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정훈 목사 신간 <모세도 그랬어> 한달만에 3쇄 돌입!!!
"모세'는' 아니고, 모세'도'라니, 토씨 하나를 바꾸어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
(김영진 성서원회장 기독교신문 2025. 9.28 서평)
지옥부자의 음부기도
누가복음 16:19~31
그 유명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이다. 인형극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골 메뉴이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실화보다는 예화이다. 부자는 왕같이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부자가 입었다는 자색 옷은 당시 왕이나 귀족들이 입던 매우 비싼 옷이었으며 고운 베옷은 두 배나 더 비쌌다. 부자는 매일 잔치를 벌여 세상 연락을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 세상에서는 참 좋았다.
그렇다고 부자가 나쁜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다. 나쁜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흔적은 없다. 또한 부(富) 자체가 죄도 아니다. 젊을 때 고생하고 남들이 먹을 때 먹고 싶은 것을 참아내었다면 늙어서 성공한 남자가 좋은 파티를 하며 맛있는 음식에 취하여 살 수도 있다. 문제는 그의 생활에 빠진 것이 있었다. 기도와 구제이다. 유대인들이 가장 우선시되는 덕목이다. 그래서 부자는 지옥행 열차를 탔다. 지옥에 도착한 부자는 그 상황이 너무 힘들어 천국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리고 있다. 기도라기보다는 간청이다.
세상부자, 세상에서 기도가 없었다
부자는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은 아니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는 유대인 선민 혈통이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는 혈통만 지니고 있었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없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살았다면 그렇게 날마다 호화롭게, 그것도 대문 앞에 있는 거지 나사로에게 무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하나님을 삶 속에 모시지 못했기에 가난하고 병든 나사로를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고 있는데도 모른척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재물의 강한 부정적 흡인력과 믿음이 없는 부자들의 냉혈성(性)을 경계하신다.
부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기에 하나님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불러주는 이름은 세상에서 끝난다. 죽은 이후에 불러주는 이름이 진짜 성공적인 이름이다.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대한다면 세상에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고 찾고 그 이름을 위해 살고 예배하고 영광을 올려야 한다.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21:13)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던 그는 지옥에서 눈을 들다가 우연히 조상 아브라함의 모습을 발견했다. 조상님이라는 생각에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아브라함을 부른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24절)
유대인에게 아브라함은 신앙의 조상이기에 ‘아버지’라고 부른다(요 8:39). 부자는 아브라함 혈통의 유대인,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 됨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처럼(마 3:9) 혈통적 특권에 의지하여 아브라함의 긍휼을 간구한다.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24절)
지옥에 대한 단편 자료들이 있다. 풀무 불(육체적 고통), 지옥(地獄. 지하 감옥),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곳,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지 못하는 곳, 영적 절망과 소외감이 계속되는 영벌의 장소이다. 60, 70년의 삶도 이렇게 힘들거늘 영벌을 받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누구나 지옥 이야기는 싫어한다. 인간 심리에 지옥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 부자. 유대인의 덕목인 구제를 하며 기도하며 살았다면 지금 천국에 있을 텐데… 기도가 없었던 생애의 결론이 지옥이다.
지옥부자, 음부에서 기도하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25절) 라고 한다. ‘네 좋은 것’은 부(富), 명예, 명성, 즐거움… 등등이다. 그 좋은 것들은 지옥까지 가져 올 수 없었다. 대신에 불꽃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한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다. 나사로는 부자의 집 앞에 누워있던 거지이다.
거지 나사로의 행복한 모습과 비교해 볼 때 부자는 철저한 결핍과 소외의 상태이기에 더욱 지옥스럽다. 그만큼 자신의 처지가 수치스럽고 나사로가 부럽고 자식들이 받을 형벌을 생각하니 본능적으로 부성애가 일어난다. 형제들도 생각났다. 그래도 내 새끼, 내 형제 귀한 줄은 아는 부자이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지옥에서도 이성(理性)은 세상에서처럼 작동한다. 멀쩡한 지성으로 영원히 거주하다니, 그런 점을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부자는 자식들과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세상에서는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을 기도를 한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27절)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28절)
나사로를… 보내소서. 지옥 부자는 나사로를 자기 메시지를 전달하는 종으로 생각한다. 현세에서의 신분 차이가 지옥에서도 효력이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지옥 부자는 아버지라 불렀지만 정작 아브라함은 그리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답한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애 너는 살았을 때에…”
아브라함은 지옥에 있는 부자를 자녀로 생각하지 않았다. 너와 나와는 어떤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관계가 없다는 것은 요청을 들어줄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이름은 그의 인격이고 업적이다. 우리는 이름과 함께 지위나 직분을 부른다. 회사를 그만두어도 회장님 과장님…이라 부르고, 학교를 그만두어도 선생님, 교장 선생님… 이라고 부른다. 목회를 은퇴했다고 누구누구… 씨(氏)라고 하지 않는다.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이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를 부를 때, 고인이든 생존자이든 아무개, 걔… 라고 부른다면 존경의 표시가 아니고 그만큼 덕(德)을 남기지 못한 것이다. 누구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할 때 “걔 있잖아”라고 말한다면 유명하기는 했지만 자기 이름이 없기에 성공적인 삶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성공한 남자, 그 부자를 “얘!” 라고 부른다. 그나마 혈통적으로 유대인의 자기 자손이니 “얘”라고 한다. 영어성경에는 ‘child’ ‘My friend’이다. 이 말은 다정한 의미보다는 ‘너’ 정도이다. 아브라함이 ‘너’라 부르면 하나님은 무엇이라 부를까.
“도무지 너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마7:23 참조)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한 일도 기억이 안 된다. 이 세상의 업적이 죽음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없이 ‘바람에 나는 겨’(시1:4)처럼 날려가 버린 것이다.
아담은 모든 동물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었다(창 2:20). 그가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 존재는 짐승만도 못하다. 짐승만도 못한 게 귀신들이다. 그들은 이름이 없다. 사람들을 두렵게 무섭게 하고 악한 길로 조종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물속에 불속에 집어놓고 자살하게 만든다. 우울증으로 고생하게 한다. 그만한 능력자이지만 그들은 이름이 없다. 그냥 귀신이다. 지옥에서는 절대 이름이 없는 미미한 존재로 영벌하게 된다.
나사로는 거지이다. 이름은 있었지만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다. 장례식에는 부고(訃告)도 없고 비석도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얘’라 하지 않고 이름을 불러준다. 나사로(25절). 세상에서는 비록 이름을 얻지 못했고 명예와 업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천국에서 그는 나사로라는 엄연한 자기 이름이 있다. (천국에서는 그럴 리가 없지만), 세상적인 표현이라면 문패(門牌) 있는 집에 살았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이런 희망 속에 기대 속에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불러주시는 이름이 있음을 기대하며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옛날 성도들은 이렇게 노래한 것이다.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또한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 영원토록 누릴 영화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우리는 이렇게 자기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다.
부자기도, 음부의 구렁텅이를 넘을 수 없다
지옥부자의 간청은 거절된다. 돈이면 다 되던 세상에서 왔는데 지옥 세상은 돈 가지고 안 되고 눈물 호소도 통하지 않는 곳이다. 부자의 간청을 들은 아브라함은 거절한다.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25절)
부자는 세상에서 좋은 것으로 호강했고 명성도 얻었다. 그것은 세상의 소유이다. 세상의 소유에는 끝이 있다. 하나님이 없는 소유는 오래가지 못한다. 시들어 버릴 면류관이다. 허무하다. 부자는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 한 번도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 없었다. 자기의 힘으로 살아왔고 스스로 영광을 누려왔다. 이제 세상을 떠나 저승에 와보니 위로받을 건더기가 없다.
하늘의 위로는 세상에서의 위로에 덧붙여지는 것인데 그는 세상에서 남을 위로한 적도 없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의 위로가 컸던 만큼 하늘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영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솔로몬. 세상 영광은 다 누렸다. 그러나 죽음에 임박하게 되었을 때 그는 노래한다.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 그러나 바람을 잡는 것과 같도다”
부자는 세상에서 너무 넉넉하여 위로받을 일이 없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위로도 포함된다. 아브라함이 부자의 요청을 거절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나온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26절)
내세는 두 가지에서 단절된 곳이다. 우선, 천국과 지옥이 단절되어 있다. 그 사이에 구렁텅이가 있다. 원어는, ‘큰 구렁이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서’이다. ‘큰구렁’은 ‘벌어진 틈’이다. 팔레스틴의 사막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형으로서 장마철 외에는 전혀 물이 없는 골짜기를 지칭하는 협곡이다. 큰 구렁에 대한 아브라함의 언급은 하나님의 결정이 결코 변경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지옥과 세상이 단절되어 있다. 오가고를 못한다. 천사조차도 오도 가도 못한다. 내세와의 교통이 가능하다는 주장들이 있다. 로마가톨릭에서는 연옥 교리를 만들어 지상에 있는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들이 연옥에 가 있는 자를 위해 미사나 헌금, 각종 교회 봉사를 행할 때 점차 연옥에서 천국으로 이동한다, 주장한다. 성경에 위배되는 사상이다(벧전 3:18~20).
유대인 중에는 죽은 자를 통해(꿈이나 환상) 지상에 전갈을 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사울이 엔돌에서 죽은 사무엘을 만나본 사실을 근거로 든다(삼상 28:8~19). 그러나 죽으면 영혼은 영적 세계로 옮겨지고 단절이다(19~31, 23:43, 고후 5:1) 사울은 사탄의 기만에 속았을 뿐이다.
부자는 급해졌다. 그래서 간청한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27절)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28절)
아브라함은 냉정했다. 어떤 자비도 부자에게 베풀지 않았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29절)
지옥은 기도의 효력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이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해 효력적인 기도를 못하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위해 구하는 어떤 기도도 소용이 없다. 기도는 살아있는 자들의 특권이다. 죽으면 기도를 할 수 없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 지옥에서 피 끓은 심정의 기도를 거절당한 부자, 세상에서 기도하며 살았다면 천국에서 자녀들과 형제들과 춤추며 살았을 텐데….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21:13)
남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부자가 있었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도하기를 즐겼다. 오늘도 조찬기도회를 열었다. 열 명의 이웃들과 둘러앉았다. 여덟 명의 접시에는 생선 한 마리씩 담겨있는데 두 사람의 쟁반은 달랐다. 가난한 이웃의 쟁반은 비어있었고 부자의 쟁반에는 두 마리의 생선이 담겨있었다. 부자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일용할 양식이 없어 굶고 있는 가난한 형제를 위해 기도합시다."
부자의 기도는 간절했고 경건했다. 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가난한 형제의 빈 그릇을 채워달라고 울며 기도했다. 모두 “아멘!”하며 눈을 떴을 때 가난한 형제의 빈 접시는 아직도 비어있었다. 부자는 기도가 부족하다 하여 매일 기도회를 열기로 했다.
부자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이런 부자들, 몇천몇억의 수재의연금을 내는 크리스천 부자 중에서도 많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아닌가. 그런 기도는 아무리 거창하고 요란하게 해도 힘이 없다! 힘이 없는 기도를 계속하고 있다면 그 기도가 오히려 우리의 힘을 빼앗아 간다. 그만큼 우리의 기도는 허공을 맴돌다 사라져 간다. 시간 낭비이다.

['그래도, 기도는 힘에 세다'에 실린 내용입니다. 문어체를 구어체로 만들어서 사용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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