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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주님을 드러냄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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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주님을 드러냄

사도행전 7:54-60

서론

불교가 마음을 비우는 종교라면 기독교는 마음을 채우는 종교입니다. 마음을 비우기 위해 불교도들은 인적이 드믄 곳을 찾아 수도를 하고 고행을 하지만 마음을 쉽게 비울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온갖 번뇌가 나오는 샘이기 때문입니다.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예레미야의 말씀처럼 인간은 부패하기에 쉽게 비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마음을 채우는 종교입니다. 우리도 불교도들처럼 마음을 비워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음을 비울 때 인간은 욕심이 사라지게 되고 욕심이 사라지면 인간은 자족하게 되고 만족한 삶은 곧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마음을 깨끗이 비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요, 그리고 그것은 너무도 많은 희생과 오랜 고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원죄, 즉 부패한 마음을 갖고 출생합니다.

우리가 숨을 쉬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계속 악을 호흡합니다. 이것을 비우고 이런 욕망에서 내가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것만 가지고도 우리의 힘은 모자랍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세상에서 수도자로 살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문명을 무시할 수도 없고, 생활을 책임져야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윤회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마음을 비우라는 가르침은 같습니다.

우리의 속에 있는 헛된 욕망, 욕심 등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버림은 불교와는 다릅니다. 불교에서는 그냥 마음을 비우려고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채움으로 마음을 비우라고 합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을 나 자신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에게 둡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의 욕심은 자동적으로 비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신뢰, 수용, 영접 동의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분의 가르침에 동의한 것이고 그분을 영접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며, 이 세상에서도 신뢰하지만 죽음 이후의 삶까지도 신뢰하겠다고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분을 마음속에 영접하려면 우리는 마음속을 비워내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어떤 마음입니까? 그 마음은 예수의 씨앗이 자라기에는 너무 굳거나 딱딱한 땅은 아닌지요. 목회를 하면서 가장 마음이 괴로울 때가 내 본성의 토질이 너무 좋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때였습니다.

 

어제 친구 목사의 위임식에 다녀오는 데 할머니가 밭에서 돌들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배추를 심던지 뭔가를 심을 작정인가 봅니다. 크고도 작은 돌, 그것들을 골라서 가지런히 쌓아놓은 것을 보고 내 속도 파보면 지금 저것보다 더 하겠지, 하는 부끄러움이 몰려왔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내 자신을 성찰하는 일들을 해야합니다. 신앙생활은 교회 오고 예배하고....  이런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생활, 종교생활일 뿐입니다. 파종할 때 제대로 비우지 않으면 평생 헛수고, 헛 신앙 농사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프랜시스가 수도사 생활을 하기 전에 참으로 사랑했던 청순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수도승생활을 했지만 자신을 잊지 못하고 있는 그 여인을 프랜시스 역시 떠나보내지를 못했습니다.

 

어느 눈 오는 날, 다른 수도생들이 밖을 보았더니, 프랜시스가 여자 눈사람과 그 옆에 몇 아이의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 지워버리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자기의 장례식을 집례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과의 싸움을 통하여 내 속에 있는 큰 돌멩이, 작은 돌멩이, 가시 등등을 뽑아내야 하고 골라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 분을 영접해야 하고 그분의 삶을 동의해야 합니다.

2.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합니다.

채움은 예수님화()하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면 사람은 속에 들어가 있는 술을 어떤 모양으로라도 표현합니다. 많이 들어가 있으면 많이 들어가 있을수록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우리의 속에 예수님이 많이 들어가야 합니다.

 

본문의 스데반 집사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입니다.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혜가 가득했습니다. 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칭찬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차분하게 자신의 신념을 남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 받았다고 펄펄 뛰기만 하는 그런 신앙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채워지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여자분들이 막달이 되면 아이가 밖으로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지면 예수님이 나옵니다.

 

지금 스데반이 당하고 있는 현실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살벌하고 공포감으로 얼굴이 찡그러져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6:15)

 

천사의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을 표현하는 또 다른 표현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와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이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이권이 없습니다. 거저 예수님을 잘 믿어보기 위해, 예수님의 삶을 살아보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이곳은 예수님처럼 살기에 가장 적당한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좋은 장소에서의 신앙생활마저 못하고 있다면 밖에 나가서는 전혀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흘러나오지 않고 있습니까? 채움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남녀가 결혼생활을 한다고 아이들을 낳는 것입니까? 생명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속에 진짜 예수의 생명이 들어가야 합니다.

  

이천 년 전의 그 예수,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살아 계신 그 예수께서 내 속에 들어가 채워져야 합니다. 그 인격이 들어가야 합니다.

씨앗에 생명이 있어야 싹이 나오고, 달걀은 그 속에 생명이 들어있어야 그것을 품을 때 병아리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채웁니까? 그분을 인정하십시오. 열심히, 진지한 마음으로 깊이 묵상하며, 항상 자신을 성찰하십시오.

남에 대해서는 잠시 잊어버리십시오. 남의 신앙에 너무 간섭할 때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 자신들을 살펴보며 예수로 가득 채워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3. 어떻게 주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1) 우리의 겉이 부서져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백 여 년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들이 어떤 백성인가, 어떤 약속을 가진 백성들인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을 통하여 애굽이 깨어졌고 애굽이 부서졌을 때 온 천하에 드러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겉이 파쇄 되어야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성서의 영웅들을 많이 조각한 사람입니다. 그는 조각을 할 때 조각 속에 갇혀있는 아브라함을 보고, 다윗을 보고, 모세를 본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바위덩어리에 불과한 것들이 사실은 그 속에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이 숨겨져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려고 조각가는 망치와 끌로 힘들게 작업을 합니다. 나오는 것은 망치로 두들겨 없애버리고, 들어간 것은 끌로 주변을 쳐버림으로 돋우어 줍니다. 그러면서 거대한 생애는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조각가입니다. 그분은 나를 조각해 나갈 것입니다. 그분께 순종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계속 그분의 망치와 끌에 얻어터질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속에 채우고 그분께 맡기는 삶을 살 때 그분은 우리를 훌륭히 조각해 나갈 것입니다.

 

2) 희생을 통해 주님이 드러납니다.

여기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는 순교라는 희생을 통해 주님을 강하게 드러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비롭고 평화스러운 얼굴로 죽어 가는지 모두들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예수님과 같은 용서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사울이 그 장면을 보고 녹아져 버렸습니다.

 

나무는 가만히 있으면 냄새가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무가 상처를 받을 때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인생의 상처를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의 상처를 통하여, 희생을 통하여 주님이 드러납니다.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바로 인생의 상처를 통해 주님이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내놓을 것은 건강할 때 하던 봉사보다는 상처를 통해 주님과 깊은 교통을 나누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참회하며 눈물로 다듬어진 그 인격이 하나님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아닌지요.

결론

이제 우리 주님과 교통하십시오. 매일 그분을 느끼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우리 마음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빌 1:6). 우리는 아무리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도 늘 자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내 속에 계신 그분이 일하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그분에게 겸손히 자신들을 맡기면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늘 새롭게 빚으시며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드러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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