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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뱀같이 영리하기(마태복음 10:16)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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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고서적에서
참고삼아 읽어보세요

뱀같이 영리하기

마태복음 10:16

서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전도현장에 보내시면서 당부한 말씀이 16절입니다.

보라 보라! 지시 불변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종종 쓰시는 화법으로 어떤 특정한 사실을 강조하고, 새로운 교훈을 말씀할 때 사용하셨습니다. 귀담아 듣거라, 모두 주목 그런 강조화법입니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말에 집중하도록 해놓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유진 피터슨은, 이 구절을 너희는 이리 떼 속을 달려가는 양 같으니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이리를 늑대로 보고 성경에도 이리 늑대 승냥이를 묶어 시랑(豺狼)’으로 통일시키지만 사실은 종류가 다릅니다. 이리는 갯과에 속하는 야행성 짐승, 늑대나 승냥이보다 조금 크며, 성질이 포악하고 사나워 사람을 해치거나 양이나 작은 야생 동물들을 잡아먹고 삽니다.

 

어떤 사람을 이리라 하면, 남을 물어뜯고, 사나우며, 거칠고 난폭한 사람을 말합니다.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입니다. 지금 인간 세상이 이리 늑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보다 못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세상으로 제자들을 파송시킵니다. 

그들이 나가는 세상은 사나운 이리 떼들이 득실거리는 들판, 이런 벌판에서 제자들은 양과 같습니다. 이리떼가 사나운 반면 양들은 짐승 중에 가장 약합니다. 보호색도 없고 공격무기도 없고 방어할만한 무기가 없어요. 그래서 짐승 중에 가장 약골(弱骨)입니다. 병도 잘 걸리고 달리기도 못하고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제자들은 약한 자들입니다. 출신신분, 경제력이나 학문, 직업 어느 하나 내놓을만한 게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처럼 매력적인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약자들을 사나운 이리들 사이로 보내면서 살아 돌아 오거라, 당부하지 않고 이리 떼의 세상을 양()의 사회로 만들라 명령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무턱대고 인정사정없이 그냥 명령만 하시는 냉혹한 군주일까요?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리 틈에서 살아남고 오히려 이리떼들을 양떼로 만들어 내는 매뉴얼을 주십니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여기서 비둘기보다 뱀을 앞세웁니다. 주님의 당부가 뜻밖이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뱀은 부정적인 동물입니다. 에덴에서 사탄의 상징으로 나옵니다. 그만큼 사악한 존재, 불쾌한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코치님께서는 뱀의 특성을 눈여겨보고 그 점을 이용하라는 것입니다.

 

뱀은 민첩합니다.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분별력입니다. 에덴의 뱀을 보세요. 누구를 미혹의 대상으로 삼았나요? 하와지요. 하와는 아름다움에 약한 여자, 빛에 약한 여자, 달콤함에 약한 여자, 그래서 뱀은 교태로운 몸짓으로, 눈부신 빛으로, 가장 달콤함으로 하와를 유혹합니다.

 

아름다운 조심성입니다. 뱀은 자기의 흉측한 외모를 알고 사람들에게 싫은 동물임을 압니다. 그래서 뱀은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공격을 받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그래서 일부는 뱀을 극도로 혐오하게 만들지만 일부는 자기를 숭배하게 만듭니다. 뱀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주도도 뱀을 수호신으로 섬겼습니다. 자기 흉칙함이라는 약점으로 두려움을 조성하고 그런 공포심을 이용해서 신으로 등극하는 뱀의 그 지혜, 대단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볼품 없습니다. 훗날에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할 것입니다. 당시 십자가는 모욕과 저주의 상징입니다. 이런 상징을 구원의 상징으로 만들라는 암시가 들어있습니다.

자연학자 피치올로구스는 <기독교동물상징사전>에서 뱀의 특성을 몇 가지로 말합니다.

-뱀은 늘 자신을 새롭게 하는 비결을 갖고 있습니다.

뱀은 늙으면 눈이 어두워져 아무 것도 보지 못합니다. 이때 뱀은 젊어지려는 작정으로 꼬박 사십일 낮과 밤을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고 굶습니다. 그러면 옷이 헐거워지듯이 뱀도 껍질이 헐거워집니다. 그러면 틈새가 좁게 벌어진 바위를 찾아 그 사이로 지나가면 몸뚱이의 낡은 껍질이 벗겨지고 새로운 껍질, 몸뚱이, 새로운 힘을 얻게 됩니다. 참 영리해요!

 

우리도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허물벗기를 해야 합니다. 죄악의 낡은 가죽을 벗으려면 단식과 정결의 좁은 길을 통해 육신을 벗겨내고 껍질을 털어야 합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부담스럽고, 힘들고, 제한을 받고 이런 삶이 신앙의 좁은 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좁은 문으로 육신의 껍질들을 벗어버릴 때 뱀이 허물 벗듯 자신을 벗게 됩니다.

여기서 그치지 말고 그리스도의 옷, 보혈의 옷, 그리스도의 인격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믿음은 청춘을 회복하고 달려가도 곤비치 않은 활력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뱀은 목을 축이려고 샘으로 나아갈 때 품고 있던 독은 동굴에 떼어두고 간답니다.

마른 목을 축이려고 뱀의 혀로 마시다가는 물에 독이 퍼질 것이며 그 물은 먹을 수 없는 독물이 되기에 그런답니다. 이런 이야기가 과학적이거나 의학적인지, 정말 그런지 의심이 가지만 서기 200년경에 살았던 자연학자 피지올로구스가 그렇게 적어놓았습니다.

 

우리도 교회 나올 때 독을 놓고 와야 합니다. 서로 간에 어떤 악감정도 개입하지 말아야 하며 교인들을 이용해서 뭔가를 해보겠다거나 세상 조건으로 견주거나 경쟁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독성이 강한 방울뱀은 그중에서도 어금니가 치명적인데 치명적인 어금니는 절대로 동족을 향해서는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기가 상처를 받으면서도 동족을 향해서는 금물입니다.

 

유대인들은 기관단총을 휴대하고 휴가를 나오는데 동족을 행해서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습니다. 그 총은 원수나 침략자를 위해 쏘는 것이지 동족의 생명을 살상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이 총기사고가 거의 없는 나라로 만듭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합니다. 믿음의 형제들에게 치명적인 공격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공격의 화살표는 세상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공격하고 교회 원수들과 싸워야지 동족인 형제자매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맨날 노는 물이 교회이니 교회에 온갖 독을 풀어놓고 경쟁과 헐뜯음의 상대로 싸웁니다. 방울뱀만큼도 못한 행동입니다.

 

-뱀은 알몸인 사람은 피하고 옷을 걸친 사람은 공격한다고 합니다.

뱀은 사람과 만났을 때는 만약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을 보면 두려워서 몸을 피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도리어 달려드는 성질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옷을 입지 않았을 때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즐거운 교통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죄를 짓고 난 후에는 무화과로 몸을 가렸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치장을 시작했습니다. 얼굴을 곱게 하려는 화장(化粧) 문화로 이어집니다. 거울이 발명되면서 여성의 아름다움도 빛을 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울을 발명하면서 영성을 잃었습니다. 거울은 마음을 닦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치장하는 것으로 전락하고, 남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투자 시간은 너무 깁니다.

 

(2019년 설교) 몇 년 된 통계이지만, 다국적 화장품 회사의 시장 조사 결과 우리나라 여성들의 화장품 사용량이 세계 1위입니다. 한국 여성의 91.4%가 화장을 하고 화장품 종류도 최고로 많습니다. 아침에 쓰는 게 13개 정도, 밤에 쓰는 게 7개 정도, 하루 20개에 이릅니다. 유럽 여성들이 아침에 기초 화장품을 2~3개 쓰는데 비해 우리나라 여성들은 4~5개를 사용합니다.

 

색조화장품도 한 사람당 평균 8개를 갖고 있어 아시아 여성들 4.5개의 2배에 이른다니 아침마다 화장에 들이는 시간도 얕잡아 볼 게 아닙니다. 평균 15분으로 나왔지만 세수한 후 45개의 기초화장품을 순서대로 바르고 색조 화장품 8가지를 쓰려면 어림도 없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2014년 조사에는 하루 평균 40분 정도를 화장하는 시간으로 여성들이 보낸다고 합니다.

 

결국 화장은 너무 남의 눈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아름다움도 좋고 남의 눈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바보라고 할만큼 남편 아브라함에게 순종한 사라처럼 마음을 단장하기를 주문합니다(벧전 3:3~5).

 

예루살렘교회는 예배당도 없고 부동산도 없었지만 생명력 있는 교회, 힘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로마로 들어간 교회는 믿음을 위해 카타콤종교로 자처했습니다. 가장 깨끗한 영성의 교회입니다. 어떤 죽음의 위협도 박해도 그들의 신앙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언제부터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었는가? 치장을 하고 나서면서 생명을 잃었습니다. 주후 300년에 로마제국의 종교승인을 받고 이어 국교가 되면서 완전히 예배당 종교로 바뀌었습니다. 그때부터 교회는 복음의 생명력을 잃었습니다. 생명력이 없을수록 건물을 크게 짓고 부동산을 사들였습니다. 자꾸 교회 계급을 만들어 갔습니다.

 

사람도 영성을 잃을수록 외양을 치장합니다. 목사님들이 학자도 교수도 아니면서 왜 그리 박사학위에 관심이 많습니까? 가짜박사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설교강단에 박사 가운이 왜 필요합니까? 박사 가운을 입으면 설교가 더 잘됩니까? 교인들 미국인 만들려고 아니면 유식하게 보이려고 시도 때도 없이 영어를 쓰는 것입니까?

우리가 오히려 순수할 때 마귀는 넘보지 못합니다. 걸칠수록 마귀는 우습게 알고 달려듭니다. 허위와 위선과 과장을 벗고 단순해져야 생명력이 있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뱀은 썩은 것은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뱀은 아무거나 먹는 동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썩은 것, 죽은 것은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슬과 날 것 만을 먹는 정결함이 뱀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뱀은 힘이 좋은가 봅니다.

그리스도인도 정결함을 지녀야 합니다. 아무거나 먹고 아무거나 입고 아무거나 마시는 잡식(雜食)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가리면서 정결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입에 나가는 말도 조심해야 하지만 입으로 귀로 눈으로 들어오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가는 말도 곱고 정직하고 그래야 순결함을 유지하고 그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뱀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 머리를 보호하려고 애를 씁니다.

사람이 뱀을 죽일 작정으로 모질게 마음먹고 다가가면 뱀도 죽을 각오로 제 몸뚱이를 온전히 던집니다. 그러나 뱀은 제 머리만은 다치지 않도록 몸뚱이를 사려 머리를 보호합니다. 머리만 살아있으면 몸뚱이는 죽어도 생존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머리를 지킵니다.

 

우리의 머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유대인들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다닙니다. 그것은 내 위에 나보다 높은 분이 계시다는 의식의 차원입니다. 하나님, 우리는 그분의 거룩한 성호를 욕되게 하지 않도록 나를 희생하면서 그분을 지켜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성호를 보호해 드리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원수들의 입에서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존귀한 영광을 지키려고 우리를 버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머리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망가지든 말든 나의 자존심이 상하면 제 성질 다 까발립니다. 그래서 교회가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뱀은 이처럼 지혜롭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지헤롭다는 말을 영리하다는 말로 해석합니다. 영리하다, ‘눈치가 빠르고 똑똑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 누가 사기꾼이 되고 이단이 됩니까? 눈치 빠르고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그 똑똑함으로 남을 해칩니다.

 

뱀의 지혜는 사악한 지혜, 간사한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미혹하는 간사한 그 지혜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비둘기의 순결함을 보완하라 하십니다.

 

비둘기의 순결함은 솔직함, 양순함, 단순함,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성입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라 하셨는데 바로 그와 같은 깨끗한 마음이 비둘기의 순결입니다.

 

유다는 12제자 중에서 가장 영리한 사람입니다. 남방 유다출신으로 제자 중에서 배움이 가장 좋았습니다. 그래서 돈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영리는 했으나 순결하지는 못했습니다. 매사에 계산적입니다. 한 여인이 주님에게 향유를 부었을 때 그는 향유 값을 계산하고 있었지 자기의 삶을 송두리째 헌신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희생함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했을 때 그 죽음의 고귀함을 돈으로 계산했습니다. 그래서 은() 30에 스승을 파는 계산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간사함에는 약삭빨랐지만 공의롭지 못했습니다. 순수함이 없는 것입니다. 부패한 것은 먹지 않는 비둘기의 순결함, 누구도 공격하지 않는 비둘기의 온유함이 없었습니다. 평화를 전하기 위해 수천 킬로 날아가는 비둘기의 평화를 지향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지혜는 넘어지게 하는 지혜는 되었지만 사람을 구원하는 지혜는 되지 못한 것입니다.

결론

우리 예수님께서 당부하시는 말씀을 다시 들읍시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이게 중요합니다. 원문에는 내가’ ‘를 강조합니다. “너희를 파송하는 이가 바로 나다” “내가 너희를 나의 대리자로 삼아 파송한다는 장중한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어찌하라 합니까?

 

뱀같이 영리하게 처신하거라! 자기의 흉칙한 외모를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숭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그 열정, 그 비법을 배워라! 자기의 강점을 강점화하라는 것입니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어떠한 경우 어떤 위치 어떤 연령에도 오염되지 않는 순수함을 유지하라! 거짓이 없는 솔직하고 순진한 상태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영리함과 순수함. 영리함이 순수와 결합되지 않을 때 간사하고 영악해집니다.

순진함이 지혜로움과 결합되지 않을 때는 어리석음과 무지(無知)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양자를 잘 조화시켜 뱀 같은 지혜로 무모한 핍박을 피하고 비둘기 같은 순결로써 핍박에 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랍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순결하게! 이방인에 대해서는 지혜롭게! 그리 가르쳐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모든 복음 전파자들에게 순결하고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맡은 바 복음 전파 사역에 최선을 당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당부하심을 잘 받들어 지혜롭게 순결하게 그런 전도자의 생애를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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