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브라함의 제단(祭壇)기도
창세기 12장 1~9절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조상(祖上)이라는 단어도 좋지만, 선조(先祖), 먼 윗대의 조상이라는 말도 괜찮은 것 같다. 원조(元祖)라는 말도 좋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에서 조상이요, 선조요, 원조가 되는 믿음의 ‘첫 대’이지만 그렇다고 요란하게 믿음의 족적(足跡)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는 ‘믿음의 조상’다운 그 대단함이 없습니다. 기적도 없고, 후세에 남길 교훈도 없고, 성경 한 권 남기지 않았습니다. 찬양도, 특별한 업적도 없습니다. 다만 매일매일 빠른 걸음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함께 걸었던 그의 생애가 우리에게 믿음의 본(本)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기도로 나타납니다. 당시에는 믿음을 습득하고 성장시키고 표현할 방법은 기도가 유일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기대했고 기도 중에, 아니면 기도 후에 마음에 와 닿는 생각이 지침이 되어 계속 앞으로 나갔고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그는 기도와 함께 성장했던 신앙인입니다.
맡김의 기도제단을 쌓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문명이 주는 혜택을 누리다 75세에 부르심을 받습니다. 중간 유숙지 하란에서 가나안 거리는 약 480Km 정도(광화문-부산시청 456km), 얼마나 먼 거리일까요? 대장정에서 가장 큰 시련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지시하신 땅은 불명확한 땅입니다. 그래서 정착할 땅을 찾아 계속 남으로 이동하는 정처 없는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흔들리는 걸음에 힘이 된 것은 제단(祭壇)입니다.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삶을 삽니다.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7,8절)
누구도 아닌, 오직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壇)입니다. 영적인 맹지(盲地)에서 부르시고 세겜까지 오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제단, 감사의 제단입니다.
기도 제단은 찬송과 기도가 있는 공(公)예배입니다. ‘이름을 불렀더라’라는 것은 ‘이름을 불러 그에게 말을 걸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고백하며 기도와 감사, 경배가 있는 경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제단 예배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여러 허물에도 ‘하나님의 벗’(약2:23)으로 성장할 수 있음은 기도 제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기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아브라함은 계속 기도로 나아갔고 기도 제단으로 믿음은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회개의 기도제단을 쌓다
처음부터 완벽한 ‘믿음의 조상’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기근이 들었다. 팔레스타인 가나안 지방은 지리적 여건상 우기(雨期)와 건기(乾期)가 뚜렷이 구분되어 대개 양력 10, 11월에 집중적인 비가 내립니다. 이때 비가 적게 오면 다음 해에는 기근이 들게 마련인데 가나안으로 이주한 아브람에게 이러한 기근은 신앙과 인내를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영적으로 어린 단계였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단단함이 없었습니다. 여호와를 향한 믿음이 없다기보다는 믿는 사람들이 어느 선에서 행동해야 할지 그 행동지침을 제대로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식선으로 판단해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의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 지역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애굽은 나일강이란 풍부한 수원(水原)으로 거의 가뭄이나 그로 인한 기근을 모르는 지역입니다. 아브람이 고향 메소포타미아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나름 지혜로운 처신 같지만 깊은 기도 후에 내린 결정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애굽은 성경에서 세속을 상징하는 나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적 도움, 수단으로 묘사되고 있다(사31:1). 그러기에 애굽행(行)은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는 경솔한 처사였습니다.
애굽에서는 기도제단이 사라졌습니다. 내 잘못을 핑계하고, 남에게 전가합니다. 온갖 망신을 당하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제단을 쌓는다. 제단에서 기도한 내용은 이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13:4)
애굽에서의 잘못을 회개하며 바르게 살겠다는 다짐의 회개기도입니다. 너무 쉽게 이집트행을 택한 것에 대한 불신을 회개하는 기도입니다. 거짓말에 대해, 아내를 지켜주지 못해서, 자신으로 애굽인들이 화를 당한 것에 대한 회개 기도입니다. 감사와 회개 눈물이 있는 제단의 흔적입니다.
한국교회가 영적 힘을 상실한 것은 자기희생이라는 제단이 사라지고, 제단에서 오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힘이 약하고, 회개가 약하고, 자기희생이 약하기에 야성(野性)이 없습니다. 회개의 기도 제단이 회복돼야 합니다. 뜨거운 회오의 눈물이 들어있는 기도가 힘이 있습니다!
기도는 구하여 얻는 것만이 아닙니다. 기복신앙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기복주의는 좋지 않습니다. 기복주의에는 윤리가 없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의지가 약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저울에 자신을 달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울에 모자란 부분들은 당연히 기도를 통해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많이 할수록 성화가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해도 성품의 변화와 성숙이 없는 것은 기복 기도에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기도제단을 쌓다
아브라함은 롯과 동행하며 살아왔습니다. 종들과 가축이 많아지자 목양지가 좁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롯은 좋은 곳,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습니다. 온 땅에 물이 넉넉했고 여호와의 동산, 낙원처럼 보이는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롯은 그 땅을 선점해 버렸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찌꺼기만 남았습니다. 롯이 먹다 남은 찌꺼기를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땠을까? 뷔페에 초대를 받아 조금 늦게 가보니 모두 먹고 찌꺼기만 남았습니다.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런 기분일 수도 있습니다. 롯에 대한 배신감과 섭섭함은 큽니다.
그런 심정으로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눈을 들어 더 먼 곳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14절)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25절)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16절)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17절)
롯이 먹다 남은 찌꺼기만 보지 말고 그 남은 찌꺼기를 가지고 큰 민족, 복의 근원을 만들어 준다, 약속하시며 그걸 믿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기도제단을 쌓습니다.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창13:18)
기도 제단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보았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은 찌꺼기를 가지고 큰 민족, 넓은 땅, 복의 근원을 만드신다는 약속에 아브라함은 감사의 기도, 희망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찌꺼기 음식이 나에게 해당 될 때가 있습니다. 좋은 것은 남들이 다 가져가 버렸습니다. 왜 나에게는 좋은 자질이 없을까요? 좋은 환경은 왜 주어지지 않았을까요? 유능한 부모들의 배경이 있었다면 좀 더 빨리 일어설 수 있지 않았을까요? 어째서 누구는 결손 가정에서 자라 유년 시절을 비참하게 보내야만 했을까요?
그 좋은 대학이 있는데 좋은 대학들은 남이 가져가 버리고 나에게는 원하지 않던 대학이 배정됩니다. 사업이 그렇고, 직장생활에서의 승진 문제가 그렇습니다. 다른 동창들은 잘 나가는데 롯이 물 좋은 땅은 가져가고 찌꺼기 같은 땅만 남겼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남은 음식 찌꺼기란, 이상적인 것보다 못한 경우입니다. 내가 기대했던 것들이 만족스럽게 성취되지 못하고 실망하고 그래서 삶에 소망이 별로 없는 것들입니다. 이럴 때 남은 찌꺼기 음식을 보면서 속상해 하고 곤혹스러운 주부의 심정이 우리 현실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먹다 남은 것을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먹다 남은 것을 버리기를 원하지 않으셨다(요6:12). 주님은 그 찌꺼기들로 뭔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내 인생도 그리 좋은 환경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제주도라는 지역적인 면에서나, 비신자가정이라는 신앙적인 분위기에서나 신체적인 면에서나 가정적인 면에서 좋은 음식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먹다 남은 찌꺼기와 같은 조건들입니다.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기에 청소년 시절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신학생 시절에도 낮은 자존감을 좀처럼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감 결여로 마음 앓이를 크게 한 것입니다.
어느 날부터 주님께서는 먹다 남은 찌꺼기를 가지고도 맛있고 멋진 음식을 만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롯이 가져가 버리고 남은 찌꺼기 같은 땅에서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을 알았습니다.
“주님, 최고의 요리사가 되시는 주님이시여! 저를 통하여 맛있는 음식을 요리해 주십시오. 찌꺼기에 축복해 주십시오! 의도를 가지시고 저를 관리해 주십시오!”
그 기도의 결과가 오늘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생각에는) 먹다 남은 찌꺼기들로 정말 멋진 음식을 만드셨습니다. 성경이 바로 그런 열전(列傳)입니다. 기드온, 에훗, 기생 라합, 야곱… 인생이 버린 찌꺼기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주물러서 맛있는 음식을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는다. 주님께서 죄 많은 사람에게 찾아가셔서 조금만 양념을 더 해주시면 거룩한 음식이 됩니다. 볼품없는 인생들에 조금만 양념을 쳐주시면 멋진 인생들이 됩니다. 기도는 작은 구름 하나를 붙들고 소나기를 기다리게 하는 능력입니다. 달걀에서 병아리 소리를 듣는 희망을 키우는 능력입니다. 죽었던 희망을 기도의 불씨를 지피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찌꺼기만 남아있는 상황을 멋진 풀코스(full course) 잔칫상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무엇보다도 센 것입니다.
(이 설교는 발행인의 저서 “그래도, 기도는 힘이 세다”를 정리한 것입니다.
단행본이 시중에 나와 있으니 52편의 설교를 한꺼번에 보시고 싶으면 구입해서 참조하세요.
오후예배나 수요예배, 금요기도회에 연속으로 하면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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