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강림주일]
성령으로 운행하라!
창세기 1장 1, 2절
서론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창립일입니다. 성령강림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 군소종단, 유대교의 한 분파로 남았겠지요. 2천년 오늘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기독교는 세계화가 되었고 예수님의 복음을 통한 구원의 길이 선포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데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하나님에 비해서 성령 하나님은 순복음교인들이나 뜨거운 열혈신자들에게만 대접받고 일반신자들에게는 관심도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구원을 좌지우지할 뿐 아니라 성령님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성령님을 어떻게 대하는가, 성령님을 존중하고 성령을 모셨다는 확신과 성령의 통치를 받고 있으면 성령 기독교인이 되고 성령님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종교적 기독교인입니다.
로마가톨릭은 ‘냉담신자’들로 고민입니다. 1년에 한두 차례 성당에 나갈까 말까, 종교난은 ‘가톨릭’이지만 명칭만 천주교 신자들, 냉담신자 비율을 20이하로 떨어뜨리려 해도 안 된답니다.
기독교는 열정이 넘칩니다. 예배는 물론 주중에도 기도회와 모임들로 활력이 있습니다. 로마가톨릭이 부러워하는 부분들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을 들여다보면 교회 안에도 성령의 통치를 받은 기독교인들이 있는가 하면 성령의 통치에는 약한 편의주의신자들이 많습니다.
성령강림절을 통해 스스로 점검해 보세요! 냉담신자인가, 성령의 통치를 받으며 열정적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가? 성령강림절에 성령께서 내 마음에, 우리 교회, 가정, 사무실, 대한민국에 강림하시고 작동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더욱 성령충만한 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독교와 일반종교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일반종교는 교주와 교훈만 있으면 됩니다. 교주의 교훈은 교주가 먼저 깨달은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인생의 원리를 먼저 깨우쳤습니다. 생로병사에서 끝없이 윤회하는 중생들이 어떻게 해탈(解脫)하고 열반(涅槃)에 이를 수 있을까… 그래서 누구든지 그 원리를 깨우치는 중생은 부처가 된다고 합니다.
사실 종교학 범주로 보면 불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는 절대신(神)이 있어야 하는데 불교에는 절대신(神)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불교를 철학으로 분류합니다. 그만큼 불교는 신(神)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나’라는 ‘자아’가 중심입니다. 다만 해탈하는 과정에서 먼저 진리를 깨달은 부처의 도움을 받아 성불(成佛)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유교의 공자는 사람의 도리(道理)를 가르쳤습니다. 부모에게 자식의 도리, 임금에게 신하의 도리… 그것을 잘 깨달아 도리를 다하면 복을 받고 존경받는다, 유교도 세상 정치, 사람의 도리를 논하기에 종교라 할 수 없습니다. 조상제사제도가 덧붙여지면서 나름 종교가 된 것입니다.
이슬람교는 전지전능한 알라의 가르침이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었으며, 유대교, 그리스도교… 등 유대계통의 여러 종교를 완성시킨 유일신 종교임을 자처합니다. 무함마드가 받은 계명들을 잘 지키면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이런 종교들은 사람의 머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중심구도가 ‘신’과 ‘나’ 혹은 ‘나’와 ‘나’, 1대1 관계입니다. 그러기에 초자연적이고 비논리가 없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만물의 이치를 깨우치는 일에 무슨 비논리가 있습니까? 이해되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인간의 지식과 머리만 있는 것이지 성령의 역사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존재가 없는 것이지요!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도리나 윤리, 도덕의 종교가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에는 훌륭한 가르침들이 많습니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남을 대접하라! 남을 먼저 섬기라, 비판하지 말라, 항상 감사하라…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만으로도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러나 기독교는 계시된 종교입니다. 하늘에 기원을 두기에 인간 세상의 윤리나 도덕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걸지 않습니다. 자기 도덕과 윤리를 통해 도를 깨닫고 스스로를 구원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자력(自力) 종교, 내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앞에서 말하는 모든 종교들은 내가 주인공입니다. 내가 믿고 내가 노력하고 수도해서 구원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기에 성령이 없어도 그들의 가르침, 그들의 해탈과 열반은 가능합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자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낳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피로 내 죄를 사함 받습니다. 이후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삶이 되고 이 힘이 우리를 성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않고 윤리, 도덕으로 믿고 선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믿는 게 다 도루묵입니다.
도루묵이라는 말의 유래를 아시지요? 임진왜란 때에 선조(宣祖) 왕이 피난을 가다 생선을 구하지 못해 ‘묵’이라는 생선을 수랏상에 올렸습니다. 선조는 너무 맛있어 ‘은어’라는 이름을 내려줍니다. 전쟁이 끝나고 한양에 돌아와 있던 선조는 그 때 먹었던 ‘묵’이 너무 맛있어 ‘묵’ 생선을 찾았습니다. 요리사가 ‘묵’ 생선을 그때와 같이 잘 요리해서 올렸는데. 맛이 없었습니다. 선조가 한 말이 “이 생선, 은어가 아니라 도로 ‘묵’이라고 해라!” 해서 도루묵이 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벌려 놓은 일이 원점으로 돌아오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속죄사역을 믿지 않으면 나의 윤리와 도덕이 도루묵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도루묵이 되지 않게 합니다. 성경의 교리들-얼마나 비과학적, 비이성적입니까? 만물이 6일 만에 창조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처녀가 스스로의 힘으로 아기를 낳았다? 예수의 보혈로 내 죄가 사해졌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그 교리가 보통 허황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말도 안 되는 가르침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아닙니다. 여기에 뭔가 개입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이런 사실을 믿어진다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내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은 필수적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모든 윤리와 도덕적인 가르침들이 ‘도루묵’입니다. 아무 것도 믿을 수 없고, 설령 믿는다 해도 믿음의 고백을 따라 살 수가 없습니다. 그냥 형식적인 신자, 윤리적인 기독교인들로 남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성령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그걸 받게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본문은 성령의 대표적인 활동 모습입니다.
우주만물의 창조과정을 보면 성령께서 왜 절대적으로 필요한가… 알 수 있습니다. 2절!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우주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게 있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아무 의미도 없는 물질이요 공간입니다.
이런 곳에 성령이 어떻게 합니까? “운행하시다” 원뜻은, '알을 품다“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신-성령은 온 우주를 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무질서, 공허, 어두운 우주를 품으셨습니다. 성령께서 품으셨을 때에 창조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때마다 와! 아름답다! 는 하나님의 탄성이 들렸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성령께서 인간 구원에도 개입하십니다. 창세기에는 만물을 품으시며 사도행전에는 사람을 구원시키려 품으십니다. 품고 사역은 거듭남입니다. 만물 창조나 개인의 거듭남이나 사실은 같은 창조과에 속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생명을 내고 무질서를 정돈하고 공허함에 삶의 목적을 주시고 어둠을 밝히는 일-이것이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일입니다.
이런 사역을 위해 성령은 품는 일을 합니다. 암탉이 21일을 달걀을 품습니다. 21일이 되던 날, 삐악거리며 병아리들이 태어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일을 합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재탄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문으로는 중생(中生), 영어로는 ‘born again’입니다. 즉 성령의 역사로 한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한 사람을 거듭나도록 하기 위해 그 사람을 품어 계속적으로 온기를 공급합니다. 그는 지식적으로 굳어버린 사람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입니다. 학교에서 인간 중심이요 진화론으로 배움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은 비과학적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믿어질 수가 없습니다. 만물 창조로부터 아담과 하와의 첫 인간 이야기, 선악과 때문에 온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령은 그들을 품습니다. 그들의 지식으로 차가워진 머리를 품습니다. 머리가 점점 따뜻해지고 온기가 되어가면서 그들은 성경 사건들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이런 거듭남이 없으면 아무리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가는 기독교인이어도 사실은 냉담신자입니다.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사로 볼 때 가장 과학적이고 문명국들은 기독교국가입니다. 미국과 유럽이 기독교국가요 러시아가 공산주의에서 지금은 사회주의체제이지만 그 바탕에는 천년 기독교가 깔려있습니다. 처음으로 우주선을 쏘아올린 소련과 미국, 지금도 세계 최강대국인 그 사람들이 머리가 나빠서 비(非) 과학적인 기독교를 믿겠습니까? 그들이 비(非) 이성적이어서 기독교의 동정녀 탄생을 믿겠습니까? 무엇이 부족해서 러시아가 정교회를 미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하겠습니까?
세계 최고의 과학국가, 이성국가들이 기독교 신비의 교리들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그들의 차가운 이성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어질 때까지 계속 머리를 따듯하게 하며 하나님의 생명으로 재창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나서 믿음을 고백하고 초과학적인 신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만으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런 성령이 오셨기에 우리도 성경사실을 믿을 수 있는 교인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을 받은 성령의 기독교신자들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두 번째 사역은 성화(聖化)입니다.
2절에 “운행하시다”, 알을 굴리다! 성령이 우리 속에 임재하시면서 계속 우리를 굴려나가며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이 성화사역입니다. 성화는 구원받은 이후에, 거듭난 이후 성령께서 하시는 대표적인 사역입니다. 성화는 우리를 점점 거룩하게, 깨끗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목표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거룩의 성품까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까지 끌어올리도록 힘쓰는 게 성화사역입니다. 나의 협동을 필요로 하면서 성령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거듭남으로 내 속에 들어오신 성령은 내 안에 거주하면서 굳어진 가슴을 따뜻하게 합니다. 내 안에서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내 머리에 작동하면서 신비주의를 믿어지게 만들고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뀌게 합니다. 생각을 바꾸고… 기질을 바꾸고… 인격을 바꾸고… 삶을 바꿉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1회적이고 순간이지만 성화사역은 성령의 평생 사역입니다. 여기에는 성령의 오래 참으심과 탄식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변화됩니다. 얼굴표정이 변합니다. 말이 변합니다. 인간관계가 변합니다. 성령의 통치영역이 내 안에서 점점 확장되어 갑니다. 냉담신자에서 열정신자로… 대하기 어려운 사람에서 편한 사람으로 이동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좋습니다. 그러나 대인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거듭남을 체험했는데 왜 인간관계에서 부드럽지 않을까요? 성화가 더디기 때문입니다.
성화는 굴리는 것입니다. 알을 굴러가면서 암탉은 모든 병아리 가운데 생명의 탄생을 일으킵니다. 열개의 알을 품었는데 암탉이 속에서 구르지 않고 그냥 품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한쪽은 따듯하고 한 쪽은 차갑게 됩니다. 온기가 고루고루 퍼지지 않습니다. 적당하게 굴러야 합니다. 위에 것은 아래로 가고 아래 것은 위로 올라가고… 왼쪽 것은 오른쪽으로 오른쪽 것은 왼쪽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암탉이 굴리는 대로 굴러가고 이동해야 합니다.
그 중의 어떤 달걀이 고집을 부립니다. 나는 이 자리가 좋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른 달걀들과 부대끼는 것이, 접촉하는 것이 싫습니다… 나는 여기가 이 모양대로가 좋습니다… 그러면 구린 달걀이 됩니다. 생명의 삐약삐약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르시는 대로 굴러가야 합니다. 그래야 성화가 됩니다. 자아(自我)가 강한 사람들은 성화가 더딥니다. 믿음의 고집은 강해지는 데 부드럽게 하시는 성화가 밖으로까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성령보다 내 종교심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고 합니다. 여기 선(善)이 무엇인가요? 다음 29절에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일”이라고 합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 그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모든 것-기쁨과 슬픔과 합격이나 불합격이나 실패나 질병이나… 이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즉 성화를 이루게 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면 성령은 품습니다. 그것을 이용하고 활용하면서 굴러가면서 점점 성화의 세계로 인도해 갑니다. 이럴 때 성령의 구르시게 하는 대로 굴러가야지 내 자아가 움직이지 않으면 성화가 안 되고 성령의 열매는 맺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굴리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우리가 순종하고 따라갈 때 하나님의 선-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성화가 나타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려움조차도 축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 모든 것들이 성화를 돕는 수단이 되니까요! 우리가 이렇게 성령을 받고 존중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들이 좋은 일입니다.
결론
지금 기독교는 사방팔방으로 공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진보-보수프레임, 동성애 프레임, 페미니즘 프레임… 등으로 기독교는 우군(友軍)이 없습니다. 요즘 세태에 기독교는 고리타분하게 진부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네티즌들이 기독교를 공격하고 비아냥거려도 생명의 기독교는 망하지 않습니다. 왜? 기독교는 성령이 역사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대한한국에서 여전히 운행하시며 따뜻하게 품으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고 여호와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 안의 냉담신자들 안에서 운행하시면 열정적으로 성화되어 갈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 속에서 운행하시면 타인중심으로 성화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인품들 안에서 운행하시면 역시 점점 성화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빛으로 환히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내 힘으로 운행하려 말고 성령으로 운행하도록 맡겨야 합니다. 성령이 강력하게 주도해 나갈 때 우리 교회는 사람이 끌어가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께서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성령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흥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성령을 존중하면서 망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성령님을 존중하여 흥(興)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성령님을 열렬히 환영하여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 믿음에 성공하는 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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