4백 년 동안 예언은 중단되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메시야를 대망했습니다. 백성들은 로마제국에 터지고 기득권층에 착취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왕도 독립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오직 메시야를 대망 했습니다. 이런 열망이 없었다면 예수님께 몰려들지 않았겠지요.
회당이 각처로 번져 있었습니다. 회당은 바벨론 포로시절에 생겨났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열 가정이 모이면 회당을 만들었습니다. 예배처소 겸 유대인들의 모임입니다.
바울이 세계 선교 전도 여행을 할 때 바로 회당을 이용했습니다. 회당의 유대인들을 접촉점으로 바울은 그 동네에 복음의 연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회당이 수천 개였습니다.
율법이 백성들에게 큰 짐이 되었습니다. 1절부터 시작되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율법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의 법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유대인에게 짐이 되고 탄식이 되었습니다. 율법에서의 해방,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때는 바로 율법의 해방을 갈망하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온 세상으로 번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조건들이 갖추어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이런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때가 차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을 당했고 살려 달라 애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셨고 사사들을 보내셨고 다윗을 보내셨습니다. 아기예수는 보내지 않았습니다. 때가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들을 권고하셨습니다. “권고”는 돌아봄을 뜻합니다. 어머니가 아기들을 돌아보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돌아보셨습니다. 때가 아직 일러 비록 메시야는 보내지 않으셨지만, 여러 모양으로 백성들을 돌아보셨습니다.
인생에 범사에 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때가 되기까지 잘 웅크리고 있는 사람은 비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기 전에 섣불리 행동하는 사람은 주어진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내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을 제대로 살필 수 있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요셉의 역사를 보십시오.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잃음, 형제들의 음모, 애굽에서의 모함, 감옥에서의 배은망덕-이 모든 것을 사람의 역사로 보면 억울하고 보복의 대상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역사 카이로스로 형제들을 보았습니다. 형제들의 배신은 요셉 자신을 높이고 야곱 아버지의 자손들을 대(大) 민족으로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와 시간으로 형제들을 대할 때 진정한 용서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만약 크로노스 인간 시간만 보았다면 피비린내가 났겠지요! 하나님의 역사, 카이로스를 보아야 하나님일꾼이 됩니다.
다윗도 보십시오. 하나님의 시간을 알았기에 십 수 년을 도망 다니며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자기의 역사를 바라볼 때에는 낙심했고 억울했고 지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으로 상대를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모두 그에게 유익을 주는 좋은 인연들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바라보는 이중적인 눈이 있어야 합니다. 눈앞에 나타나는 ‘크로노스’의 시간만 보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 ‘카이로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로운 신앙인들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역사를 영어로 history, 히스토리라고 합니다. 히스토리는 인간의 역사입니다. 인간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힘 있는 권력자들이 일어나 역사를 좌지우지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히스토리’가 아니라 hi-story 히 스토리-그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만을 바라보면 낙심 되고 믿음이 흔들립니다. 고난당하고 실패할 때 역사를 히스토리로만 보면 흔들립니다. 히-스토리 그분의 역사로 보면 힘을 얻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역사를 ‘크로노스’로 보지 않았습니다. 크로노스의 주인공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주전 722년에 남방 유다의 몰락을 체험했습니다. 크로노스 역사 앞에서 회의(懷疑)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우리가 성전에 들어갈 때 조금만 부정해도 가혹하게 내리치던 여호와께서 성전이 이방인들의 군화에 유린되는 것을 보면서, 선민이 개같이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침묵할 수 있을까?
1940년, 50년대, 독일 등지의 유대인들은 히틀러에게 무차별적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들은 히틀러가 두려웠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섭섭함을 품습니다.
세월, ‘크로노스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역사가 진전되고 모든 것이 안정되었을 때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 ’카이로스‘ 개념으로 지나온 시간들을 재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그것은 세계화를 위한 하나님의 카이로스였습니다. 그때 성경이 편집되고, 메시아 대망사상이 싹텄습니다. 히틀러에게 당한 민족 수난은 ‘시온이즘운동’의 도화선이 되어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었습니다.
히틀러의 박해를 피해 많은 유대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과 이민을 갔습니다.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미국 사회의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그 주류가 중동의 이슬람국가들의 공격 속에서 조국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늦게 오시나? 메시아는 왜 안 오실까?”
크로노스 시간으로 볼 때 낙심과 원망이었지만 카이로스라는 하나님의 시간개념을 갖게 되자 그제야 메시아의 강림이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성급함을 책망합니다. 그래서 오늘 세계 최고의 인재엘리트 군단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크로노스’ 사람의 시간대로 살아가는 사람과 ‘카이로스’ 하나님의 시간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차이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최고인 줄로 알았습니다. 율법이 그들을 의롭게 하고 천국행 티켓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은 복음의 안내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가장 좋은 것 예수 그리스도가 때가 차서 지금 왔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부라우닝은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노래합니다. 이를 받아 ‘목회자의 목회자’라는 평을 받는 워렌 위어스비는 설교집 제목으로 이 문장을 사용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사람의 눈 크로노스의 시간으로는 더 이상 좋은 날도 없고 사람도 없고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의 눈으로 보면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이며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결론>
히틀러가 유대인학살에 나섰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젊고 유능한 외과의사가 수용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가스실과 실험실로 떠나는 동족들의 죽음의 행렬을 보았습니다. 자신도 머지않아 가스실의 희생제물이 되겠지요. 노동시간에 젊은 의사는 깨진 유리병조각을 주머니에 숨겨 돌아왔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아침저녁 유리조각으로 면도했습니다.
오후가 되면 나치스들이 처형할 대상을 골라내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의욕에 넘치는 턱을 가진 그 젊은이를 차마 가스실로 보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외과의사는 나치가 망할 때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를 떠날 때 소지품은 단 하나, 푸른 유리병 조각입니다.
2차대전 이후, 유대인들은 유월절명절에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가 작사, 작곡된 곳이 유대인 학살현장입니다. <아니 마민>-“나는 믿는다” 그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시리란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늦게 오십니다”
학살의 현장에서 그 노래를 부르며 살아난 외과의사는 스페인으로 간 이후 유월절이 되면 <아니 마민>이라는 그 아름다운 고난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가사가 약간 달랐습니다.
“신의 도움은 결코 늦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할 뿐입니다”
인간의 역사 인간의 시간-‘크로노스’로 세상을 보는 유대인들에게는 구세주의 오심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로 보는 외과의사에게는 하나님께서 늦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너무 성급하게 보일 뿐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카이로스의 시간을 믿는 자들에게 승리의 깃발을 쥐어줍니다. 올해 일어난 일들이 좋았든 나빴든 그 모든 일들이 단지 우연한 사건연속이 아니라 우리의 성장과 성숙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손으로 빚어진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카이로스’ 하나님의 시간으로 보면 삶이 여전히 고달프고 힘겨운 순간이 닥쳐와도 우리는 “이 모든 와중에도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은 단지 통과하거나 조종하거나 관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일터로 바뀌게 됩니다. 좋은 일이든 골치 아픈 일이든 무슨 일이 닥치든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세요?”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카이로스’의 시간관으로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립시다, history ‘히스토리’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관 hi-story “히 스토리”의 역사관을 갖고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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