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 설립 39주년]
주님과 함께 달리겠습니다!
예레미야 12장 5절
서론
우리교회가 설립 39주년을 맞습니다(2023년 9월 29일). 39주년이라면 햇수로는 40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졸업하고 가나안 앞에 서 있을 시간입니다. 광야 40년도 만만치 않았지만 가나안의 입성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은 앞날 역시 기대와 설렘과 함께 두려움도 컸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요.
가나안에는 일곱 원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살아서 돌부리처럼 단단히 박혀 있습니다. 그들을 뽑아 멸해야 하고 가나안 지경 밖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리더십 교체로 오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모세에게서 여호수아에게로… 모세의 리더십과 영성, 체력, 담대함… 등은 다시는 그런 인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할 정도입니다(신34:10).
40년 광야에서 양식이 되었던 무료급식 만나 공급도 중단될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노동하여 먹고 살아야 하는데 가나안이 아무 데나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들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백성들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강하고 담대하라!’ 주문을 3회나 계속합니다(수1:6,7,9).
1. 사람들과 흔들리며 걷다!
예레미야는 남유다 멸망 직전의 선지자로 아나돗 소읍에서 평탄하게 살던 제사장 아들입니다(1:1). 착하지만 강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나는 아이라”(1:6) 하면서 소명을 마다했습니다. 연령적 어린 아이가 아니라 선지자가 될만한 능력이나 자질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장 아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로얄 패밀리’입니다. 성전에서 제사와 기도를 드리며 안주할 수 있습니다. 때마다 나오는 봉급으로 안정되게 삽니다. 이걸 세습까지 합니다. 강하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선지자는 다릅니다. 선지자는 치열한 삶을 요구합니다. 때로는 왕과 맞서야 하고 백성들과 반대편에 홀로 서야합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시대와도 대적해야 합니다. 제사장들은 목을 내놓는 일이 없지만 선지자들은 필요하면 목도 내놓아야 합니다. 제사장이 제사의식에 목숨을 건다면 선지자는 자기 ‘말’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선지자는 자기가 말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사로운 삶이 아닙니다. 강함과 능력, 배짱, 용기, 탁월한 지도력까지 겸비해야합니다.
제사장의 아들로 제사장직을 세습하고 평탄한 삶을 기대하던 예레미야에게 선지자로서의 부름은 당혹과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슬프도소이다!” 탄식했습니다. “내가 선지자라니… 이 일을 어쩔꼬…” 손을 내저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이 워낙 강해 선지자가 되고 이후, 삶은 너무 버거웠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역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평안이다, 괜찮다, 안심하다, 는 메시지를 원했고 그렇게 전하는 사기꾼 선지자들은 환영을 받았지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패망을 외쳤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기에 유다는 망하게 된다!
백성들은 반역자로 공격했습니다. 처음부터 야성의 선지자로 출발했다면 견디겠지만 제사장 아들이기에 근력이 약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흔들렸습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살해위기를 받았을 때는 두려웠습니다.
11:21,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고향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까 섭섭도 하고 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렸습니다. 말은 선지자이지만 선지자의 강력한 동력이 없기에 사람들의 말과 처사에 맥빠지고 만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책망하시는 말씀이 5절입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여기 보행자는 일반 백성들입니다. 네가 평안한 땅에서… 평안한 땅에서 사는 백성들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평안한 데도 조금만 일에도 나약하며 흔들립니다. 사람들 수준에서 너도 흔들린다면 앞으로 말과의 경주에서는 어찌하겠느냐는 ‘하나님의 염려(?)’입니다. 선지자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수준에 맞춘 선지자로사의 보행이 필요한 것이지 아직도 일반 백성들 수준에서 흔들리고 있느냐, 두려워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세상은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너무 많이 달라졌습니다. 교회는 더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배 영성, 기도 영성, 찬양 영성… 등 교회의 본질을 이루는 영성은 물론 심방문화, 경조사문화, 공동체 모임… 등이 엄청 약해졌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코로나 이전보다 훨씬 더 나약한 교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옛날이야기를 해서 그렇지만, 저희들은 어려서 초등학교 때 등짐 지고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바닷가를 가려면 아이들 걸음으로 50분~1시간은 족히 걸립니다. 왕복 2시간입니다. 모래를 지고 수없이 다녔습니다. 지금의 우리 교회 예배당도 수도 없이 수리했습니다. 아무 소리하지 않고 여성도님들이 전사(戰士)처럼 일했습니다. 지금은 의자 하나 나르자 해도 힘들어합니다. 산에서 나무 붙들고 소리 지르며 기도하던 야성(野性)이 핍박도 어려움도 이겨냈고 맨주먹으로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지금은 예배당 건축은커녕 돈 10만원 내라면 불평합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하루 나오지 않았다 야단을 쳐도 울면서 잘못을 빌었고 더 열심했습니다. 지금 야단 한 번 쳤다가는 다음 날로 그만 두겠다, 합니다. 자존심에 상처 하나가 나면 믿음의 끈을 놓아버립니다. 너무 약합니다. 그러면서도 비판력은 역대 최고조입니다. 그만큼 우리 수준이 교회 밖의 사람들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네가 이 정도의 어려움에서도 비틀거린다면 코로나보다 더 센 것이 오면 어찌하려느냐? 이 정도의 달리기에서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어찌 센 코로나와 싸워 이길 수 있겠느ㄴ냐? 또 지고 말 것이나! 또 하나의 40년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말과 경주하며 달리다.
하나님의 책망 앞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을 반성합니다. 선지자로 살고 있지만 제사장 아들이라는 금수저 신분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찬바람을 맞으며 견디어 내는 야성이 없었기에 보행자들의 말 한 마디, 음모에 흔들려 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망 앞에서 선지자는 다짐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이제 저는 보행자가 아니라 말과 함께 달리는 경주를 시작하겠습니다!”
예레미야는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선지자입니다! 일반인처럼 눈앞의 일로 쉽게 낙심하며 하나님을 원망하여 살 사람이 아니라 말처럼 달려야 할 사람입니다. 말은 달려도 지칠 줄을 모릅니다. 그래야 명마(名馬) 군마(軍馬)가 됩니다. 예레미야는 말과 경주를 해야 할 사람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원망하고 무너져도 낙심하면 안 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날의 삶에 만족하고 적당하게 살아도 예레미야는 ‘적당주의’로 살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약해지는 백성들을 이끌어 세우면서 달려야 할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백성들과의 걸음에서도 자꾸 뒤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5절의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이 정도의 고난 가지고 그런다면 더 큰 고난에서 어찌하겠으며 이 정도의 일로 낙심한다면 앞으로 더 큰 일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책망입니다.
제 목회관이 친정어머니 목회관입니다. 그런데 제 목회관을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조금이라도 상처받을 말을 못하고 안 들으려 합니다. 조금만 섭섭하면 목사님은 안 그런데 교인들은 그러니 안 그러니…, 하면서 툴툴댑니다. 친정어머니는 딸을 위로하지만 단순히 편드는 것이 아닙니다. 시댁으로 돌아가 잘 견디며 살도록 시댁 식구들과 잘 어울려 살도록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딸이 강하도록 만드는 것이 친정어머니의 바램입니다. 허구한 날 받아주기만 바라도록 만들면 딸의 앞날을 망치는 어머니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습니다. 약하고 힘들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 그들을 무장시켜서 여간하면 여간한 일에는 시험에 들지 않는 강한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 우리교회 친정어머니 목회관입니다. 그럼에도 그제나 이제나 늘 여리고 요만한 말도 못 듣고 상처받지 않을까, 시험받을 일이 없나? 아슬아슬한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늘빛교회는 패배자들의 도피 장소에 불과합니다.
다윗은 망명시절에 아둘람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빚진 자, 환란 당한 자, 원통한 사람들(삼상 22:2)… 루저들입니다. 이들이 아둘람 굴에 모여 허구한 날 세상을 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훈련했습니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사람들로, 더 이상 원통하지 않는 사람들로, 더 이상 빚진 자들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들로 스스로를 훈련하면서 아둘람굴에서 강한 용사로 거듭납니다.
늘빛교회가 상처만 싸매주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싸워 이기는 사람들, 자기 상처를 치료하고 남의 상처도 싸매주는 사람들, 시험 들기에만 급급한 사람들이 아니라 시험 든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강서구의 아둘람 굴! 이것이 제가 꿈꾸는 늘빛교회입니다.
3. 주와 함께 달리다.
예레미야는 동족들의 불신과 살해의 위기 앞에서 정신을 바짝 차렸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자꾸 변합니다. 이번에는 조국의 멸망이라는 엄청난 파고를 만났습니다! 이걸 넘어야 합니다. 멸망을 넘은 또 큰 것을 바라보아애 하는데 선지자는 눈앞의 파도 앞에서 다시 말과 달리던 기세가 꺽이고 보행자의 걸음으로 낮아집니다. 그러자 마음은 흔들리고 다시 일반 백성의 심정, 제사장의 금수저 신분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합니다.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들이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입니까?”(1절).
신정국가가 왜 악의 화신은 바벨론제국에 망해야 하고 선민들은 이방인들의 말굽에 짓밟혀야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편에 서던 제사장 사역에서 하나님 편을 드는 선지자 신분으로 세웠더니 지금 하나님께서 따지고 있습니다. 말과 경주하는 치열함에서 다시 평지를 보행하는 백성들의 수준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기 힘으로 말과 달리다 힘이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다음세대의 공격은 상당히 거칠게 밀어닥칠 것입니다. 인권법, 차별금지법을 가장한 악법들이 제정되고 교회는 사방팔방으로 우겨 쌓임을 당할 것입니다. 교회에 동성애 목회자들이 들어와도 인권법 때문에 마음껏 사임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자들이 목사에게 주례를 청할 것입니다. 만약 거절하면 인간 차별입니다. 강단에서 동성애에 대해 설교하면 반발한 사람들이 고소고발을 합니다. 성적 수치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SNS로 전국적으로 고발자들을 모집합니다. 법원이 1인당 1백만원 씩 배상하라면 10명이면 1천만 원, 1000명이라면 1억입니다. 변호사가 1만 명을 모아 집단 고소를 한다면 교회가 10억원이 어디 있습니까? 목회자가 감옥에 가던지, 교회가 문을 닫던지… 그러면서 교회는 말씀에서 멀어집니다. 공연한 가정이던지, 지나친 법해석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영국을 비롯한 유럽교회가 아무렴~ 하다가 지금 영국은 무신론국가가 되고 거리에서 전도를 하다, 강단에서 동성애를 죄라 지적하다 수감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엊그제 총회가 끝났는데 대부분 교세가 하락세입니다. 10년 전에 281만 명이던 예장통합교단은 그동안 50만 명이 떨어졌고 2027년에 200만 명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예장합동 우리교단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세가 떨어지는 것을 염려하지 교인들의 영성, 열정, 기도, 봉사영성… 질적인 저하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질이 떨어져 버리면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야합하거나 싸움에서 밀립니다.
하나님의 책망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5절,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하나님의 책망을 들은 예레미야는 선지자적인 야성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남유다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거짓선지자들의 조롱을 받고 왕의 노여움을 사서 우물에 구금되고 백성들에게 야유를 당해도 예레미야는 제 길을 갑니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받을 고난을 생각해서 비록 울지라도 자신이 힘들다고 울지는 않았습니다. 조국의 망함도 하나님의 경륜 하에 있다 생각했기에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로 하여금 이런 강골 선지자로 변하게 한 것은 바로 이 한 줄의 생각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걷겠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달려가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과 걸음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고난의 길이었고 힘들었습니다. 그때마다 남처럼 살면 되지, 혼자 튈 필요 없잖아… 유혹을 받아 흔들렸지만 그는 점점 성장하면서 뉸높이를 맞춥니다. 이제는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세웠을 것입니다.
“나는 말과 같이 경쟁하며 달려야 될 사람이다! 그러려면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 필요하다!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달려야 하나님의 힘이 공급된다. 나는 이제 하나님과 달리겠다!”
예레미야는 그렇게 치열한 삶으로 나섰습니다. 그는 시대와 불화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평안을 외친 것이 아니라 망함을 외쳤습니다. 백성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라 귀에 거슬리는 예언을 했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쓴 약과 같은 것이어서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그의 뺨을 때렸습니다. 말라버린 우물에 던져져 죽을 고비를 검긴 적도 있습니다. 피곤하고 낙담되고 모두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에서도 언제나 주님과 함께 달리며 능력을 공급받는 믿음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치열해졌고 강해졌습니다. 제사장의 때를 완전히 벗고 선지자의 생애를 끝까지 걸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 역시도 진흙으로 빚어진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실망하고 무너지고 낙담하고…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손에 붙들리면 주님과 함께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걸음을 뛰어넘어 말과 경주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예레미야는 말(대형 고난)과 경주에서 이기려고 주님과 함께 달렸습니다. 상처도 많고 눈물도 많았지만 나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주와 함께 달렸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에게는 날마다 새로운 힘을 주신다(이40:31),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달렸기에 그 힘으로 선지자는 상황에 무너지지 않고 이기는 생애를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셨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그래서 여호수아도 모세만큼이나 큰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제 주님과 함께 달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낙심할 때 낙심하지 않고 말들과 경주하여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결론
학개는 포로기 이후, 4개월짜리 선지자로 성전건축에 앞장섭니다. 그 열정으로 그동안 오랜 세월을 중단했던 성전을 건축했지만 이전에 비하면 초라합니다. 백성들의 한숨에 선지자는 다른 말을 합니다.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2:2)
그러나…
9절,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무엇을 보시고 이런 대단한 축복을 약속하십니까?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 초라한 성전에 상한 마음, 선민이라 하지만 눌리고 밟혀 고단했던 삶이 제물이 되고 제사가 되어 하나님께 닿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그 화려했던 성전보다, 이 초라한 성전이 나중에는 더 큰 영광이 있을거라, 약속하셨습니다. 그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 교회성전 지점 중의 하나인 늘빛교회가 39주년을 맞는 오늘 하나님께서 역시 약속하십니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약한 자들을 들어서 강한 자로 사용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늘빛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오랜 세월에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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