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땅의 소금이니
마태복음 5:13
서론
교회에서 많은 쓰는 용어가 빛과 소금입니다. 많이 쓴다는 것은 비중이 크고 대중들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소금이라는 말도 자주 쓰입니다.
"썩어가는 세상에 소금이 되자!"
너무 자주 쓰다보니까 그 말의 의미가 퇴색(退色)되어 가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 대통령이 "단호히"라는 말을 너무 남용함으로 지금은 그 말을 들어도 대통령의 의지를 믿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입니다.
소금이 되자는 말은 많이 하지만 정작 소금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의 믿음이 자꾸 관념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1. 소금은 땅의 소금을 말합니다.
팔복을 하시다 왜 소금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본문의 이야기는 새신자들을 향한 게 아닙니다. 높은 수준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정신으로, 예수님을 위해 자기의 생애를 바칠 각오로 따라나온 무리들, 제자들의 무리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이해가 쉽지가 않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실 때에는 공간이 있으니까 이 세상을 밝게하는 빛이 되라는가보다 이해가 쉽지만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어렵습니다. 이해에 거리가 생깁니다.
우리나라에는 소금의 용도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부패방지용
*식용
*약용
그러니 이해에 벽이 생기는 것입니다.
팔레스틴 지방에는 소금의 용도가 훨씬 다양합니다.
*성읍을 재건할 때
*언약의 소금-언약할 때 소금을 찍어먹으며
*제물에 소금을 뿌린다.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부정을 방지한다고
*팔레스틴 땅은 척박해서 땅을 부드럽게 할 때 소금을 뿌린다. 그 다음에 씨앗을 부리면 싹이 잘 나온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실 때는 바로 나중에 있는 해석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무리들을 향하여 세상의 악을 방지하라, 조미료가 되어라, 성읍을 재간하는 소금이 되어라! 이런 요청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땅을 변화시키는 소금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외국의 성경에는 땅의 소금이라는 말로 제한되어 쓰이고 있다합니다.
유대 나라 농사에는 땅이 투박해서 소금을 뿌린 후 씨앗을 뿌립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은 너희는 땅에 들어가는 소금이 되어 씨앗이 나올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씨앗입니까? 예수라는 복음의 씨앗입니다. 예수라는 복음의 씨앗이 땅에 떨어질 때 그 땅-사람들의 마음의 땅에 소금이 되어 씨앗이 나오도록 하는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소금의 역할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향하여도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라, 그래서 그들의 굳은 마음, 딱딱한 마음, 공허한 마음, 교만한 마음에 예수님이라는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싹이 나올 수 있도록 그 마음을 개선해주는 역할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2. 소금은 주역이 될 수 없는 성질이 있습니다.
소금은 자체로는 아무 것도 될 수 없는 특성이 있습니다. 소금은 자체로는 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제일 눈치를 많이 본 것이 음식문화입니다. 다방에도 가 본적이 없는 데 양식집에 가면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5년 전에도 무슨 모임에 갔는데 다들 스파게티를 주문하기에 나도 그걸 시켰습니다. 우동에 콩가루 버무린 것이 나와서 먹어보았더니 영 입에 맞지 않았습니다. 어찌나 본전 생각이 나던지요.
소금구이도 소금을 구어서 먹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금을 발라 구워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음식에는 나름대로 자기가 주역입니다. 생선도, 미나리도 무무침도, 콩나물들도… 그러나 소금은 자체가 음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소금을 구워서 먹을 것입니까? 볶아서 먹을 것입니까? 가루로 만들어 음식으로 먹을 것입니까? 꼭 무엇에 비비거나 찍어먹거나… 그래야 됩니다.
소금은 이처럼 대상이 없으면 안 됩니다. "너희는 소금이니"라고 하실 때에는 예수님과 우리라는 구도를 놓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금이 되라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씨앗을 싹트도록 하는 데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왜 삽니까? 예수님을 위해 삽니다. 예수님을 위한 소금구이가 되기위해 사는 것입니다.
팔복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주님을 위해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한정해서 전해진 말씀이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로 한정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위해 사람들에게로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씨앗이 되도록 소금의 역할을 해나갈 것입니다. 세상의 악을 방지하고 조미료 역할을 하면서 예수님을 홍보할 것입니다.
크리스천들 중에는 자기가 중심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조역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스페어타이어입니다. 살아가다가 어려움이 있을 때 잠시 찾는 분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의 생애는 나의 씨앗을 싹트게 하는 일을 위해 살아라, 소금이 되어라!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소금은 녹는 것만큼 효력이 나타납니다.
소금이 그 자체로 그냥 있으면 아무 맛도 낼 수가 없습니다. 심심한 물맛에 소금 맛이 나는 것은 소금이 그만큼 녹아내렸다는 것입니다. 음식도 소금이 녹아내리면 내릴수록 맛이 납니다.
소금은 녹아내려야 합니다. 녹아내리는 것만큼 그 맛이 나고 그만큼 효과를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향해 너희는 땅의 소금이니 라고 하실 때는 땅 속에서 녹아내릴 것을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소금이 땅에서 녹아내리지 않으면 땅은 땅대로 쓸모가 없거나 소금은 밟힐 뿐입니다.
우리 아이는 신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봅니다. 그러면서도 신문을 본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신앙을 마치 지식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떠한 희생도 없이, 실천도 없다면 그것이 무슨 신앙이며 예수의 씨앗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팔레스틴 사람들은 화덕을 돌로 만들었습니다. 그 바닥에는 기와를 깔았습니다. 그들은 열을 오래 보존하는 기와로 만들기 위해 소금을 깔았습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소금기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 소금은 밖에 버립니다. 그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소금이 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크리스천이라 하면서도 스스로를 희생하는 일이 없으면 굳은 사람들의 마음을 녹일 수가 없습니다. 남을 녹이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녹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씨앗을 틔울 수 있는 옥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녹이지 못한 사람들, 그들은 소금산(山)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소금산은 흙도 돌도 모래도 아니고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발에 밟힐 뿐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직분으로 그것도 감투라고 으시대는 분들이 많습니다. 큰 소금산(山)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분들을 향해 녹아서 무너지라고 하십니다.
결론
유대인들은 배교했다가 다시 돌아오면 회당 입구에 드러눕습니다. 사람들은 회당 안으로 들어가며 사정없이 그 배교자를 밟았습니다. 그 배교자는 조금도 불평을 하지 않고 그 수모와 고통을 감당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관습을 받아들였습니다. 규칙상 교회에서 제적되었던 자가 다시 용서함을 받기 전에 교회 문에 누어서 사람들이 들어갈 때에 "나는 맛을 잃은 소금이니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 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늘 이런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심정으로 교회를 출입할 때 우리 교회의 문이 한층 맛있는 소금으로, 능력 있는 예수의 소금으로 가치 있게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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