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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어린이주일] 왕을 보았다! (사무엘상 16:1)

by 강정훈말씀닷컴 2025.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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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보았다!

사무엘상 16장 1절

 

서론

“스승은 운명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흔한 말이지만, 핼렌캘러가 세계적 유명인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셜리반이라는 전직 간호사 출신의 보모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셜리반을 만남으로 핼렌의 운명은 바뀌었고, 그래서 스승은 운명이다, 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피겨여왕’ 김연아는 자신을 이끈 3명의 은인으로 유종현 코치와 일본의 피겨 선수 아사다 마오, 그리고 어머니를 꼽았습니다. 가르쳐 준 사람, 라이벌, 가족을 꼽은 것입니다. 그중에서 피겨스케이트를 권유했던 유종현 코치를 으뜸 은인으로 꼽았습니다. 어린 시절, 고모의 낡은 스케이트를 신고 놀고 있는데 세계적인 선수로 클 수 있는 재능을 발견하고 피겨스케이트를 권유한 것입니다. 만약 유종현 코치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의 재능은 발굴되지 못했을 것이며 오늘의 김연아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다윗은 사울 왕 시대에 김연아 같은 국민 영웅입니다. 그가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 온 이스라엘은 열광했습니다. 누가 다윗을 발굴했습니까? 그를 알아본 것은 하나님의 눈입니다.

1. 하나님은 찬양하는 다윗의 영성(靈性)에서 왕을 본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왕을 세운 사람입니다. 왕국의 토대를 세운 사람이기에 국가의 아버지-국부(國父)입니다. 그러나 왕을 세운 그의 첫 작품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사울 왕이 사람들의 칭찬에 점점 익숙해가면서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특히 다윗이 등장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보다는 다윗의 경쟁에서 어떻게 하면 그를 쓰러뜨릴까, 머리 굴리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믿음과 내면은 서서히 무너집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었고 정신적으로 피폐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사실을 가장 마음 아파한 사람은 사무엘입니다. 자기 손으로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 왕이 성공해야 하는데 몰락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좌절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격려하시며 무엇을 보았다고 합니까? 하반절 “왕을 보았다!” 누구의 아들 중에서? 베들레헴 이새의 아들 중에서! 이새의 아들이 다윗입니다.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은 “모든 인간의 어린 시절에는 문이 열리며 미래가 들어서는 그 순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왕을 보았다”하는 그 순간이 다윗의 인생에 동이 터 오르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다윗은 사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목동입니다. 부모에게서도 관심과 기대를 갖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이 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장자(長子) 중심의 사회였기에 막내인 그는 별로 부모들의 기대를 받지 못했습니다(11절).

 

사무엘도 외모적으로 사람을 보았습니다. 6절입니다. 외모(外貌)라는 것은 서열 중심입니다. 또한 외모적인 풍채를 본 것입니다. 사무엘은 아들의 서열 순에서 왕을 보고, 외모적인 모습에서 왕을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원인입니다. 너무 외적인 것에만 치중하다가 내실을 다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몸짱, 얼짱… 등을 찾다가 진정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맙니다. 너무 외적인 조건으로만 결혼 대상을 고르다가 결혼생활에 실패합니다.

 

그 사람의 왕이 될 모습, 위인이 될 자질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마음 중심에 있고 비전에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것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 왕을 보았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식별력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눈에 왕의 재목감으로 보였을까요? 다윗이 양을 치며 찬양하며 수금을 타는 영성(靈性)에서 왕을 본 것입니다. 다윗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영혼의 소중성을 알고 내면을 아름답게 장식한 사람입니다. 영성 수치를 내면 굉장히 높게 나왔을 것입니다.

시편 150편중에 다윗의 저작이 절반에 이릅니다. 그것은 다윗의 영성입니다. 영성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명력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성화되어 가는 마음이 바로 영성입니다. 죄악을 이길 수 있는 영력이 영성입니다.

 

*이런 영성이 있었기에 다윗은 사람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기에 조바심을 갖지 않고 때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성이 있었기에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그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성으로 무장했기에 밧세바와의 범죄 중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지금 아이들은 점점 지식화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영향으로 갈수록 세속화되고 있습니다. 외모지상주의로 육체화되고 있습니다. 너도나도 몸짱 만들고, 얼짱 만들려고 뜯어고치고… 남자 화장품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중심이 아니라 외모를 만들려고 난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아이들에게서 왕을 보실까요? 이런 신자들에게서 쓰임 받을 재목들을 보실까요? 하나님은 무엇을 보았다고 합니까? 서열도, 외모도 보지 않고 영성을 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기에 다윗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왕을 보았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언, 내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그때 아이들의 운명이 바뀝니다. 여기에 인생 성공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은 피나는 훈련을 하는 다윗에게서 왕을 봅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영성이 유행입니다. 영성이란 단어가 참 애매합니다. 영성이 때로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신앙인들을 양산합니다. 사역을 하면서 실력도 갖추고 돈을 벌 수 있는 힘도 키워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신다! 는 말로 넘어갑니다. 이것은 액세서리 영성입니다. 현실에 뿌리를 박지 못하는 신기루 같은 영성입니다. 교회 안에서 축 늘어져 있는 남자들, 생기를 잃은 여자들, 그래서 불랙머는 “흐늘흐늘한 영혼들이 참 많다”고 말합니다. 영성에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입니다. 진정한 영성은 다윗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연 속에서 양을 먹이며 찬양하며 수금을 켭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멀리 떠나서 시간을 보내는, 현실과 괴리(乖離)된, 예술로서의 영성이 아닙니다.

 

그는 달려가는 사람, 행동하는 영성인입니다. 시편 18: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는 주님에게 자신의 생애를 맡긴 사람입니다. 영성의 사람입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는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달려가다 안 되면 담을 뛰어넘었습니다.

골리앗을 죽일 때도 달려갔고 사울을 피할 때도 달려갔고 적들과 싸울 때도 달려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데도 열정적이었고 회개하는 데도 빠르며 사력(死力)을 다했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실 때도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행동을 보입니다. 양을 불러 모으는데도 빠릿빠릿했고 물가와 풀들을 찾는데도 다른 목동보다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어슬렁거리거나 시간을 축내거나 빈둥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다윗, 현실에 뿌리를 박은 영성”이라는 훌륭한 제목의 책을 쓴 것입니다.

 

다윗의 영성은 단순히 도(道)를 닦는 묵상을 하거나 베짱이처럼 노래나 부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영성은 현실적입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물맷돌 연습을 했습니다. 물맷돌을 목표물에 정확하게 맞추는 실력은 그가 얼마나 현실적인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는 골리앗와의 전투에서 현실에 충실한 영성이었기에 거의 3미터나 되는 거인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것은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돌진”입니다. 이런 돌진은 그가 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실력도 갖추지 않고 믿습니다! 하는 믿음으로만 달려갔다면, 찬양하고 수금이나 켜다가 달려갔다면 그것은 광신입니다. 광신(狂信)은 건강한 믿음의 적입니다.

 

다윗은 평소에 실력을 갖추었기에 실력으로 맞짱을 뜬 것입니다. 그러나 실력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영성이 있었습니다. 영성은 현실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영성은 거룩한 상상력을 불러 옵니다. 사울과 그의 군대들에게도 상상력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상력은 골리앗에게 패배하는 상상력입니다.

 

다윗의 상상력은 내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골리앗이 넘어지는 상상력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돌멩이에 힘을 주시고 돌멩이에 맞아 넘어지는 거인의 모습을 상상하는 영성의 상상력입니다. 이런 상상력이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을 향해 돌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연아는 팔과 다리가 매우 길고 유연성이 남달랐다고 합니다.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아이였지만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8살 때 부터 10km 달리기를 매일 불평 없이 소화했다고 유종현 코치는 밝혔습니다.

믿음이 좋은 크리스천들이 실패하는 이유가 현실적이지 못한 영성 때문이라는 사실은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키우는 청년들이, 청소년들이 영성과 함께 실력을 키우는 노력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공부에만 열심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공부를 하지 않고 교회 일만 열심 하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믿음은 게으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현실에 열심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나는 한 예술가를 보았다” “한 대통령을 보았다!” “한 정치가를 보았다!” “한 목회자를 보았다!” 말하고 될 것이고 그 말과 함께 사무엘과 같은 스승들을 만나 성공의 길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것처럼 인생의 요행을 바라보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학습하고 복습하고 피나는 노력을 해서… 하나님의 눈에 뜨이는 톱 인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은 양들을 대하는 목자의 마음에서 왕을 봅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양을 쳤습니다. 수금을 켜고 양들을 보호하는 돌팔매질에 피나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전략(前略)이 있었습니다.

 

목동의 전략이 무엇입니까? 내가 맡은 양들이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탐스럽고 생산성이 높아질까? 노래는 잘 하는데… 돌팔매질은 잘 하는데… 정작 양들에게서 생산성이 낮아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목자의 자질은 생산성이 아닙니까? 그러려면 전략이 필요합니다.

 

로이드 이스트만의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중국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의 전투에서 수적으로는 모택동이 훨씬 열세였습니다. 전투를 하면 언제나 장개석의 군대가 이겼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중국 본토는 모택동에게 넘어가 공산화되고 장개석의 군대는 대만으로 도망갔습니다.

이유는 무얼까요? 첫째는 장개석의 군대가 부패했고 둘째 민주적이지 못한 의사 전달 체계, 셋째 전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개석 군대는 망하는 순간까지도 민심(民心)이 떠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민심을 잃지 못한 것-그것이 전략 미스였습니다.

 

목자들에게 최고의 전략은 양들의 사정을 아는 것입니다. 양의 마음을 편케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민심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이자 전략입니다. 이런 지혜가 없을 때 남들은 대단한 인물로 보지만 하나님은 그에게서 왕을 보지 못합니다.

 

다윗은 목동을 하면서 전략이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양들을 데리고 풀밭으로 나가면 양을 세 무리로 분류합니다. 어린양, 늙은 양, 건강한 젊은 양… 어린양을 가장 먼저 풀밭으로 들여보냅니다. 새끼 양들이 먹고 나면 늙은 양들을 들여보냅니다. 가장 마지막에는 젊은 양들을 들여보냅니다. 젊은 양들은 식욕이 왕성하기에 아무 풀도 잘 먹고 소화합니다. 다윗은 언제나 어린 양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양치는 전략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나는 왕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왕에게 자신의 양들을 맡아줄 왕의 리더십을 본 것입니다.

 

오늘 모든 교사들은 우리 학생들에게서 왕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은 그 시대의 “톱”입니다. 정치계의, 교육계의, 기술계의, 기독교계의 “왕”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왕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스승이 할 일입니다.

 

결론

베드로는 갈릴리바다의 조약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서 교회의 큰 바위를 보셨습니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반석을 보았다! 하시는 말입니다. 그때부터 베드로는 주님의 손에 다듬어지는 세월을 살았습니다. 결국 그는 교회의 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때 위대한 사역자가 된 것입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내가 한 왕을 보았다!” 성령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성령의 사람으로 일어섭니다. 세상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부름으로 달려갑니다. 그들은 세상에 목표를 두기에 그들의 성공은 다윗의 성공이 아니라 사울의 일시적 성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왕을 보았다!” 하나님에게서 온 목소리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에게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아이들에게 진정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셰퍼드를 키우면서 셰퍼드보다 더 빨리 뛰도록 달립니다. 그래도 셰퍼드를 못 따라 갑니다. 동네사람들이 “쟤는 개만 못해.” 합니다. 오 년 정도 훈련했더니 개와 나란히 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하는 소리가 “야 쟤는 개만 하다. 개 같다니까.”

한 삼 년 더 지나니까 개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사람이 “쟤는 개보다 낫다.”고 했답니다. 목표를 어디다 정했느냐, 그게 중요합니다. 개에다가 정했으면 못해도 개, 잘해도 개… 개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영성이 없는 아이들, 실력이 없는 아이들, 인생의 전략, 진정한 성공목표가 없는 아이들은 마치 개에게 목표를 두고 달리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사람이 세운 왕 사울처럼 소모품으로 살다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는 한 왕을 보았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에게 둔다면 그 아이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고 진정한 성공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에게 목표를 두고 달리는 아이들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교회에 주신 교육적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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