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만이 희망이다!
빌레몬서 1장 8~11절
서론
오늘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소개하겠습니다. 빌레몬서는 짧고 사적인 편지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드러납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베풀며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귀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으니까 귀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교회는 무익한 사람을 유익한 사람으로 만들고 미움 받던 사람을 사랑 받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고, 불평의 사람을 감사의 사람으로, 은혜를 모르던 사람들을 은혜의 저수지로 만드는 재생공장입니다. 변화된 오네시모가 교회가 존재하는 답이 됩니다.
믿기 전과 믿은 후
본문은 골로새교회의 지도자 빌레몬과 그의 노예 신분 있던 오네시모와의 관계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오네시모는 노예입니다. 노예는 출생부터 노예 신분이거나 전쟁에 포로, 전쟁에 패했을 때 배상금으로 노예 신분이 됩니다. 개인적 부채로 노예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노예로 사는 기간은 주후 1세기경에는 7년입니다. 7년을 채우면 자유민이 됩니다. 집으로 돌아가거나 주인 곁에서 벌어먹고 살았습니다. 주인 곁에서 살아가는 경우, 약사 노예는 약국을 차렸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돈을 주인에게 차용했겠지요. 이제는 전주(錢主)와 손님의 관계로 발전합니다. 주인은 노예를 사오면 부려먹고 자유민이 된 후에는 돈을 빌려 이자 챙기고… 그러니 노예제도가 성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예가 도망가서 잡히면 일벌백계(一罰百戒) 차원에서 처벌 받습니다. 숨겨주면, 범인은닉죄가 아니라 장물취득죄로 형사 처분을 받습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물건입니다. 그래서 도망간 노예를 잡아다 주는 집단도 있었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 골로새교회의 장로님 정도 될 것 같아요! 그 집 노예로 도망쳤다가 바울을 만났습니다. 골로새에서 로마까지는 배를 두 번이나 갈아 타야하는 먼 거리를 무사히 갔다는 것은 오네시모가 대단한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로마로 튄 이유는 노예들이 많고 숨기도 좋고 검투사가 되어 공을 세우면 방면(放免)이 됩니다. 그래서 로마로 숨어들어 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에서 도망자 신분이 발각되었거나 도둑질이나 뭔가 범법하여 감옥에 갔는데 거기서 바울과 에바브로를 만납니다.
23절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
에바브라(에바브라디도?)는 골로새교회의 설립자입니다. 빌레몬이 그 교회의 장로님(?)이기에 딱 걸린 것입니다! 바울과 에바브라는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오네시모는 복음을 들어 회심하게 되고 새사람 됩니다. 그래서 오네시모에게 편지를 써서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11절, 전에는 네게 무익했으나⋯
오네시모는 무익한 사람입니다. 주인의 돈을 훔쳐 도망간 노예로 보입니다. 홍익이 아니라 홍해인간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에게는 ‘유익한 자’입니다.
11절,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12절, ‘심복’이다⋯.
심복(心腹)은 심장이라는 뜻입니다. ‘심장’은 인간의 애정이 깃들인 곳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머리에서, 손에서 나오지 않고 뜨거운 심장에서 나옵니다. 그는 내 심복이라⋯ 충성스러운 내 종복이요 하수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이 모든 애정을 쏟는 사랑스런 사람이라 말합니다. 그를 보면 심장이 뛴다는 것입니다. 그가 복음을 발 받아들이고 말씀 안에서 자라는 것을 볼 때 심장이 뛴다는 것입니다.
오네시모. 전에는 빌레몬에게는 해를 끼쳤던 무익한 사람, 그러나 이제 바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오네시모에게 어떻게 이런 변화가 있게 되었을까요?
오네시모는 복음을 이해할수록 과거의 신분과 행적으로 괴롭습니다. 주인과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바울도 자칫 잘못하면 장물취득죄로 고발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이 편지를 써서 들려 보냅니다. 주인에게 용서를 받고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사람들에 관한 모든 책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용서를 그저 받았다 해도 사람들에 대한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이 없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모든 잘못에 대해 도매금으로 다 넘겨서는 안 됩니다. 내 행위에 대해서는 예수님을 믿고서도 책임을 지고 당사자에게 잘못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남만 용서해주면 되었다고 은혜의 그늘 안으로 숨어버리고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구하지 않음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믿음의 성장이 느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우습게 만들어 버립니다.
신애라는 여성은 남편이 암(癌)으로 죽고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이사를 갑니다. 아들이 너무 소극적이어서 웅변학원에 보내는데 원장이 유괴하고 살해합니다. 견디기 힘들어하던 신애는 교회에 나가 용서의 복음을 듣고 용서해주기로 다짐하고 교도소로 가해자를 찾아갑니다. 그랬더니 가해자가 환하게 웃으며 완전히 종교적인 언어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자매님! 나는 감옥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내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신애는 뚜껑이 열려버립니다. 아니? 피해자인 내가 용서해 주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왜 용서해 버리시냐고? 피해자는 이렇게 아픈데 가해자는 저렇게 평안해도 되냐고? 하나님의 은혜에 숨어서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 <밀양>의 내용입니다.
이정향 감독의 영화 <오늘>도 같은 맥락입니다. 자신의 생일날 약혼자를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로 잃은 다큐멘터리 PD 다혜는 용서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으로 가해자 소년을 용서합니다. 쉽지 않는 일이지요. 1년 후, 다혜는 소년이 더 큰 범죄를 저지르며 피해자들이 생긴 것을 알게됩니다. 용서해주지 않고 감옥에 보냈으면 무고한 희생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도 때로는 죄가 된다’라는 또 하나의 딜레마가 나옵니다. 그래서 영화 속의 다혜는 “용서해준 것이 죽도록 후회됩니다.” 라고 자조 섞인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무조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었으면, 그래서 의인의 신분을 얻었으면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답게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가해한 사람에게 진정한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하나님께 숨어버림으로 은혜를 남용하는 죄들을 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와 빌레몬 사이에 모른척 할 수도 있습니다. 오네시모도 과거를 묻고 그냥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를 구분합니다. 오네시모도 그런 복음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빌레몬에게 보내 용서를 구하게 합니다. 이것이 진짜 기독교입니다.
용서의 이유
19절에서 바울은 괘씸한 사람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우선, “친필로”⋯. 이는 바울 자신이 보증한다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여러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빌레몬 너에게도 유익한 사람이 될 것임을! 내가 친필로, 사인으로 보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너도 하나님에게 용서받은 자였기에, 전에는 무익한 자였다가 지금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사랑 받는 지도자가 되었기에 용서를 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는 단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교회의 문제를 풀어가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손에 편지를 들려 보내면서, 빌레몬 개인이 아니라 2절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오네시모의 문제는 빌레몬과 오네시모 당사자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골로새교회 교인들 간에도 이런 해결방법이 있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교회는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이기는 했어도 마음은 하나가 되지를 못했습니다(골3:11 이하). 당파와 서로에 대한 혐의로 불신 중에 있었습니다. 가정을 이루었지만 부모와 자녀, 부부간에 바른 믿음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율법적이고 조건적 관계로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하기에 나도 그렇게 한다! 이것은 복음화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골로새교회가 복음 안에서 바로 세워지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를 돌려보냅니다. 오네시모는 단순히 빌레몬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보냅니다. 이런 일을 통해 은혜를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빌레몬, 용서하다
빌레몬 장로는 오네시모를 받기 위해서는 아직 용납이 안 됩니다. 그는 괘씸한 사람입니다. 도망자를 무조건 용서했다가는 다른 노예들에게 좋지 않는 선례를 남깁니다. 다른 노예 주인들에게 항의를 받을 것입니다. 자존심이 완전히 뭉개질 것입니다. 꼴도 보기 싫은 놈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용서해 주는 것이 복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간절한 부탁이고 너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 자리에 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실천하고 은혜로 남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용서의 사랑, 은혜로 덮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골로새교회-이해 당사들자 간의 문제가 있고 가정간의 용납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너도 그러니 나도 그렇다!” 이 교회는 율법만이 존재한 교회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만들어 갈 가치관이 아닙니다.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덮으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오네시모를 시험대로 보내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를 용납하면 골로새교회는 은혜로 사는 것이고 용납하지 못하면 율법적인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빌레몬에게 자기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골로새교회에게 사람을 과거중심으로 바라보는 눈에서 미래지향적인 눈으로 보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은 빌레몬은 순종합니다. 노예제도가 이미 사회적으로 뿌리를 내려있고 노예노동력으로 버티어 가는 로마권에서 노예의 잘잘못을 따지 않고 무조건 용서해 버리는 일은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내올 것이며 노예 주인들에게 항의를 받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빌레몬은 바울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순종합니다.
용서해 줄 때 얻는 축복
그로부터 50년 후, 교회사에서 위대한 신학자였던 익나티우스가 처형당하기 위해 안디옥교회로부터 로마로 연행되는 도중에 편지를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에 남겼습니다. 그것은 에베소교회 교인들에 편지를 썼던 내용으로, 당신들은 훌륭한 감독을 둔 축복을 누리고 있다는 요지입니다. 그 감독이 바로 오네시모입니다. 도망자 신분에 불과했던 오네시모가 후년에 에베소의 저명한 감독이 된 것입니다. 빌레몬서가 있고 나서 50년 후의 일입니다. 만약 빌레몬의 용서와 골로새교회의 아량이 없었다면 오네시모 감독은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대감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바울의 신뢰이고 주변 인물들의 과거를 묻어준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만약에 빌레몬이 바울의 요청에 “싫다!” “용서해 주는 것이 싫다!” 했다면 에베소교회는 오네시모라는 훌륭한 감독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베소교회만의 손해가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큰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큰 불이익이 왔을 것입니다. 왜? 바울 서신 13권이 최초로 수집된 곳이 에베소이고 그 무렵의 감독이 오네시모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신에 불과한 빌레몬서가 왜 신약성경에 포함되었는가? 그 이유를 알게될 것입니다.
오네시모-이 서신에서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낱낱이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오네시모는 존경받는 고명한 감독입니다. 그리고 빌레몬서는 50년 저쪽의 일입니다. 오네시모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다루고 있는 그 책이 영원히 사라지기를 바랠 것입니다. 잘못 나온 사진 한 장, 지난날에 썼던 유치한 편지 한 통도 우리의 얼굴을 낯 뜨겁게 하는 것이거늘 자신의 범죄를 다룬 그 편지가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그러나 오네시모는 신약성경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바울과 자신, 빌레몬과 자신 사이에 일어났던 용서와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천하에 말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에 대한 보증과 추천장이 오늘 내가 있게 되었다고 말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가 말해주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은혜로다! 하나님의 은혜로다!”
빌레몬은 자기의 집을 교회로 제공하는 일만해도 큰 업적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 건물을 넘어 그 건물이 진정한 교회-하나님의 은혜가 선포되고 실현되는 은혜 중심의 교회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빌레몬은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미운 감정을 포기하고 돈까지 손해 보았습니다. 순전히 복음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재정적인 손해를 감수할 각오까지 하면서, 아랫사람에게 간청을 해가면서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빌레몬도 말씀에 순종할 때 오네시모라는 유익한 사람이 태어났고 교회 안에서 더 큰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런 행동하는 믿음의 본을 보았기에 그 아들 아킵보는 자라가면서 바울의 훌륭한 동역자가 됩니다. 이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교회는 예배당 건축도, 전도해서 사람들의 숫자를 불리는 것보다 사람을 세우고 사람들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보여주는 일들에 진력해야 합니다.
결론
찬송가 4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를 작사한 죤 뉴톤은 노예상인 출신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목사가 되고 평생을 눈물로 보내며 위의 찬송을 지은 것입니다.
우리도 한 때 오네시모나 뉴톤처럼 약하고 무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주어 유익한 사람이 되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셨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늘빛교회 안에서 받아주었습니다. 복음의 은혜로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무익한 사람이 아니라 유익한 사람입니다. 골로새교회가 오네시모를 용서와 은혜의 물결로 덮어 유익한 사람들로 만들어 내었듯이 우리 교회도 무익한 사람을 유익한 인물들로 만들어 내는 용서와 치유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내게 선물이었지만 이후로는 내가 하나님께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은혜와 용서의 복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동안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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