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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갈라디아서 2:20, 21)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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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고서적에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갈라디아서 2장 20, 21절

서론

독일 기자 위르겐 슈미더라는 사람이 4년간 30여개 종교를 섭렵한 이야기를 담아 <구원 확률 높이기 프로젝트>라는 책을 냈습니다. 34세인 슈미더 기자는 세상종교를 하나로 단일화하거나 깡그리 없애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고 이왕이면 많은 종교를 믿고 각 종교들이 가지는 장점을 취하자는 범신앙론자(Alltheist)입니다. 슈미더 기자는 종교 섭렵 시작 석 달 만에 7번 개종했다고 합니다. 예배도 참석해보고 의식도 참석해보고… 그래서 얻은 결론은 “어떤 신을 믿느냐, 보다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그게 종교의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종교를 가질 때, 어떤 신을 믿느냐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 그게 목적인가요? 종교학으로 말하면, 맞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남을 이롭게 하는 선한생활을 해야 하는데 내 스스로는 그게 쉽지 않으니 종교의 힘, 교리의 힘을 빌리고, 신적 존재에 해당되는 종교 창시자의 가르침을 받아 착해지고 구원 받으면 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신을 믿느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하나님도 좋고, 하늘님도 좋고, 옥황상제도 좋다… 어느 신(神)도 괜찮다, 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종교가 많고 이렇게 신이 많은 다신론 세상이 된 것입니다.

 

종교는 인본주의 종교와 신본주의 종교로 나눕니다. 인본주의 종교는 사람이 주인공이고 신이 나를 위해 존재합니다. 종교도 내게 맞춰 내게 도움이 되는 종교를 구합니다. 해탈을 통해 무아지경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내가 우주의 원리를 깨달았으니 내가 스스로 신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교주가 신이냐, 부활했느냐?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를 깨우치는 가르침만 있다면 어느 종교든 훌륭합니다.

 

일반종교에서 교주나 창시자는 신(神)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유교의 공자는 중국 송나라에서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 사이에 출생합니다. 아버지는 첫 부인에게서 딸만 아홉을, 둘째 부인과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다리가 장애인입니다. 건강한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는 다시 결혼했는데 이를 사마천은 야합이라고 기록합니다. 야합(野合)은 예(禮)에 맞지 않는 결혼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숙량흘은 70살이 넘었고 안징재는 16세였으니 야합입니다.

 

불교 창시자 석가모니 이름은 싯타르타입니다. 싯타르타는 지금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 있는 인도 출생입니다. 성주(城主) 정반왕과 어머니 마야부인 사이에 태어나는데 출생 7일 만에 모친은 타계했고, 이모의 손에서 양육됩니다. 싯다르타는 어려서부터 너무 사색적이라 출가를 염려한 정반왕은 19세 아들을 서둘러 이웃나라 성주의 딸과 결혼시켰고 아들을 얻습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결혼생활보다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인간고뇌에 골몰합니다.

 

어느 날 성밖에 나갔다가 꾸부정한 노인, 죽음을 슬퍼하는 유족, 병자, 힘들게 농사짓는 천민들에게서 인생무상과 번뇌를 목격하고 고민하다 출가 수행자의 편안한 용모를 보고 마침내 출가합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생노병사의 원인을 알고 해탈의 원리를 터득합니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됩니다. 석가모니는 석가족의 훌륭한 사람, 즉 깨달은 자, '붓다'(부처)입니다.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의 원래 발음은 무함마드입니다. 사우디아라비의 상인 아들인데 아버지는 출생 직전에 죽고 어머니도 여섯 살 때 사망하여 고아가 됩니다. 그러다가 25세의 나이로 여주인이자 40세의 부자 미망인과 결혼합니다. 2남 4녀가 태어나는데 두 아들은 어려서 사망했고 딸도 하나만 남고 무함마드보다 모두들 먼저 사망했습니다.

 

이러니 세상 살 맛이 나겠어요? 40세가 되었을 때 동굴에서 명상생활을 하다 가브리엘(지브랄) 천사를 통해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첫 부인이 죽은 후 10여명의 후처를 두었는데 부인중에는 9살짜리도 있었답니다. 심지어는 양자의 아내까지 후처로 삼았습니다. 일설에는, 부인중의 하나가 우리 남편이 진짜 신적 능력을 가진 사람일까? 라고 몰래 음식에 독약을 넣어 죽는지 안 죽는지 확인하는 시험과정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신본주의 기독교를 인본주의 종교와 비교하다보니 나온 것입니다. 공자나 싯타르타나 마호메트 신이 아닙니다. 신이라 자칭한 적도 없고 신으로 숭배하라고 강요한 적도 없습니다. 공자나 석가모니는 2,500년 전에 죽었고 마호메트는 약 1500년 전에 죽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분명히 신이 아닙니다. 교주는 죽고 가르침만 남습니다.

 

그러니 이런 종교들은, 공자 석가모니 마호메트가 신이냐, 부활이냐? 에 관심이 없습니다. 창시자의 생애에 관심이 없습니다. 3대종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종교가 아니라 유교는 이상 현실을 만들려는 정치체제, 불교는 철학종교, 이슬람은 종교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러기에 창시자가 신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고 부활이 없어도 관계가 없습니다.

 

유교는 공의와 인간예법에 관한 가르침으로 사람의 도리를! 불교는 삼라만상 자비와 수행을 통해 해탈을, 이슬람은 알라의 뜻을 알고 교도의 의무만을 이행하면 됩니다. 그래서 위르겐 슈미더 기자는 이렇게 다양한 종교를 섭렵하면서 각 종교의 장점을 발견하고 좋은 사람이 되는 비율을 높이고 구원확률을 높이는 방법을 터득하자고 책을 쓴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앞에서 말하는 종교들과 어떤 차별이 있습니까? 세계 3대 글로벌 종교의 창시자들은 대부분 불행했습니다. 공자는 70이 넘은 아버지와 16세 어머니의 야합(野合)으로 태어났고 싯타르타는 생후 7개월 만에 어머니를 잃고 이슬람의 무함마드는 아예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어머니마저 여섯 살 때 사망하여 고아가 됩니다. 그러니 종교가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적 관점이라면 더 불행합니다. 아버지조차 모르기 때문입니다. 목수 요셉은 아버지가 아니고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세상 사람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고 끝까지 예수의 생부(生父)가 누구인가를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유교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모든 창시자들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모두 훌륭한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유교는 옳음, 불교는 자비를, 이슬람은 엄격한 생활을, 기독교는 사랑의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여러 종교에서 좋은 점들만을 뽑아 그것을 내 것으로 삼는다면 훌륭한 인격자가 될 수 있습니다. 네 분을 종교 멘토로 삼는다면 구원의 확률을 훨씬 더 높일 수 있다는 것이 위르겐 슈미더의 ‘구원 확률 높이기 프로젝트’가 아니겠어요?

 

여기까지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이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사정을 살펴보면 아닙니다. 세 종교 창시자들은 그냥 사람입니다. 스스로도 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제자들도 저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말한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으로서 인간의 도리, 우주의 원리를 깨우친 부처다! 라고 말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 자신이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의 요청에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찌 하나님을 보여 달라 하느냐?” 합니다.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저가 누구인고! 하나님이다! 라고 말합니다. 도마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로마 장교는 “저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외칩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다른 종교는 사람에게서 출발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으로 출발합니다. 다른 종교는 창시자를 진리를 깨달은 자, 각성자 부처라고 하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을 진리 자체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따르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따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부활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바울은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말합니다. 바울은 다른 종교와의 차이를 가르침에 두지 않고 가르침 이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하고 하나님으로 믿도록 합니다.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죄의 형벌이고 형틀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 그것도 로마반역죄나 죄질이 나쁜 죄수들을 본때를 보여주려 매달아 죽이는 형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빌라도조차 죄를 찾지 못해 석방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죄의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가 없음에도 죄인의 형톨에 달려죽었다는 것은 당신 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의 죄, 내 죄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속죄를 말합니다. 다른 종교들은 인간정치가 부패한 것은 제도 때문이요, 인생의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운명이요 팔자라 하고 이슬람은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은 이방인들 때문이요, 테러를 하면 천국에서 각종 미녀들과 행복한 생활을 즐기지만 기독교는 인간불행이 다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불행이 하나님께 거역하고 불순종한 죄로 온다는 것입니다. 그 죄를 위해 예수님께서 내 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시고 내 죄와 함께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는 은혜가 있고 감동과 감격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위해 죽어줍니까?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 되었을 때에… 그것도 죄인으로 살고 있는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입니까? 이런 교리는 다른 종교와 비교할 수도, 찾아볼 수도 없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끝나면 죄가 처리되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지 못했다면, 거대한 무덤은 만들었겠지요? 그러나 우리 죄는 처리되지 않습니다. 죄를 대신 지고 죽었는데 부활하지 못했다면 예수님도 자기 죄로 죽었고 우리 죄는 처리되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은 부활로 죄를 없애는 사명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더 나아갑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지금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없는 이유이고 성령으로 잉태하여 탄생하게 된 까닭입니다. 만약 예수님도 다른 종교 창시자들처럼 아버지 어머니가 있고 죄인들끼리의 야합(?)을 통해 출생했다면 2천년 전에 죽고 끝났을 것이고 기독교는 사랑의 가르침으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종교로 만족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2천년을 살아계십니다. 부활 사건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 자신에 주목했습니다. 부활 예수님께서 영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예수 신이 그들 안에 들어와 산다.”고 했고 성도들도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초대교인들이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이후의” 생활이 달라졌음을 뜻합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는 그의 책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장례식을 하면서도 즐겁게 노래하고 밝은 얼굴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사셨고 그들은 마음에 엄청난 분을 모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엄청난 분을 모셨으니 생애가 엄청났고 활력이 넘쳐나고 예수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축구선수가 경기 도중 상대방과 충돌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는데 기억상실증을 보였습니다. 몇 달 입원했다가 시합에 복귀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운동장을 펄펄 날며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변한 것입니다. 기자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묻자 감독이 대답했습니다.

 

“저 놈이 왜 저렇게 날뛰는지 나도 잘 모르겠소. 기억상실증에 걸린 저 녀석이 내가 누구냐고 자꾸 물으니까 귀찮아서 너 축구 황제 펠러잖아 하고 대답했더니 저 모양입니다. 자기가 펠러인 줄 아는가 봐요.”

 

바로 이것입니다. 무명의 축구선수는 자기가 축구황제 펠러로 착각합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펠러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펠러처럼 날뛰며 스트라이커(striker)가 된 것입니다. 

이게 제자들의 생애입니다. 부활 예수님이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 죽음의 돌무덤까지도 열어버리신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에너지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에너지가 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찬양이 에너지가 되고 기도가 에너지가 되고 헌금이 에너지가 됩니다. 전에는 게을러서 힘들어서 아까워서 못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다. 세상 끝까지 나와 함께 해주마, 그 약속에 펄펄 날뜁니다. 비로소 성도 하나하나가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로마제국이 기독교화가 되었고 유럽이… 지금은 중국이 기독교화되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가르침만이라면 역부족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으로 살아내기에 생애가 변하고 활력이 생기고 순교까지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정적이 아니라 동적종교입니다.

결론

어떤 사내가 산길을 걷다가 해가 저물었습니다. 으슥한 곳에 자리를 만들고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습니다. 담뱃재가 떨어지면서 냄새가 났습니다. 바위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푹신한 마른풀이라 생각했는데 호랑이를 깔고 앉은 것입니다. 호랑이가 내빼는데… 앉아있으려니 떨어지겠고 뛰어내리려니 죽을 것이고… 미칠 노릇입니다. 호랑이는 호랑이대로 겁에 질려 있습니다. 더 놀란 것은 마을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이 호랑이 등에 올라타서 담배를 피우며 호랑이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권세에 위압당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형국입니다. 제자들은 3년을 예수님이라는 창조주의 세력 하에 있었습니다. 엄청난 에너지도 이양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에너지는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불발탄으로 끝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들어왔습니다. 1마력짜리에 100만 마력짜리 엔진이 부착된 것입니다. 그들의 배움이 에너지가 되었습니다. 거침없이 달렸습니다.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이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외쳤습니다. 

 

“어찌된 일이냐? 그들은 우리와 같이 있던 자들인데… 어떻게 된 노릇인가?”

제자들만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 “부활하신 예수!”

 

우주비행사 존 글렌은 우주를 여행한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 우주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토록 엄청난 속도로 우주를 항해할 수 있었던 것은 우주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우주선의 힘으로 창공을 박차고 올라갈 수 있었다. 우주선 안에 있기에…”

 

잠재된 에너지는 무엇을 만났느냐? 로 엄청난 에너지를 발생합니다. 황토 한 스푼에는 2억마리의 무생물이 있습니다. 그냥 흙이지만 물이 들어오고 태양과 접촉될 때 수많은 생명을 만들어 냅니다. 마른덤불과 가지는 불이 붙었을 때 맛있는 식탁을 만들어내고 흙 속의 석탄은 불이라는 에너지를 만나면 쇠를 녹이는 용광로가 됩니다.

 

“우랴늄”이라는 원소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폭발력이라는 에너지를 만났을 때 원자폭탄이 되어 일본을 날려버렸고 천황의 항복을 받아 냈습니다. 잠자던 구리와 철사는 과학자의 에너지가 들어갈 때 전화가 되고 통신이 되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스타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발탄으로 살겠습니까, 핵폭탄으로 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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