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옷을 입고 있나요?
창세기 39장 11-18절
서론
우리교회에서 옷 잘 입는 남자-베스트 드레서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성 드레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여성들은 옷차림들이 화려해서 가려내기도 힘들지만 그랬다가는 본전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옷은 무엇일까? 단지 몸을 가리고 추위와 더위를 가리고 남들에게 아름답게 보이려 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옷의 의미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 그동안 입고 살아왔던 옷은 그 사람의 문화와 신분을 나타냅니다. 판사복은 판사신분을 나타내고 경찰이나 군인들은 그 못을 보면 금방 압니다. 옷을 보면 그 사람이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어떤 신분인가, 못 매무새를 보면 때로는 어떤 인품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설명하려면 옷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어느 인물보다도 옷과 연관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가 옷을 입을 때는 그의 일생이 좋았고 옷을 벗긴 때에는 그의 일생도 함께 고난의 구덩이로 던져졌습니다.
야곱이 입었던 옷은 그의 일생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오는 게 세 가지 옷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입힌 채색 옷
야곱은 12아들 중에 요셉을 총애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채색 옷을 입혔습니다. 왜 특별히 요셉을 총애했을까요?
*라헬의 아들이기에-사랑하는 여인의 아들이기에 더욱 사랑스러웠다.
*그가 총명했기에-그의 지혜는 어려서부터 왔다.
*그가 정직했기에-그는 형들의 허물을 고해바쳤다. 그것은 그의 정직성이다.
-인물 자체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가?
그래서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혔습니다. 채색 옷은, ‘소매가 달린 긴 옷’이고 색깔이 있는 옷입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색동저고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아들임을 뜻하는 옷입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혔다는 것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이 요셉에게 새로운 신분을 더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알게모르게 리더십의 계승을 뜻합니다.
보통 가정에서 리더십은 막내들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정상적이라면, 장자인 르우벤이 가정의 리더십을 물려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도덕적으로 자격을 실추했습니다.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패륜을 저지른 것입니다.
둘째와 셋째 시므온과 레위는 너무 잔인했다. 그들에게 순서를 따라 집안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야곱은 가정의 리더십 문제를 고민하다가 은밀히 요셉에게 리더십을 승계해 주었습니다. 요셉은 10대의 나이에 들어섰을 때 이미 자질과 신뢰성을 갖춘 인물로 성장해 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요셉에게 특별한 옷을 주어 그를 다른 아들과 구별했습니다. 아들에 대한 총애와 리더십 계승을 은연중에 드러낸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들에게 은근히 미움을 받게 된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총애하시는 사람들-에녹, 아브라함, 요셉, 모세, 여호수아, 갈렙, 다윗…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채색 옷을 입고 살다 간 사람들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옷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친구됨”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쁘게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보았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둘러주시고 입혀주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채색 옷을 입고 삽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겸손과 온유와 우아함으로 옷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옷을 입혀주시면 사단은 그 사람을 주목합니다. 질투합니다. 그 사람을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질투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넘어뜨리고 옷을 벗기려 합니다. 목회자의 옷, 사장의 옷, 과장의 옷, 남편과 아내라는 옷을 벗기려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사단의 역을 대리했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옷을 벗겼습니다. 그의 옷을 벗기고 노예의 옷을 입히고 팔아버렸습니다. 형제들이 어찌 이런 일을 한다는 말입니까?
요셉은 채색 옷을 잃었지만 성품은 잃지 않았습니다. 그가 채색 옷이나 자랑하며 사는 사람이었다면 채색 옷이 찢겨져 나갈 때 그도 파멸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채색 옷보다 더 좋은 성품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악한 성품으로 변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에 대한 충성에 손상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돌봄은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의 옷을 벗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통의 옷을 입혀주셨고, 후계자의 리더십을 애급에서 훈련받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우리의 옷이 벗겨졌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옷은 직장, 지위, 우리의 명예... 등등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더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심을 늘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입힌 죄수의 옷
애급으로 끌려간 요셉은 노예복을 입고 보디발의 종이 되고 총무, 집사장이 된 것입니다. 총무이고 집사장이었지만 노예 신분은 노예 신분입니다. 노예복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집사장에게는 집사장의 옷이 따로 있습니다. 이방인으로, 그것도 아직은 국가의 이름조차 없는 부족에 불과한 떠돌이 유목민의 아들이 바로 왕의 경호실장의 집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대 출세입니다. 청와대는 운전사만 되어도 꾸벅 죽습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 서울신문사 사장 자가용을 운전하는 집사님이 있었는데 그 권세가 대단합니다.
요셉은 굉장한 옷을 입었습니다. 그래도 노예복이지 명예로운 복장은 아닙니다. 그의 삶의 진행 속도는 여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집사장의 옷마저 벗겨졌습니다, 여주인의 모함으로(13절) 그를 총애하던 주인 보디발이 옷을 벗겼습니다. 얼마나 분한 일인가요? 감옥이라니!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요셉은 하루아침에 집사장의 옷에서 죄수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습니다. 분한 마음으로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요셉은 집사장의 옷은 잃었지만 성품은 잃지 않았습니다. 죄수옷을 입었지만 그의 마음은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소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품이라는, 진실이라는 아름다운 내복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옷은 암만 육체의 눈에 보이는 옷을 사람들이 빼앗아가도 잃지 않습니다.
우리가 입는 옷은 매우 중요합니다. 옷은 그 사람의 인품과 성품. 신분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입니다. 진정한 우리의 인품은 옷이 아니라 옷 속에 들어있는 성품을 통해서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선을 우리들에게 끌어당기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세마포
열 두 형제들이 요셉의 옷을 벗겼습니다. 요셉은 옷을 잃었습니다. 아버지의 총애도, 후계자의 지위도 잃었습니다. 아들의 신분도. 옷과 함께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성품은 잃지 않았고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옷을 벗겼습니다. 요셉은 옷을 잃었습니다. 명예도, 하나님의 영광도 잃었습니다. 그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타국에서의 안정된 기반을 잃게 되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요셉은 성품을 잃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옷을 벗긴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게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성질이 난폭하게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근면했고, 어디가든지 상황에 성실하게 대처했습니다. 성품의 옷은 벗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가 가는 곳마다 거룩한 하나님의 전이 되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스님이 술집에 들어가면 그 술집이 절간이 되고,
술꾼이 절간에 들어가면 그 절간이 술집이 된다.”
요셉은 환경에 따라서 달라지는 일종의 편이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원칙을 지킨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성품을 간직하게 하신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채색 옷 속에, 집사장의 옷 속에 성품을 간직해 주셨습니다.
다시 요셉에게 옷이 입혀졌습니다. 이번에는 바로 왕이 직접 입혀주었습니다. 세마포 옷입니다( 41:42). 세마포 옷은삼베로 만든 궁중 옷입니다. 세마포 옷은 제사장의 옷감, 수의,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게 입혀진 옷입니다.
요셉에게는 세마포 옷과 함께 왕의 상급인 금사슬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왕이 주신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성품에 내려주신 보상이었습니다.
요셉은 이제 진정 야곱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자녀들 중에 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두 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난가운데서 성품을 잃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이고 상급입니다.
1960년대 중반, 아프리카 신생독립국가 콩고에서 극심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수십 명의 선교사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폭행을 당했습니다. 이 폭동 가운데 헬렌 로즈비어 의료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콩고에 갔으나 다른 젊은 여성들과 함께 반란군들에게 유린당했습니다.
로즈박사는 그의 저서 <이 산지를 내게 주옵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964년 콩고가 폭동에 휩싸여 있던 당시, 내가 하나님을 가장 절박하게 찾던 그 날 밤, 그 분이 내게 주신 말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더라도 네가 이런 비참한 경험을 한 것까지도 내게 감사할 수 있느냐?’ 로즈비어 박사는 그 질문에 ‘네!’하고 대답할 수 있었다.”
이것이 요셉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는 모든 옷들이 벗겨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처럼 묵묵히 하나님께 순종했고 그분의 손에 이끌리는 삶을 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세마포로 높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요셉의 전부가 아닙니다. 요셉은 다시 옷을 입혀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고 평생을 헌신할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옷 입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애굽에서 형제들을 만났을 때에 그의 옷을 벗긴 형제들에게 옷 한 벌씩, 아우 베냐민에게는 다섯 벌의 옷을 선물합니다.(창 45:22). 그건 하나님의 섭리 하에 형제들의 죄를 다 덮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은 사람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결론
이제 11월입니다. 11월은 아름다웠던 꽃과 잎들이 떨어져 낙엽이 되고 그 나무의 진가를 보여줍니다. 그 속의 열매들이 드러나게 합니다.
우리 인생도 시절을 좇아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옵니다. 잎들이 떨어지고 나무는 앙상합니다. 나무의 그 자체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제야 나무들은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나게 되고 진가를 보입니다.
우리는 어떤 옷을 입으면서 살아왔습니까? 철을 따라, 시대를 따라 무수한 옷들로 갈아입었습니다. 그 옷들이 사람이 입혀준 옷들입니까,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옷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 중에 누가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인가요?
우리가 보는 옷들을 외부적인 옷들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옷은 외적인 옷이 아닙니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옷-성품의 옷입니다.
육체의 옷들은 찢어져도 성품은 찢어지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옷을 잃어도 성품만은 잃어버리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아름다운 삶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11월의 끝자락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지금까지는 어떤 옷을 입고 살아왔던지 언젠가는 "수의"를 입을 때가 옵니다. "수의"를 입고 빛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의"를 입고 초라해질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수의”를 입을 때 더욱 찬란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옷을 입을 때마다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합니까?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고 멋진 양복에서 수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나라의 성문 앞에서 의의 옷을 입고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습니까? 그 옷이 바로 당신이 진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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