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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블루오션 기독교복음과 레드오션 기독교종교(누가복음 24:1~12)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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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고서적에서

블루오션 기독교복음과 레드오션 기독교종교

누가복음 24:1~12

서론

중국 동북부 한 마을에 연꽃으로 뒤덮였던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연못이 마르면서 연꽃 씨앗을 발견합니다. 500년 묵은 연꽃 씨를 미국 과학자들이 배양했더니 놀랍게도 꽃봉오리가 맺히게 되었다고 지난 2002년 영국의 BBC 방송이 보도했습니다.

 

500년 묵은 연꽃 씨가 꽃을 피웠다? 믿어지십니까? 그렇다면 2천 년 전 예수의 부활은 믿어지십니까? 연꽃이 500년 만에 꽃을 피운 것은 과학자들이 증명하니 믿어지고 예수 부활의 역사성은 믿을 수 없다? 그건 예수님의 부활을 500년 만에 꽃을 피워낸 연꽃만큼도 취급하지 않는 처사입니다. 이런 믿음은 구원을 받은 믿음은 아닙니다. 구원은 부활신앙이어야 합니다.

 

영국의 소설가이며 변증가 C.S 루이스는 예수님의 최대 업적은 그분이 부활의 메시지를 선포한 것이고 그 메시지로 다시 사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의 석학 이어령 교수는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세상에 진짜 기적은 부활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어느 때보다 부활신앙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자꾸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독창성을 버리고 일반 윤리종교, 도덕종교로 스스로 하향평준화합니다. 

부활을 알렸던 천사들이 오늘도 나타날 수 있다면, 5, ‘어찌하여 라는 말로 세속화된 믿음들을 책망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새벽, 여인들은 일찍 무덤에 왔습니다. 공회의원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 죽음을 위해 미리 장만한 새 무덤입니다. 어떻게 무덤 문을 열까, 걱정하며 가는데 무덤 문은 열려있고 시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부활을 은근히 기대하면서도 정작 빈무덤이 보였을 때 당황합니다. 부활을 믿느냐? 아멘! 하면서도 사실은 지식적인 신앙심입니다. 머리로는 믿지만 사실은 무덤에 누워 계신 예수님만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예수가 아니라 죽은 예수, 수위 속에 쌓여있는 예수! 병든 자를 고쳐주던 죽은 예수님! 십자가에서조차 용서를 전하던 죽은 예수님! 배신자들, 부인하던 제자들까지 끝까지 품으시다 죽으신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 죽은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 죽은 예수님 정성을 다하려고 향품을 준비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믿음과 정성, 의리가 있는 여인들입니다. 천사는 잘 찾아왔다 합니까? 정성이 고맙다 합니까?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5,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책망 아닙니까? ‘여기에서 찾지 말라! 좋으셨던 분이지만 여기 죽으신 분! 좋은 교훈을 전하셨지만 여기 죽으신 분에게서 살아있는 예수를 찾지 말라는 책망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산 자의 예수님으로 찾으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해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의인 신분으로 만들어 주신 그 부활의 주님! 능력의 주님에게서 예수님을 찾아야지 좋은 교훈을 주셨다고 받들면서도 정작 죽으신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왜 블루오션의 부활기독교를 레드오션의 윤리기독교로 만들어 버리냐 그 책망입니다.

 

블루오션(Blue Ocean) 푸른 바다입니다. 그냥 푸른 바다가 아니라 고기가 많이 잡힐 넓고 깊은 푸른 바다로, 한 기업에서만 신기술 신제품이 개발되어 팔리는 무경쟁시장입니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발상의 전환을 통해 만들어 낸 신시장이지요. 블루오션 단어는 프랑스 유럽경영대학원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가 <블루오션전략>이라는 책을 내면서입니다.

부활은 기독교만의 블루오션입니다. 

어느 종교도 넘볼 수 없는 무경쟁영역입니다. 기성 종교에 불만과 회의를 가진 사람들이 새종교를 창시하려고 여러 종교들 중 우수한 교리만을 모아 가장 합리적이고도 사회에 유익을 줄 통합종교 강령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덕망이 있는 종교인을 찾아가 교주가 되어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교리를 훑어본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훌륭한 종교의 강령일세. 그러나 이런 정도로는 기독교와 경쟁할 수 없어. 기독교와 경쟁하려면 교리만 갖고는 안 돼! 부활이 있어야 하네! 자네들이 죽어서 부활할 것인가, 내가 죽어서 부활할 것인가? 우리 중에 누가 죽고 부활하긴 전에는 기독교를 능가할 수가 없다네! 기독교를 능가할 수 없다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될 걸세

 

그래요! 부활은 기독교만이 갖고 블루오션입니다. 세상의 종교에게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인가? 물어보면 부활이라 답할 것입니다. 유교에 삼강오륜(三綱五倫)이란 훌륭한 가르침이 있고 자비의 종교 불교에는 기독교와 유사한 십계명이 있습니다. 석탄일이 있고 불당, 불찬가, 불경 어린이불교학교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좋은 점은 모두 벤치마킹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벤치마킹 못 해요
. 다른 종교도 부활은 흉내조차 못 냅니다. 교주 무덤을 너무 선전했거든요. 석가모니는 인도 능수해안에, 마호메트는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묻혀 있습니다. 공자 무덤은 중국 곡부성에 있습니다. 교주들의 무덤을 너무 신성시하고 자랑한 것이 오히려 부활교리만큼은 벤치마킹 할 수 없게 발목을 잡아버린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뼈 하나라도 발견되면 그 날로 끝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 인격에 기초를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종교들은 기독교의 부활을 조롱하면서도 부활교리를 너무 부러워합니다. 부활과는 도무지 경쟁할 수 없습니다. 모든 교리와 제도는 다 흉내 내면서도 기독교의 부활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블루오션입니다.

부활교리가 얼마나 황홀합니까? 십자가 속죄, 부활, 성령의 역사 모두가 무경쟁교리 블루오션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스스로 기독교만의 블루오션을 자꾸 포기하려 합니다. 부활은 중요하지 않다, 십자가의 속죄사역도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의 사랑, 자기희생,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위해 사셨던 그 예수님을 믿고 전하면 된다, 이런 믿음은 참 기독교가 아닙니다.

 

2천 년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놓아버리고 죽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거짓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의 가르침이 훌륭하고 희생의 본으로 살았어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지 못했다면 당연히 구원은 물 건너가고 본받을 바도 없습니다. 왜냐? 부활을 예언하고 부활하지 못했다면 예수님은 거짓 교사이고 거짓교사의 좋은 가르침은 따를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은 자가 전해준 산상수훈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열린 종교인이라는 말을 듣기위해 기독교 신앙을 종교 중의 선택사항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윤리, 기독교도덕이 십자가와 부활을 버리고 얻어내는 행동강령이라면 그건 기독교가 블루오션을 버리고 레드오션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레드오션(red ocean) 붉은 바다’, ‘피로 물든 붉은 바다를 말합니다. 너무 심한 시장의 경쟁으로 승자는 없고 피만 흘린다는 의미로 출혈경쟁시장이라고도 합니다. , 경쟁회사와 상품이 유사해서 가격경쟁, 광고, 서비스 등의 판매 전략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시장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놓아 버리고 종교윤리와 도도덕심, 인권, 사회복지로 세상 종교와 경쟁할 때 기독교는 레드오션의 종교가 되고 맙니다.

 

기독교의 블루오션 믿음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죄의 문제를 처리합니다. 모든 종교들이 죄를 지적하지만 속죄는 제시하지 못합니다. 좋은 교훈은 전하지만 신체와 영혼의 부활을 말하지 못합니다. 교주가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모든 것을 벤치마킹해도 십자가와 부활은 못합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도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4:12) 선언합니다.

그런데, 정작 기독교가 블루오션을 버리고, 레드오션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블루오션 십자가와 부활을 버리고 세계 인권시장에 봉사시장에 윤리와 도덕으로 기독교행세를 합니다. 이건 기독교신자가 할 임무이지 기독교 믿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인간 구원을 위한 종교이고 그 중심에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누가 뭐래도 절대적이고 다른 종교는 상대적이다! 이런 차별화를 놓으면 안 됩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던 새벽에 천사가 블루오션의 기독교를 전해줍니다.

 

5,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죽은 자 가운데서 교주를 찾는 종교 교주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 이것은 레드오션입니다. 모두 선한 가르침을 갖기위해 자기 종교를 믿으라고 서로 경쟁하면서 레드-붉은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예수 그리스도는 블루오션이라고 합니다.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살아나셨다! 이게 블루오션입니다. 다른 종교, 다른 교주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예수님의 부활! 이런 블루오션을 놔두고 어떤 신학자, 목사들은 부활을 부인합니다. 부활 같은 것 믿지 말고 예수님의 좋은 가르침을 전해 좋은 세상을 만들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거 천사들에게서, 사도들에게서 전해온 복음이 아닙니다. 레드오션의 기독교는 배달사고난 기독교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식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 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주께로부터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한다. 바울은 어떤 물품-진리를 바르게 인수하고 바르게 배달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가 배달받고 배달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4:25)

그런데 기독교가 세상과 눈높이를 하기 위해 자꾸 배달사고를 냅니다. 

인본주의 기독교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잘못 배달되는 당시의 복음을 다른복음이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당시 율법주의자들 스스로가 기독교복음의 블루오션을 레드오션으로! 절대적인 기독교를 상대적인 기독교로 하향평준화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주께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요! 천사에게서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냥 누군가에 의한 벌어진 배달사고들입니다.  

 

천사가 뭐라고 말합니까? “왜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인들이 지금 누구를 찾아왔나요? 예수! 어떤 예수를 찾아왔나요? 죽은 예수!

 

1,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향품은 살아있는 예수님에게 바르려는 것입니까? 죽은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려는 것입니까?

3,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니라 뭐를 찾았어요? 시체, 시신을 찾은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부활해서 무덤에서 나왔는데 여인들은 정작 죽은 시체! 죽은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

4, 이로 인해 근심할 때에 뭐를 근심합니까? 마태복음 27:64, 예수의 시체를 누가 가져간 것이 아닌가, 그걸 근심합니다. 그 시체 찾아서 뭐를 하려고요? 향을 발라드리려고요?

 

만약 예수님이 시신으로 누워있다면 예수는 비싼 향품을 발라드릴 대상이 됩니까? 예수님 스스로 3일 만에 부활한다고 세 번이나 말했어요! 그런데 지금 누워있으면 어떻게 되요? 사기꾼이지요! 예수님이 남긴 아무리 좋은 교훈도 막판에 부활하지 못하면 사기꾼의 달콤한 교훈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발라드리려고 향품을 갖고 왔다는 자체가 난센스입니다.

 

이런 난센스가 통하는 곳이 사이비기독교이고 이단입니다. 이런 난센스 기독교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십자가를 부인하는 신신학자들이고 인본주의 자유주의신학자들입니다. 블루오션을 받아 레드오션으로 바꿔치기를 하는 배달사고를 내는 사람들이지요!

 

왜 이런 배달사고가 일어날까요? 기독교를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부활보다는 사랑하라! 용서하라! 남을 대접하라 이런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중심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을 영혼구원에 두지 않고 집 짓고 먹을 것 주고 인권이나 복지향상에 두는 결과입니다. 이건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결과물입니다. 배달사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단을 멸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육신과 가난에서의 구원보다 더 귀한 것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사단을 멸하시려는 것은 세상의 구조악()을 멸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죽은 예수의 가르침이나 따르고 있다면 다른 종교와 다름이 뭐가 있겠어요? 우리 도덕이 타종교보다 나으면 얼마나 낫고 불교도보다 우리 행동이 나으면 얼마나 낫겠어요? 목사들의 수양과 인격이 불교 고승들보다 나으면 얼마나 낫겠어요? 오히려 그분들보다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기독교는 결코 종교의 블루오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따르는 종교인이 아니라 지금 살아계셔서 나를 보호하시며 힘을 공급해 주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에게 길을 물으며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님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래로 나아갈 에너지를 소비하는 지금, 부활 신앙이 필요한 때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예수님과 함께 호흡하면서 앞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부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하고 부활신앙을 내 삶의 역동성으로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너는 죽은 내게 길을 묻겠느냐? 살아있는 내게 길을 묻겠느냐?”

죽은 내게 길을 물으며 가고 있느냐, 살아있는 내게 길을 물으며 맡기며 가고 있느냐?”

 

평생 우리 스스로에게 물으며 대답하며 살아야 할 질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던 길을 더 걷고 달려가던 길을 계속 달려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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