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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나의 달려갈 길(디모데후서 4:7, 8)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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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달려갈 길

디모데후서 4:7, 8

서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존재라고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죽음을 알고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을 생각합니다.

화란의 인문학자인 에라스므스(1465-1536)는 연로했을 때 "나는 노병이다. 나는 나의 제대 명령을 얻고있으니 싸움은 젊은 사람들에게 맡겨야겠다" 라고 했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은 35세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35세 이전의 삶은 인생이 무엇인가를 전혀 의식치 않고 그저 무엇엔가 끌려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84년에 나온 책을 보니, 당시 지구상에는 전쟁 없이도 자연적으로 1초에 3명, 하루에 3만 명이 죽어간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들 차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인간이 죽는다는 절대 원리를 늘 잊지 말고 살아야 그 사람의 됨됨이가 제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도 죽음의 목전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6절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위대한 투사인 바울은 평생 싸워왔던 전쟁터에서 이제는 무기를 내려놓고 돌아가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떠난다"는 헬라어는, 천막의 로프를 푸는 뜻으로 쓰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제 다시 천막을 걷어치울 때가 온 것입니다. 소아시아와 구라파 각지에 걸쳐 바울은 많은 여행을 했습니다.

이제 그는 최후이면서도 가장 위대한 여행길을 떠나는 것이며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여로를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달려갈 갈 길을 다 마치고 이제 제대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노병의 심정으로 본문을 기록했습니다.

1. 바울은, 정해진 코스를 달렸습니다.

달려가는 사람은 선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해진 코스를 달려야 합니다.

미국에는 장거리 경주가 있는 데 정해진 레이스를 달리지 않고 지름길을 택했다가 나중에 발각이 되고 우승이 취소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바울은 목표가 분명했고 합당한 코스를 잘 달렸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나름대로의 코스를 달려왔습니다. 그 코스는 그리스도교를 대적했고 교인들을 잡아 가두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된 이후, 그의 삶이 변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고 행복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날부터 세상적인 모든 것은 분토물처럼 여겼습니다.

그의 인생 코스가 변한 것입니다. 그날부터 그는 한번도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달려가는 길이 진리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7절 "믿음을 지켰으니"

헬라의 큰 경기는 올림픽입니다. 그들은 경기 전에 신들 앞에서 선서를 했습니다.

 

*10개월 이상 훈련을 받았다!

*승리를 위해서 비열한 행동은 결코 하지 않겠다.

 

바울은 이런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규정을 지키며 경기를 해왔다"

사업적인 의미로는 "나는 계약의 여러 조건을 지켰으며 그 약속에 대해서 성실하였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장수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사냐? 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목표가 뚜렷해야합니다. 얼마나 길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 제 코스를 달렸느냐가 더 소중한 것입니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지막 날에 그것을 묻습니다.

2. 바울은, 장애물 경기를 잘 달렸습니다.

달리기에 장애물 경기가 있습니다. 앞에 여러 장애물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장애물을 잘 넘어가야 끝까지 달려갈 수 있습니다.

인생의 경주는 누구에게나 요소마다 장애물이 있습니다. 이런 장애물을 만나 쓰러지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목표를 향해 자기의 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강물의 위협, 강도의 위험, 홍수, 40에 하나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고 투옥하며 멸시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바울의 그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장애가 많습니다. 어느 할머니는 교회가 있는 도중에 도적을 맞았다고 하여 교회를 그만두셨다고 합니다. 이보다 더 곤란스런 문제, 살아가는 데 절대적인 영향이 있는 장애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장애물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장애물 앞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유명한 앵커인 데이비드 브린클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은 가끔 빵 대신 벽돌을 던지는 데 어떤 이는 원망해서 그 벽돌을 차다가 발가락이 부러지고 어떤 이는 그 벽돌을 주춧돌로 삼아 집을 짓기 시작 한다."

장애물을 다루는 사람의 자세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3. 바울은, 장거리를 달렸습니다.

달리기 중에 가장 힘든 것이 장거리일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들에게는 2시간 이상을 달려야 합니다. 단거리는 비록 꼴찌가 되더라도 고생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거리는 끝까지 달리고 꼴찌까지 하니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바울은 그 먼 장거리를 달려갔습니다. 그만큼 수고가 컸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먼 거리를 달리는 것입니다. 한 주간은 누구나 성자(聖者)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 성자(聖者)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장거리는 빨리 달린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제 코스로 달려야 하며, 같은 템포로 구준히 달려야 합니다.

 

미국의 가수이며 라디오 방송인으로 크게 성공한 에디 캔터는 성공을 향해 정신없이 달리는 전형적인 미국 청년입니다. 하루는 시골에 사는 어머니로부터 짧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에디야, 너무 빨리 달리지마라! 그렇게 하면 좋은 경치를 보지 못하느니라!"

 

이때부터 에디는 달리다가도 다음과 같은 4개항을 수첩에 적어놓고 스스로의 발길을 조절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맹목적인 야심을 향해 달리고 있는가,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 달리고 있는가?"

 *나는 나의 경력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나의 가정의 행복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나는 물질적인 성공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인생의 참다운 보물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남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누구나 짧은 충성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충성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래도록 믿어온 사람들에게 더욱 존경을 보내야 합니다.

산을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분명히 인생에서도 어려운 것은 그 종말입니다.

 

어떤 저명한 의사가 자서전을 쓰라는 권고를 받고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 마지막 한 바퀴에서 낙오하는 것을 보았다" 라며 사양했습니다.

장거리에서 마지막 한바퀴가 중요합니다.

4. 바울은, 상급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달리기 선수들은 왜 오랜 훈련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면류관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승을 하고 골인 지점의 테이프를 오른손으로 탁 치는 그 영광스런 날들을 기약하며 그들은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뛰는 것입니다.

헬라의 경기 중에서 가장 큰 상은 월계수관이었습니다. 월계수관을 받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알았습니다.

 

바울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상(賞) 주시는 이가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 상은 월계수관이 아닙니다.

월계수관은 며칠 못가서 시들어 버립니다. 세상의 명예와 상급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월계수가 아니고 면류관입니다. 그 면류관을 바라보았기에 그는 고통을 다 견딜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상급이 있습니다. 그 상급의 채점 기준은 세상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만의 기준이 있습니다.

 

어느 왕이 엄청나게 큰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는 하늘나라에서 자기의 상이 가장 큰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보았더니 말에게 여물을 준 여인이 가장 큰 상급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늘 상급의 기준입니다.

결론

어느 무덤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죽음이 올 줄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너무 평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오히려 상급을 받기 위해 하나님에게로 떠나는 여행입니다.

"떠난다"

동물을 달구지나 쟁기에서 벗긴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은 인생의 노고에서 그를 쉬도록 하기 위해 멍에를 벗겨주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야 나의 종말이 가까웠다.  그리고 나는 나의 보답을 받으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네가 나의 발자취를 따른다고 하면 너도 종말에 이르렀을 때 나와 같은 확신과 기쁨을 느낄 것이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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