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 후에…
창세기 22장 9~19절
서론
[코로나 시절에 했던 송년주일 설교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를 세(貰)들고 살다 방을 빼고 새해라는 새집으로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코로나19로 고생하던 셋방살이, 일주일 후에 들어갈 셋방살이에서는 코로나19 없이 잘 살 수 있을까요? 새대통령과 함께 하는 셋방살이는 지금보다 나아질까요? 희망에 늘 속지만 새해 셋방살이는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걸어봅니다.
믿음의 선수 아브라함이라고 항상 희망이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가나안 셋방살이 10년, 사라의 몸에서 아들이 출생한다는 언약은 10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갈의 여종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어 기뻐했지만 이내 근심으로 변합니다. 그러다가 가나안에 들어온 지 20여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축복의 약속이 눈앞에 드러나는 모양새입니다.
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절,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엄청난 축복입니다. 어제 오늘의 약속은 아니지만 이번은 다릅니다. 어음이 현금으로 결재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대축복을 받은 비결은 무얼까요?
18절 하반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아브라함이 이런 순종을 하고나서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2절,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 인신제사입니다. 제정신이라면 도무지 따를 수도 없는 명령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어떻게 죽여? 차라리 아비인 내가 죽는 것이 낳습니다. 얼마나 더한 축복을 받으려고 다 장성한 아들을 죽입니까? 지금은 거의 외동아들이나 마찬가지인데….
-약속의 후손을 어떻게 죽여? 그러면 오랜 세월 기다려오던 소망이 끊어집니다. 약속의 후손을 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위배가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확실한가요?
-이스마엘도 떠났는데 어떻게 죽여? 그러려면 하나는 남겨두어야지…. 이스마엘까지 정처 없이 떠나보내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이삭까지 죽이면 대(代)가 끊깁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명령은 순종하기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명령을 따릅니다.
10절,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2절,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제야 확인했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이제야 네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지? 아들을 바칠 각오로 나를 사랑했잖냐? 아들을 포기할 각오로 내게 순종했쟎냐? 누가 너처럼 그런 행위를 보이겠고 믿음을 보이겠느냐? 그러니 네 자신의 믿음이 대단한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내가 네게 준 믿음이 얼마나 큰 믿음인 줄을 알고 살아야 한다. 네가 너에게 준 그 믿음이 너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한다는 것을 이제 알고 살라!”
사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그런 대단한 믿음이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동은 철부지입니다. 넘어지고 비틀거리고… 믿음의 조상은커녕 하수 믿음에 불과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었고 형편없는 믿음이라 자책하며 살아왔는데 지난 이십 수년에 자신도 모르게 그 믿음이 조금씩 성장하여 이제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큰 믿음의 봉오리에 올라서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봉오리에 올라서는 계기들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1절. “그 일 후에…”
여기서 ‘일’은 ‘말’(言語)이나 사건입니다(11:1). 그런 말, 그런 사건들이 있은 후에… 아브라함은 독자를 바치는 시험장에서 완벽한 순종으로 칭찬을 받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어떤 말, 어떤 사건들은 무엇일까요?
-16장에, 아브라함은 약속을 기다리지 못해 여종을 취하고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10년을 지체하니 조바심이 났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스마엘을 얻었고 그 아이로 인해 아비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더 이상 이삭을 소망하지 않고 느긋하게 이리 말합니다.
17:17, 18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는 말과 그 뜻은 고맙지만 현실적으로 이스마엘을 통해 언약이 성취되어도 족하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아비의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전,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 하나님께서 17:1,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충고 하셨습니다.
행동 똑바로 하라! 처신 똑바로 해! 믿음의 사람이 약속이 없는 자식을 얻고 족하다 하는 행동에 일침하신 것입니다. 두고두고 부끄러운 바로 ‘그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책망이 있은 후에도 반듯하게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오히려 더 치졸하게 행동합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겁이 나서 부인을 누이로 속여서 내준 것입니다.
20:2,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갔더니”
그야말로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처신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완전히 망가집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계획은 누구도 아닌, 사라를 통해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사라의 혈통에서출생한 자만이 에덴에서 약속한 구원자의 혈통 ‘여자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딴 남자의 부인이 된다? 하나님의 구원이 망가집니다. 아브라함 같은 위인이 어찌 이런 결과를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이건 책망 정도가 아니라 죽여 마땅합니다.
그런데 희한해요. 이번에는 아브라함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둔합니다.
20: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께서는 이 못난 남자 아브라함을 이방인 왕 앞에서 ‘선지자’로 추켜세워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개인의 허물은 단단히 책하시지만 이방인들 앞에서는 오히려 아브라함을 편들어 주십니다. 쪼잔한 아브라함의 하나님되심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그런 말을 한 바가 있습니다.(히11:16)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맛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추켜세우신 다음에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아브라함의 기도에 막강한 권세가 있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얼마나 센 지를 아히멜렉 네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기도가 센 것을 드러내 주십니다.
17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아브라함이 얼마나 놀랬겠어요? 그러면서도 이런 기도의 확신이 있었기에 19장 소돔과 고모라의 중보기도에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기도의 능력을 여기에서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최고의 믿음봉오리로 올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는 계속됩니다.
21장에서는 이스마엘을 추방시키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에게 기쁨이 되기도 했지만 약속의 자손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두에게 근심이 되었습니다.
21: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하나님께서 추방을 명하시자 14절, 아들을 내보냅니다. 아비의 정을 끊은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려면 어쩔 수 없는 결단입니다. 그것은 금붙이에 찌꺼기를 떨어내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 후에…”
바로 이런 저런 말들이 있은 후에~ 사건들이 있은 이후에 되어진 일입니다.
행동을 똑바로 하라, 는 말씀을 듣고서도 이스마엘로 만족합니다~ 불신앙적인 말이나 하고 있던 이후에… 여종 하갈을 취해 아들을 얻고… 이방 왕에게는 부인을 넘겨주려 하고…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앞에서는 그를 높여주시고, 이에 대해 아브라함이 나에게 왜 이리 잘 해주십니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는 이런 일들이 있은 후에… 이런 신앙의 연단으로 큰 믿음이 되어 독자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에 이번에는 조금도 실수하지 않고 에프엠대로 순종의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제인 이글스톤이 '골짜기'라는 시에서 말한 것처럼 골짜기의 실패 속에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라났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라난 믿음의 그 일들이 있었기에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22:12,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아끼지 아니하였다’는, ‘따로 남겨두었다’ ‘개인적으로 사용하려고 챙겨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쓰려고 챙겨둔 것은 매우 귀한 것! 남을 줄 수 없는 거예요! 독자를 어떻게 남에게 줍니까? 자식들이 많아도 남에게 주라면… 그것도 지금 죽여 제물로 바치라는데 어떻게 내줍니까? 아브라함은 그 아까운 것을 내 드린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감동을 먹(?)습니다.
12절,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16절에 반복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좋은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한 마디로 나옵니다.
“내가 쓰려고 아껴둔 것!” 그걸 하나님께서 달라 하시면 내어드리는 것! 그게 믿음입니다. 나를 위해 시간을 쓰려고 챙겨두었는데 하나님이 그걸 달라, 나를 위해 그 돈을 쓰려고 챙겨두었는데 하나님이 그걸 달라, 내 인생에 어떤 목표를 두고 챙겨두었는데 하나님이 그걸 달라는 것입니다. 있으나마나한 것을 드리면 작은 믿음이고 내가 쓰려고 챙겨두었던 정말 아까운 것을 아깝다 하지 않고 내어 드리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큰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축복하십니다.
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절,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상상만 해도 흐뭇한 축복입니다. 희망고문이 아니라 가시권에 들어온 축복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은 이후로 아브라함의 믿음에는 더 이상 굴곡이 없습니다. 높은 봉오리의 믿음에서 굴곡 없이 안전하게 일생을 보내게 됩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얻은 축복입니다!
미국 화이자사는 코로나19가 2024년까지 갈지도 모른다, 예측했습니다. 언젠가는 끝날 것입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코로나 이후에 오히려 인류는 한걸음 더 발전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역병이 지나가고 나면 인구도 불어나고 이전보다 번영의 꽃을 피웠습니다. 런던 인구 3분의 1이 희생당한 1664년의 페스트, 엎친 데 덮친 경우로 다음 해 런던 대화재가 일어납니다. 그 이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國富論)을 비롯해 쟁쟁하고 왕성한 지식인의 출현과 산업혁명, 그리고 ‘팍스 브리태니카
(Pax Britannica)’, 영국이 세계 무대를 주름잡던 19세기 대영제국(大英帝國) 당시의 황금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페스트라는 재앙의 마지막 종착지였던 파리 역시 페스트가 지나간 뒤 이전보다 발전,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화려한 꽃을 피웁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이를 ‘코로나 패러독스(Corona Paradox)’라고 합니다.
올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올해는 부모를 잃은 분들이 열두 분 가정입니다. 장례식에 소홀한 것 같아 죄송하지요. 좋은 일도 있어 네 가정이 아들을 결혼시켰습니다. 아기들이 태어나 엄마아빠가 되고 할아버지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병을 얻기도 하고 낫기도 하고 대학에 들어가기도 하고… 재수해야 하고… 이런 일들이 있은 후에… 코로나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대면예배 비대면예배가 있은 후에…
“행동 똑바로 하라!”는 책망을 들은 후에… 우리의 믿음의 종착지는 어디가 되어야 합니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너는 아들을 바칠 만큼 대단한 사람이야! 내가 그런 믿음을 네 안에 넣어놓았어! 네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임에도 어떻게 그렇게 거짓말을 했냐?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애굽의 바로 왕에게 아내로 줘버리면 나의 약속은 어떻게 되겠냐?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넘겨버리면 이삭은 어떻게 출생하려던 것이냐? 내가 준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얻어 이스마엘을 얻은 것은 믿음의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그러니 언약집안이 분란이 났잖냐?”
“너는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니 이제는 그런 불신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너는 결코 그런 일이나 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이다! 내가 그렇게 믿는다! 알겠느냐!”
방(房) 빼기에 여념 없는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이제 올해 365개의 세간살이에서 방을 뺄 시간입니다. 닷새 남았습니다. 닷새가 지나면 빵을 빼고 새해라는 셋방으로 찾아나서야 합니다. 올해는 셋방에는 하자가 많았습니다. 코로나로 사방팔방에 하자가 생겼습니다. 보수해도 제대로 안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때로는 똑바로 행동해! 책망 받을 일도 있었고 우리가 제대로 살지 못했지만 저는 선지자라, 우리의 위신을 세워주셨던 한 해였습니다. 아프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던 해였습니다.
동창 목사님이 내 고향 제주도가 정말 좋다는 말을 늘어놓으면서 제주도보다 더 좋은 섬이 ‘그래도’라는 섬이라 했습니다. 금년은 코로나19로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던 셋방 살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던 셋방이었습니다. 우리 희망과 계획들이 무너져 버리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셔서 나름 행복했던 셋방 살이었습니다.
1절, 그 일 후에…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이 받았던 17, 18절의 축복이 있기를 기대합시다! 바로 그런 일들이 있었기에… 그 일 후에… 새해에는 예배우등생들이 됩시다. 믿음의 고수들이 됩시다! 아브라함처럼 나를 위해 아껴두고 또 아껴두었던 것들을 드리는 한 해가 됩시다.
1년 동안 함께 해주셨고, 제 설교를 귀담아 들어주셨던 성도님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새해에 만납시다!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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