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

모두가 학생이고 누구나 스승이다(창세기 49:1, 2)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10. 6.
반응형

 

[교회교육주일]

모두가 학생이고 누구나 스승이다

창세기 49:1, 2, 28

서론

이스라엘은 세계적인 인재(人才)국가입니다. 물리학의 최고봉 아인슈타인, 정신분석학의 프로이드, 공산주의 체계를 만든 칼 마르크스, 사회학자 에릭 프롬, 영화감독 스필버그, 배우 해리슨 포드, 세계 경제의 큰 손 조지 소로스 등 수없이 많습니다. 노벨상 수상자 약 20%가 유대인입니다. 세계 인구에서 유대인 비중이 0.2% 미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인재풀(pool)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의 지능지수(IQ)는 우리나라나 일본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데이비드 그로스는 과학 분야에서 유대인이 탁월한 이유는 유전적 요인이 아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유대인의 우수성은 오히려 대화와 논쟁을 통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유대인 종교학교 예시바(yeshiva) 교육에서 찾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기원전부터 의무교육을 실시했을 정도로 교육을 중시합니다. 유대교육은 국가 번영은 물론 민족 생존의 수단입니다. 사방이 적들에 둘러싸인 지리적 조건은 언제 추방당할지 모르기에 탄탄한 창의적 교육으로 인재들을 키워 세계 곳곳에 포진시키면서 자기민족을 보호합니다. 유대인 인구 1500만 명, 그것도 세계에 흩어진 모든 유대인을 합친 숫자입니다. 이 작은 나라가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대단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교육의 힘입니다.

교육의 힘이 누구에게서 출발했는가? 

유대인의 혈통적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유대인은 자신의 혈통에 아브라함의 피가 흐르고 있음에 상당한 자부심 내지는 자긍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실제적 조상은 야곱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을 기초석으로 열두지파 각각이 큰 부족을 이루면서 부족 연합국가, 유대 유나이티드(united)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유대인의 기질에는 야곱의 성품이 고스란히 녹아내립니다. 야곱은 강한 사람! 대찬남자입니다. 진짜 고집이 센 사람입니다. 여기 고집은 신념이 아니라 아집, 배짱, 대중언어로 말하면 똥배짱입니다. 그의 고집과 아집 때문에 주변 사람들 고생 많이 했습니다. 네 명의 부인들, 12명의 아들들, 고명 딸, 부모, 외삼촌 야곱 때문에 상처를 받고 피해를 당했습니다. 야곱은 한마디로 나쁜 남자입니다.

 

그랬던 야곱이 인생 후반전 말기(末期)에 완전히 달라집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열두 아들에 관한 유언을 통해 보여주었던 영성, 예견 예지력, 신령함 은 타인의 추종 불허(追從 不許)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심지어 요셉조차도 이렇게 높은 성화의 단계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28절도 보세요!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아버지가 열두 명의 아들들을 개인적으로 다 알았다는 것입니다. 아들들의 기질, 행적, 슬픔 기쁨, 좌절, 인생 역정 모든 것을 꿰었고 그들의 분량에 맞게 각각 축복했다는 것입니다.

이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자식들의 겉을 알지 속까지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식들 열두 명 모두를 일일이 알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을 2()으로 나눈다면 전반기는 밧단아람과 가나안 130년이고 후반기는 아들 총리의 효도를 받으며 살았던 애굽에서의 17년입니다. 숫자로는 당연히 130년이 훨씬 더 그에게 영향을 끼치며 성화를 만들어 낼 시간입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130년 가나안, 밧단아람은 배움의 시절, 성화의 학습기간이 아닙니다. 오래 살고 오래 믿었다 해서 바로 믿고 바르게 살고 성화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거 오늘 교육주일에 배우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교사주일이라 했는데 지금은 교사주일만 아니라 교회교육주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하는 학생이요 우리 누구나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는 가르침을 주는 그림자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130년을 결산하면서 야곱이 바로 왕 앞에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세기 47 9,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험악한 세월. 험난한 세월,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부끄러운 고백, 탄식입니다.

왜 이런 고백을 합니까? 130년을 살았지만 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130년을 영적인 사람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 대신 그를 택한 것은 영적인 분별력과 영적인 것에 대한 욕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사람은 좋지만 종교적 열심은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율법을 맡기고 여호와 신앙을 세상에 유통시키는 책임을 부과하겠습니까? 어머니 리브가도 장남을 버리고 차남 야곱을 택한 것은 천만인의 어미가 되고자 했던 영적 욕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리브가도 형을 제치고 동생을 선택한 것은 야곱의 영적 치열함에 대한 기대감이었는데 야곱은 그리 살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130년 서원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집을 떠나 벧엘에서 서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 이곳에 제단을 쌓겠다! 십일조 생활을 하겠다!(28:22-24) 객지생활 20년 동안에 한 번도 벧엘을 찾은 적도 없고 십일조 기록도 없고 사랑하는 부인 라헬이 드라빔을 섬기는 일을 묵인하고 묵과했습니다. 서원을 버린 것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130년 동안 고난을 통한 배움이 없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이 맞았습니까? 야반도주, 신부가 바꿔치기 당하고 아들 하나는 실종되고 외동딸은 성폭행을 당하고 외삼촌에게 속아 모든 재산을 잃게 되는 위기를 만나고 장남은 서모(庶母)와 통간하고 부인 넷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여인 라헬은 귀향하는 과정에서 노상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그야말로 파란만장을 넘어 파란막장의 삶을 살았습니다.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합니까? 나밖에 모르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을 실력과 능력으로 오해하다보니 경제 괴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또한, 숱한 고난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고난이 왔으면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배운 바가 있어야 합니다. 아들이 실종되면, 딸이 성폭행 당하면, 아내가 죽으면 왜 이런 고난이 올까? 어디에서 이런 고난이 올까? 이런 고난을 더 이상 겪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고난을 통해 배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움켜쥐기 위해 앞만 향해 달려간 것입니다. 그러니 계속 얻어터지고 결국에는 파란만장! 파란막장! ‘험악한 세월을 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애굽으로 이주하면서 달라집니다. 애굽에서는 할 일이 없습니다. 아들이 총리요 며느리가 제사장 집안 딸이기에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상류층 집안을 이룹니다. 일을 하지 않으니 욕심을 부릴 것도 없고 열두 아들 모두 제 자리를 지키니 염려와 분노도 없습니다. 시간이 많으니 옛날 일들, 가나안 130년을 회상합니다. 자신을 성찰(省察)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나 온 세월 되돌아보니, 인생 뻔하지요! 너무 부끄러운 것입니다. 서원을 지키지 못해 하나님께 죄송하고 아내들에게 미안합니다. 큰 부인 레아에게는 사랑해주지 못해 미안하고 여종 출신의 부인들에게는 제대로 아내 대접해 주지 못해 미안하고 라헬은 일찍 죽게 해서 미안하고 열두 아들은 편애가 부른 여러 일들로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회개하고 뉘우치고 반성합니다. 그러면서 아집이 사라지고 편견이 없어지고 내 중심의 삶에서 타인 중심으로, 내 시선에서 타인 중심의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자 마음은 관대해지고 너그러워집니다. 이해심 수용성이 용량이 커지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눈이 뜨인 것입니다. 눈 열린 야곱에게는 이후 17년 세월이 모두 배움의 기간입니다.

 

레아에게서는 그릇의 크기를 배웁니다. 레아는 12아들을 꼭 같이 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라헬에게서 레아로 바꿔치기를 하는 라반을 묵인한 이유입니다. 만약에 라헬이 오래 살아서 집안의 어른이 되었다면 12아들은 반목과 대립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레아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운명에 묵묵히 걸어갔고 편견이나 편견 없이 열두 아들을 꼭 같이 품고 키워냅니다.

 

야곱은 레아에게서 편견 없는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런 면에서 레아는 부인이기에 앞서 훌륭한 스승이었습니다. 편견 없는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보여준 스승입니다. 그걸 모른 것이지요.

열두 아들에게서 배울 바들은 있었습니다. 아들들에게는 효()를 배웠습니다. 사실 좋은 아버지는 아닙니다. 아들이 불효해도 할 말이 없는 아버지입니다. 얼마나 그들을 차별하고 구박했습니까?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해 입히는 일로 차별 대접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들들은 저희들끼리는 치고 박고했지만 야곱아버지만큼은 깍듯하게 대했습니다. 베냐민을 인질로 잡으려고 했을 때 베냐민보다 제 아버지를 걱정하며 애걸복걸했습니다.

아들들이 왜 아버지에 대해 깍듯했는가? 

재산 때문도 아니고 단순히 효심 때문도 아닙니다. 아버지는 언약의 통로요 축복의 전달자입니다. 아버지가 잘못되면 집안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은 불발로 끝나고 취소되고 맙니다. 아버지를 지켜내야 하나님의 언약이 집안에 흐르며 축복의 명가(名家)가 될 것입니다. 아들들이야 이런저런 이유에서 부모를 효도했겠지만 야곱은 아들들의 효의 행위에서 자기가 부모에게 형에게 나아가 하나님께 얼마나 불충한 세월이었는가를 알게 됩니다. 크게 뉘우칩니다. 큰 깨우침이요 큰 배움입니다.

 

-그보다 가장 중요한 배움! 아버지는 아들 요셉에게서 용서하는 힘을 배웁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제들을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피해자로서 얼마든지 형제들의 죄를 묻고 보복할 수 있었지만 용서했습니다. 요셉의 관용으로 아들들은 누구 하나 궐()나지 않았고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초석이 되었습니다. 용서가 주는 선물입니다.

 

요셉의 용서의 힘은 단순히 성품에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대민족을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은 12부족을 전제로 합니다. 내가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열한 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억지로 붙들어 놓았다 해도 진정한 부족통합국가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약성취를 위해 희생적인 용서를 한 것입니다.

 

언약에 근거한 요셉의 용서가 야곱을 감동시키고 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아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부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자식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자신에게 피해를 본 모든 사람들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17년을 살아갑니다. 이런 17년이 야곱으로 하여금 신령한 예언을 하는 성화의 성도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성화에 눈이 뜨니 모두가 스승이고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더라, 는 것입니다. 배움을 통해 성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명상가 류시화 씨는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서 여행서에서 경험담을 말합니다. 북인도 바라나시 여인숙에서 묶고 있을 때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돌아오면 늙은 주인이 묻곤 했습니다.

오늘은 뭘 배웠소?”

관광객에게 뭘 구경했소?” 묻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뭘 배웠소?” 라고 항상 그렇게 물었습니다. 이상했지만 못 들은 척 할 수 없어 아무렇게나 생각난 대로 말해버렸습니다.

인도가 무척 지저분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여인숙 주인은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인도가 무척 지저분하다는 걸 배웠다는 구나하고 전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도 덩달아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래요? 그런 걸 배웠대요?”

다음 날도 같은 질문이 계속되었습니다.

오늘은 뭘 배웠소?”

오늘은 인도에 거지가 많은 걸 배웠습니다.”

오늘은 뭘 배웠소?”

오늘은 인도에 소들이 길거리에 많이 돌아다닌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자주 그러니까 짜증이 나서 어느 날은 이런 말로도 주인을 골탕 먹였습니다

오늘은 인도에 쓸데없는 걸 묻는 사람이 많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러자 여인숙 주인은 정색을 하며 물었다.

누가, 어떤 쓸데없는 걸 묻던가요?”

그들은 결코 장난으로 묻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1주일을 하고 나니까 여인숙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내가 뭘 배웠지?”

다른 도시에 가서도 묻곤 했습니다. 결국 여인숙 주인은 좋은 스승임을 알았습니다.

 

늘 배우려는 사람은 성장하는 사람이고 성화에 이르는 사람입니다. 130년동안 야곱은 배움이 없었지만 이집트에서의 17년 배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130년의 세월은 인간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쫓아가는 삶은 쫓기는 사람이 되고 험악한 세월이라는 고백을 낳았습니다.

 

셰익스피어는 나는 13~20세까지 사이에 내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그 시기는 잠들어 버렸으면 좋겠다.”라는 합니다. 야곱에게도 잠들어 버렸으면 좋았을 130년의 부끄럽거도 험악한 세월, 그러나 애굽에서 17년 주변 사람들이 모드 스승이 되고 그들에게서 삶을 배울 때는 그는 성화가 되고 마지막의 장엄한 유언을 남긴 영원한 스승이 된 것입니다.

결론

교회교육주일입니다. 교육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며 수단입니다. 기독교교육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끄집어내어 예수님처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교육과 배움을 통해 가능합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다방면에서 배워야 합니다. 굳어 있으면 안 됩니다. 모든 이들에게서 배우고 우리 자신들이 배움의 대상이 되어야합니다. 그러기에 지금도 누군가에게서 내가 카피 당하고 있음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여수 애양원 손양원 목사님의 기념관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글이 있습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을 때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말 것은, 

오늘 내가 걸은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교육에는 끝이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배우면 늙지 않는 것이요 배움이 없으면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는 배움의 교실입니다. 모두에게 배워야 합니다. 저런 것은 배우고 저런 것은 배우지 말아야하겠다! 그것조차 배워야 합니다. 그럴 때 성화와 무관한 인생 130년이 끝나고 성화를 만들어 내는 성화유관의 17년의 생애를 살아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교사님들! 구역장님들! 내 인생의 스승 교우님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