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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성령이 없으면 교회교육도 없다!(고린도전서 2:14~3:1)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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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없으면 교회교육도 없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3장 1절

서론

오늘은 교육주일이자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전에는 교사주일이라 했는데 지금은 교육주일로 바꾸었습니다. 왜냐하면 교육 주체가 교사만 아니라 전교인 모두가 평생을 가르치는 교사, 평생을 배우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지론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평생교육원입니다.

 

우리교회는 전-현직 교사가 20여명 정도 됩니다. 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한 집사님도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교회가 계속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교회라는 것입니다.

교육(education, 敎育)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행위 또는 그 과정입니다.

 

서양의 교육목적은 민주시민 양성입니다. 국가와 사회에 유익한 민주시민으로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서양의 교육목표입니다. 여기에 근거하면 서양교육의 인간상()이 나옵니다.

 

이런 인간상을 영국의 정치가, 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거미-개미-꿀벌로 분류합니다. 거미는 거미줄에 걸린 나약한 것을 잡아먹는 해()된 사람, 없어야 할 사람, 개미는 주지도 않고 빌리지도 않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사람, 꿀벌은 이 꽃 저 꽃 수정을 해주고 열심히 꿀을 모아 남에게 제공하는 유익한 사람입니다.

 

사실 베이컨은 행동이나 인간생애를 가르치려 사람을 분류함이 아니라 학문을 대하는 태도를 거미-개미-꿀벌로 비유한 것입니다. 자기만의 학문을 고집하는 거미 같은 학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기주장이 없는 개미 같은 학자, 꿀벌처럼 여기저기에서 지식을 취해 결론을 얻어내고 자연을 이해하는 힘을 얻게하는 학자,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서양교육은 개인의 자질을 계발시켜 사회에 잘 적응하고 민주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는 시민양성이 교육목표입니다. 그러니 민주사회가 잘 정착되고 사고나 행동이 합리적입니다.

 

한국의 교육목표는 홍익인간(弘益人間), 배워서 남을 이롭게 함입니다. ‘단군신화에 근거한 교육목표로 건국이념과 같습니다. 인류에게 보탬되는 사람 만드는 것! 대한민국 교육입니다.

대한민국 인간상도 거미-개미-꿀벌처럼 분류할 수 있습니다. 많이 배웠지만 남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해를 끼치는 홍해(弘害)인간! 배운 것만큼 남에게 도움을 주는 홍익(弘益)인간, 충분히 배웠음에도 남에게 해도 이익도 되지 않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람 잉여인간.

 

대한민국 선생님들은 보수단체 교총에 속하든 진보단체 전교조에 속하든 학생을 내 신념의 수단으로 삼으면 홍해교사요, 학생을 내 밥벌이로 삼으면 잉여교사요, 학생을 내 목표로 삼는다면 홍익교사입니다. 우리 교회 일반교사님들은 모두 홍익교사들이 되십시오! 

 

오늘 교육주일, 교사주일인데 우리의 교육목표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꿈꾸는 인간상은 어느 기준일까요? 주일학교는 성인이 될 때까지 붙잡아 놓는 관리소인가요?

기독교교육의 참 목적은 예수님 인간상()입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어 예수님처럼 살게 하는 것!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그들 속의 하나님의 형상, 선한 자질을 계발하고 밖으로 드러나게 돕는 일이 교사입니다. 여기에도 세 가지 교사상이 있겠지요?

1. 육에 속한 교사(고전 2:14)

14, “육에 속한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을 다른 성경(흠정역)에는 ‘natural man’으로 나옵니다. natural man은 자연인, ()문명인, 성경은 이런 자연인을 옛사람라 규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나기 이전의 죄로 타락한 본성을 좇아 살아가는 죄인(3:10-18), 예수 믿기 이전의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채 죄와 허물로 죽음을 운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요약하면,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한 주일학교 교사입니다.

 

이런 교사는 어떤 상태일까요?

육에 속한 사람은 (,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교회는 다니지만 성령을 받지 못하고 성령의 역사를 믿지도 않아요! 그냥 교회에 다니고 주일학교 교사를 하라니까 교사를 합니다. 일종의 종교 아르바이트지요! 무료 알바생.

기독교교육 교과서는 성경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기록한 거예요! 삼국지나 수호지처럼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문학작품이나 유대역사물이 아니라 성령께서 알려주셔서 기록된 성령의 기록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의 소산이지요!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바울이나 베드로는 뭐라고 그래요? 모든 성경의 원저자, 1저자는 성령이고 인간저자 제2저자는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성경을 누가 해석하고 전달합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들! 거듭난 교사들이 성경을 가르칠 때 아이들은 성도가 되고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그런데, 자연인들은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14절 하반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것들이 뭐예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내용들, 우리는 거듭났고 성령 안에 있기에 다 진실로 보이지만 자연인들은 알 수가 없어요! 믿을 수 없다는 거지요!

천지창조 에덴동산, 인간의 기원, 죄의 기원 노아 대홍수 동정녀 탄생 십자가와 부활 천국과 지옥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정상입니다. 자연인은 과학 안에 있고 지성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극히 정상입니다. 이런 정상인들에게 비과학적이고 신비스러운 성경내용이 믿어질 리 없어요.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무슨 신화인지 전설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인다 미련하게 보임은 고대 헬라에서 신체적으로 둔하거나 장애인을 지칭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흉하게 보인다는 거예요! 이 개념을 바울은 정신적인 우둔함으로. 거듭나지 않는 자연인은 모든 가치를 육체적 물질적 기준에서 평가하고 과학적인 잣대, 내 경험적인 잣대로 해석하기에 자연인들에게 복음은 무익하고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육()에 속한 종교신자들이 교사가 되면 예수님을 바르게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한 단면만을 가르치는 거예요! 이를 시각장애인들의 코끼리 만지기라고 해서 맹인모상(盲人摸象), ‘사물의 일부만 보고 전체의 결론을 내리는 좁은 견해를 말합니다.

 

육에 속한 교사들이 성경을 가르쳐도 윤리로 가르치고 도덕적으로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착하고 좋은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으로 어떻게 아이들이 구원을 깨달으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며 그 안에서 예수님을 닮아 자라날 수가 있겠어요!

 

이런 육에 속한 자연인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해를 끼치는 홍해교사들입니다. 성령을 받은 적이 없는 교사, 면허증이 없는 무자격자입니다. 아무리 지혜롭게 전해도 그 지혜가 걸림돌이 됩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는 홍해교사들이 되는 것입니다.

2.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교사(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이들은 자연인이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거듭나기는 했어요! 구원도 받았어요! 성령 받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믿어요! 천지창조, 노아의 대홍수, 동정녀 탄생 십자가와 부활 천국과 지옥 이런 교리들을 믿어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의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래서 3절을 보입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인격의 미성숙, 지식의 미성숙 이런 교사들은 성령이 강력하게 사용하지를 못합니다. 도구가 안 좋은 거예요! 경주마가 안 좋으면 아무리 경주마선수가 뛰어나도 우승을 못합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지식도 있고 실력도 있어요! 그러나 영적으로 미숙하고 인격적으로 미숙해요! 걸핏하면 짜증 부리고 결석을 밥 먹듯 해요! 이런 도구에 성령께서 얼마나 역사하겠어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 교사들에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결함은 확신이 부족해요! 믿음은 있는데 그 믿음을 에너지로 만들어 내지 못해요! 아이들에게 주님을 전하면서 2천년 전의 주님, 성경 속의 주님을 전하고 끝나요! 지금 내 안에 임재하시고 역사하는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니 전달하지도 못합니다.

어린 자녀들이 아버지를 느끼면 얼마나 느낍니까? 아버지를 단지 먹을거나 주고 용돈이나 주고 학비나 대주는 존재라 생각한다면 아버지를 얼마나 과소평가합니까? 그게 어린이지요!

 

주일학교 교사 중에도 이런 교사들 거듭남은 있지만 내가 느끼지 못해요! 거듭났다는 확신! 거듭난 경험이 없으니 말씀에 힘이 없고 사명감이 부족합니다. 이런 교사들은 어떻게 보면 홍해교사 홍익인간도 아닙니다. 잉여교사입니다. 그 다음의 교사단계로 올라서야 합니다.

3. 영에 속한 교사(15, 1)

15, “신령한 자는

1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신령한 자는 영에 속한 자, ‘spiritual man’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숙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육에 속한 자연인과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넘어선 사람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내 안에 성령이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기에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고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습니다. 죄에 대해, 의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알고 믿게 됩니다.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그 안에서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그 성령을 받고 체험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영을 소유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고백하게 되고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점점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그에게서 예수님이 흘러나옵니다.

 

교육에서 교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교사는 성령이 흘러가는 파이프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나오는 파이프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들려 있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씀을 전해도 그 말씀이 강력하게 효력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우리 지역사회관 3층의 수도를 켜면 처음에는 약간 노란 물이 나옵니다. 서울시에서 노란 물을 보냅니까? 수도관에 문제가 있습니다. 수도관이 오래되고 노후하니 깨끗한 수돗물이 통과되는 순간에 불순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룩한 하나님의 책이고 변화의 책입니다! 성경 가르침을 전해주면 아이들에게서 변화의 모습이 나타나야 하는데 오래 믿어도 영적인 진보가 없고 변화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독교교육에서 성령-성경-교사-학생을 4대 교육요소라고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이니까 틀릴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에 무오합니다. 가르침에 변화가 나타나지 않으면 둘 중 하나의 책임입니다. 교사나 학생. <성령과 교육>이라는 책을 저술한 로이 쥬크 박사는 학생들보다는 교사의 책임이 더 크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성령을 전달하는 교사 파이프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학생들은 신령한 아이들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교리신자, 종교 신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주일학교 교사들이 힘쓸 일은 무엇인가? 성령 충만을 계속 지속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기도와 말씀, 예배로 계속 채울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해야 능력이 나타나고 학생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사람의 지혜는 육에 속한 교사의 자기 지식의 가르침입니다. 영적 일은 영에 속한 교사의 가르침입니다. 그런 가르침을 받아야 우리 학생들은 영적인 일들을 이해하고 영적 성숙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런 교사들에게서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나면서 아이들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이것이 기독교교육의 목표입니다. 교회가 교육교회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결론

고대 희랍인에게 어린이교육은 돌멩이 국과 같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어린이교육은 교육 중에서 가장 까다로우며 모두의 협력과 이해와 사랑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나온 격언입니다.

 

인색한 네 형제가 살았습니다. 형제들끼리도 나눔이 없는 구두쇠들입니다. 현인(賢人)이 그 말을 듣고 나그네복장으로 방문했습니다. 인색하다는 소문은 사실이었습니다. 나그네가 찾아들었지만 대접할 생각을 하지 않고 서로의 눈치만 볼뿐입니다.

현인은 주머니에서 차돌 몇 개를 꺼내었습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돌멩이였습니다.

이 돌멩이는 특수하오. 잘 끓이면 기가 막힌 국물이 나온다오. 냄비를 빌려줄 수 있겠소?"

현인은 냄비에 물을 가득 부어넣고 차돌을 집어넣었습니다. 펄펄 끓자 순서대로 말했습니다.

 

첫째에게: “여기에 된장 한 숟가락만 들어가면 더 맛있을 것 같지 않소?”

둘째에게: “배추 한 포기만 들어가면 더 맛있을 것 같지 않소?”

셋째에게: “혹시 두부가 있소?”

막내에게: “좋은 국이 되려면 고기 몇 점 정도는 들어가야 하지 않겠소?”

 

현인은 다 되었다며 국물을 떠 주었습니다. 최고의 고깃국이었습니다. 차돌은 그냥 차돌! 인색한 형제들이지만 내 것을 내어놓았을 때, 형제들이 서로 협력할 때 최고의 맛있는 고깃국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교육은 성적을 올리거나 지식을 채워주는 교육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는 교육 주변의 협력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맛있는 돌멩이 국을 만들려는 심정으로 우리가 서로 이해하며 협력할 때 우리교회의 교육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교사님들에게 구역장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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