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교사적 역할
사무엘상 2장 18~21절
서론
자녀들이 살아가기에 악한 시절을 만났습니다. 우리 나라의 남학생 중 32.6%가 흡연을, 여학생은 7.5%가 흡연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10만 개 이상이 음란사이트가 있습니다. 학생 두 명 중 한 명은 음란물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청소년의 40%가 채팅 중 원조교제를 제의 받았습니다. 10명 중 네 명에 해당됩니다. 원조교제 중 절반은 중․고학생들입니다. 이 중 절반 정도가 재학생입니다. 100명 중 남학생은 10명 이상이, 여학생은 7명 정도가 성 경험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린이주일을 맞는 오늘 우리시대의 자화상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중에 사무엘처럼 많은 역할을 하고 뚜렷이 구별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무엘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제사장, 선지자. 사사, 왕을 세운 사람, 교육자, 국부? 그는 여섯 가지 중책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은 나라의 운명을 주도적으로 개척한 사람으로서 아브라함과 모세에 비견될 만합니다.
사무엘이 자라던 시대는 건강한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회막까지도 죄가 침투해 왔던 시대였습니다.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은 보이지 않던 시절, 어떻게 사무엘과 같은 소년이, 위인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사무엘을 키우는 데는 두 개의 바퀴가 필요했습니다. 첫째 가정이라는, 부모라는 바퀴입니다. 한나는 어떻게 사무엘을 키워낼 수 있었을까요?
1. 어머니는 조기교육을 했습니다.
사무엘의 이름은 "하나님께 구하여 얻은 아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고 기르다가 젖을 뗄 떼쯤에(1:24)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장소적으로는 회막으로 보내었고 연령적으로는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부모의 정을 절제했습니다. 그녀는 끝까지 서원을 지켰습니다.
사무엘이 어두운 시대에도 샛별처럼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머니의 서원, 하나님과의 약속을 철저히 지키려는 믿음의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젖을 떼는 즉시로 회막에 보내야 했기에 그는 얼마나 지성으로 그 동안 사무엘을 믿음으로 키우며 양육했을까요? 어려서부터 믿음으로 자녀를 위해 가르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했습니다.
이것이 유대 어머니들의 자녀관입니다. 그들은 자녀를 자기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받은 주인의 아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관리인, 혹은 유모입니다. 자기 생각과 방법대로 양육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법대로, 유대인의 정신으로 키웁니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녹음기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수없이 반복합니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여호와라는 이름을 배웁니다. 세상에서 태어나서 가장 먼저 듣는 단어가 여호와이고 가장 먼저 입에서 나오는 단어가 여호와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죽을 때에도 여호와의 이름에 안기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2천 년 동안 나라 없이 살아오면서도 유대국가를 지켜낼 수 있었던 정신입니다.
유대 격언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릴 때 토라를 배우면 그 말씀이 태로 흡수되어 입으로 깨끗하게 외울 수 있다. 그러나 노년에 배우면 피로 흡수되지 못하여 깨끗한 말씀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자식은 누가 키워줍니까? 학교? 교회? 이제 그 기능은 다했습니다. 누가 아이들을 책임지고 키워줍니까? 나밖에 없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고 인격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은 바로 부모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유아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 받을 때의 서약을 기억하십니까?
이렇게 서약했습니다.
"그대는 지금 이 아이를 완전히 하나님께 바치며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친히 경건한 본분을 이 아이에게 보이기를 진력하며 이 아이를 위해 기도하며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며 우리 거룩한 종교의 도리를 가르치며 하나님의 지시하신 모든 기관에서 진력하여 이 아이를 주의 양육과 교훈에서 자라게 하기를 서약하느뇨?"
한나는 서약대로 실천했습니다. 그 어머니의 서약이 있었고 서약에 준하는 어린 시절의 교육이 있었기에 사무엘은 어두움을 뚫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스라엘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믿음의 위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아 우리의 서약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어머니는 기도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젖을 뗀 후에 아이를 회막에 보냈습니다. 얼마나 아들이 보고 싶고 젖을 먹이고 싶었을까요? 그때마다 어머니는 사무엘을 보기 위해 달려갔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그 아들은 육신적으로는 바친 아들일지는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바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이 역시 한가지 일에 전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젖을 불어 오를 때마다 그 젖을 부여잡고 정을 억제하며 아들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우리 아들 사무엘을 보호해주세요. 그 아이는 어미의 서약 때문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어주시고 사무엘이 외롭지 않도록 해주세요. 회막안에 죄가 있다고 하는 데 우리 아이를 지켜주세요."
어머니의 눈물 흘리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회막 안에는 죄가 있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죄의 선봉에 서 있었습니다. 사무엘도 그 죄에 오염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선배이자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이 죄에 물들어 있는데 사무엘인들 죄에 대한 유혹이 왜 없겠습니까?
그때마다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기도, 그것은 사무엘에게는 회막의 불의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방어막이 되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는 부모의 기도가 없었습니다. 엘리가 제사장이기는 해도 기도의 뒷받침이 없었습니다. 회막이 두 아들의 방어막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회막은 죄에 대해 강한 것 같지만 쉽게 무너져 버립니다. 회막에 있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을 지켜준 것은 어머니 한나의 기도였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죄 가운데 빠져 뒹글고 있을 때 한나의 아들 사무엘은 키가 자라가면서 여호와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2:26).
이스라엘 역사에 이스라엘을 지켜낸 것은 바로 이스라엘 어머니들의 기도요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었을 때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 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영혼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애가2:18,19)
예레미야는 무너진 성곽을 향하여 울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녀들의 영혼이 무너지지 않도록 위해 울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유대 어머니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는 가정 교육, 자녀교육에서 찾았습니다. 그러기에 유대 재건의 희망도 어머니들에게서 찾아내려고 합니다. 기도로 일어서자는 것입니다. 기도로 자녀들을 위해 울며 자녀들의 영혼을 지켜내면 이스라엘은 다시 재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지 마십시오. 내 자녀들을 내가 책임지려고 해야 합니다. 기도로 자녀들의 영혼의 불침번이 됩시다. 자식들에게 어머니의 기도보다 강한 보호막은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기도의 힘으로, 흡인력으로 되찾아오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나 집에 돌아갑니다. 어머니 기도 못 잊어…"라는 영혼의 회귀가 있을 것입니다.
3. 어머니는 바른 훈계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매년제를 드리러 회막에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겉옷은 소매 없는 무릎까지 닿는 겉옷입니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세마포 에봇을 입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매년제를 드리러 갈 때마다 겉옷을 지어다 입혔습니다.
그때마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바로 그 앞에 엘리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회막 안에도 안전지대는 아니었습니다. 한나는 아들에게 제사장의 비리를 말했을 것이며 훈계를 했을 것입니다.
"사무엘아, 너는 바친 사람이다. 홉니외 비느하스 형들이 잘못되어도 너는 거들떠보아서도 안 된다. 너는 서원의 기도로 낳은 믿음의 아들이다! 알겠느냐?"
어머니의 훈계는 어떤 이들보다 사무엘에게는 교훈이 되었고 훈계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훈계보다 더 확실하고 정서적으로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에 최고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처칠은 자기 어머니가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다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어머니의 훈계를 들을 때마다 자세를 바르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부모와 교사와 토라는 같은 어원에서 출발합니다. 부모는 누구인가? 토라를 가르치는 교사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서 최고의 스승은 자기 부모입니다. 자기 자식들은 가지가 책임져 버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모를 말할 때마다 "제 스승이셨던 저의 부모님께서는…"라고 말합니다.
부모에게서 신앙교육을 받습니다. 부모는 평생 스승입니다. 그러니 완벽한 신앙교육, 가정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학교도 주일학교도 안전지대가 압니다. 내 아이들은 누가? 부모가 책임지고 가르쳐야 하고 믿음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들이 믿음을 지켜낼 수 있고 내일의 복음화를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을 키워낸 또 하나의 바퀴는, 교사라는 바퀴, 회막이라는 교육장입니다.
그는 내 자식은 잘 키우지 못했지만 다른 자식은 잘 키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교사가 살아야 합니다. 교사의 기를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습니다.
결론
사무엘은 결코 좋은 조건에서 자란 것이 아닙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말씀이 희귀하고 영적으로 어두웠던 시대에 어머니의 교육으로 그는 위대한 빛의 역사를 열었습니다.
한나와 같은 어머니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엘리와 같이 한 아이라도 분명하게 양육하는 교사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이 나라에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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