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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니고데모, 영생을 찾아서(요한복음 3:1~5)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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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 영생을 찾아서

요한복음 3장 1~5절

서론

요한복음 4장의 수가성여인은 남자 중독에 빠져있는 낮은 자존감의 소유자입니다. 춤이 없는 불행한 여인입니다. 여인에게 예수님은 원수지간 유대인, 헤픈여자로 취급하는 유대남자, 외간여인에게 염치없게 물달라는 남성우월주의자 악연이 될 수도 있는 나쁜 남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대화를 통해 숨겨진 부분을 드러내셨을 때 여인은 남자에서 랍비로-랍비에서 선지자로-선지자에서 결국에는 그리스도를 만났다! 1 1~3절에서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같은 신세여인들에게 창조주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달려가는 춤추는 여인이 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위대한 일이 있을까요? 사람은 정말 변화될 수 있을까요? 타고난 성품에서, 살아온 스타일에서 온전히 변화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런다면 2,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것보다 사람이 자기성질에서 변화를 입는 것은 더 큰 이적입니다. 그만큼 안 변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변합니다. 목말라 우물에 나왔는데 알고보니 사랑과 인정, 애정에 목말랐던 거예요! 예수님을 만나자 물동이를 버립니다. 남자중독에서 빠져나왔고 대인기피증 극복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멋지고 고마운 남자를 만난 거지요. 그런 예수님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수가성의 여인을 변화시켰던 예수님, 그보다 앞서 3장에서 니고데모를 만납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아도 얼마든지 존경 받고 행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완벽남()입니다.

1, 바리새인 중에. 당시 6천명 정도의 멤버십카드(?) 회원, 특권층 형제단입니다.

 

지도자라. 산헤드린은 입법과 사법을 총괄하는 최고 정책의결기구였으며, 회원은 71, 대제사장이 의장이고 만장일치로 의결합니다. 그러니 한 사람의 의원특권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10, 너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랍비로, 일종의 신학자입니다. 종교국가에서 신학자는 대단한 권력입니다. 이란에서의 호메이니를 비교하면 됩니다. 당연히 대단한 부자입니다.

니고데모는 정치적으로 여권, 지위는 국회의원, 지성인이고 거기다 부자! 부러울 게 없지요!

 

이 대단한 남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2, 밤중에!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를 받은 대부분은 문제를 해결하려 예수님께 찾아갔습니다. 회당장 야이로 12살 난 딸을 살려 달라( 5).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병을 고쳐 달라, 지붕을 뚫고 예수님을 찾습니다(2). 12년 혈루증여인은 옷자락에라도 만지면 고침을 받을까, 찾았습니다. 모두 고침을 받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왜 방문했을까요? 그것도 자기 신분과 체면을 의식하고 남의 시선을 피해 왜 밤중에 찾아왔을까요?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찾았나요? 살만한 분들이 왜 예수님을 믿고 있나요? 어거스틴은 그의 경험을 근거로 계란 끝의 비어있는 공간처럼 인생 누구에게나 그런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이걸 하나님으로 채워 넣기 전에는 인생은 뭔가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니고데모,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그래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2,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2장 가나의 혼인잔치, 물을 포도주로 만든 그 이적을 알고 있다! 당신이 우리 민족의 지도자로 손색이 없겠다는 뉘앙스입니다. 최고의 접대멘트도 서슴지 않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예수님을 불온자로 주시하기 시작한 예루살렘공회 회원신분으로 밤중에 방문한 자체가 징계감인데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요 함께 하는 사람이라 추켜세웠다는 것은 징계를 넘어 사형입니다. 얼마나 진리에 목마른 구도자였으면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방문했을까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제시합니까?

3, 거듭나야 한다!

 

뭔가 번지수를 잘못 잡은 거 아닙니까? 근육이 아파 나은통증의학과를 찾았는데 이빨을 벌려보라고 합니다! 한참을 이빨만 검사합니다. 당연히 잘못된 진단입니다! 지금 이 격입니다.

 

거듭나야 한다! 이건 수가성 여인에게 요구해야 합니다! 남성을 경멸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나쁜 남자 중독! 타락한 윤리, 편협성! 당신은 거듭나야 해! 여인에게 이걸 요구해야 합니다.

사실 니고데모는 거듭날 필요가 없는 훌륭한 남자입니다. 그의 허전함은 진리에 관한 것! 여인은 육체로 목이 마르고 니고데모는 진리에 목마릅니다. 여인에게는 거듭나야 한다! 잘못을 지적하고 진리에 목마른 이 남자에게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진리의 생수를 전해야지요!

 

그런데 예수님, 반대입니다. 부도덕한 여인에게는 생수를 권하고 반듯한 남자에게는 거듭남을 요구합니다. 상당히 의아스럽고 뭔가 안 맞아요! 니고데모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쁩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패러독스(paradox) 역설이 있습니다. 여인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불량한 여자니까! 니고데모는 윤리에서 완벽남입니다. 이런 남자가 무엇을 원하겠어요? 더 고상한 진리, 학문적인 진리, 밤중에 찾아온 것은 사실 예수님이 민족의 힘을 규합하고 로마제국과 대항하는 구심점, 대안이 될 수 있는가, 2, 우리가 당신은 할 때의 우리는, 몇 의원들과 의견교환이 있고 대표로 왔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수단화하려는 거예요! 그 인품의 이면에는 예수님을 자기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지식인들의 영리함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남자를 보니 모든 것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이 빠졌습니다. 뭘까요? 속죄가 없어요! 율법도 있고 성전도 있고 제사도 있어요! 그것들은 신분을 탄탄하게 만들어주고 존경 얻는 수단이고 특권입니다. 그러나 죄를 속해주지 못해요! 그들에게 죄의 문제는 내가 선행하고 율법을 행하고 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키면 죄가 없어진다 해석합니다.

 

유대인들은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고 에스라가 율법을 엄청 강화하면서 성전제사절대화 하면서 율법을 통한 의로움과 구원 원리를 만들어 버린 거예요! 이런 율법원리에 의하면 자기들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무지한 민중들을 감시하고 그들을 책망하고 하나님의 감시관으로 자처합니다. 그러면서도 뭔가 2% 부족하고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어 찾아온 거예요! 그 허전함이 민족독립이 아닐까 해서.

 

예수님께서 이걸 보셨습니다. 

그래서 대번에 거듭나야 한다! 거듭남을 요구하십니다!

너의 잘못된 구원관! 율법지상주의! 지상주의 천국관! 유대민족주의! 이런 자아에서 거듭나야 한다! 율법은 죄를 보여줄 뿐 씻을 수 없다! 자기 의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 6, 육에서 난 것은 육에 불과할 뿐이다, 속죄가 없이는 결코 죄사함이 없다! 

 

그러면서 16, 그 속죄사역의 주인공이 자신이라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니고데모의 생애를 볼 때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극적인 변화, 거듭남을 체험한 것 같은 경험은 없는 것 같아요. 예수님의 가르침에 응하기는 했지만 늘 조심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어둠 속에서 예수를 섬긴 자 좋은 의미도 있고, 안 좋은 의미도 있습니다. 다른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체포하려 했을 때,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7:51)면서 항의도 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완전히 거듭난 예수제자로, 그리스도인으로 나타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된 뒤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의 시신에 몰약과 침향을 바르고 매장한 때입니다(19:39). 이런 때는 꼭꼭 숨어야 하는데 오히려 신분을 드러낸 것입니다. 거듭난 것이지요! 이후에 예수님 제자들과 행동을 함께 했겠고 당연히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자격은 박탈당했겠지요!

 

그러나 마음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부활 이후 예수님이 독생자가 되심이 증명되었고 인간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속죄사역을 통해서만 의로워질 수 있음을 확인했을 때 그를 눌렀던 율법의 무게에서 자유함을 누렸고 그를 자유케 하는 복음 안에서 춤추는 생애가 된 것입니다. 그의 생애 중에서 최고의 선택은 밤중에 예수님을 방문했던 바로 그 날입니다. 그 날로 그는 나랑 춤출래? 예수님의 손 내미심에 거듭남의 무대에 올라섰고 환희의 춤꾼이 된 것입니다.

 

성찬예식은 예수님의 속죄사역을 기념하며 죄에서의 정결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주님께서 나의 죄를 속해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나의 모든 신앙행위는 단순히 종교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이런 종교행위는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가 삭제된 그냥 느낌이 좋은 정겨운 종교, 죄를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변명하고 변호해 주는 힐링종교, 십자가와 부활이 없이도 건재(健在)하는 짝퉁기독교로, 짝퉁기독교인으로 변질시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신앙은 우리의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나는 스스로 내 죄를 삭제할 수 없는 죄에 대해 무능한 자이고 죄가 있는 한 내 춤은 탈선의 춤이 된다는 것!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될 때 비로소 성령 춤꾼의 환희(歡喜)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이제 성찬으로 나아갑시다!

[성찬식 설교에서 조금은 짧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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