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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설교도 맛있다] 유럽교회의 쇠락은 박제된 예수로 왔다!(요한복음 20:30, 31)

by 강정훈말씀닷컴 2025.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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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교회의 쇠락은 박제된 예수로 왔다!

요한복음 20장 30, 31절

 

서론

종교개혁지를 잘 다녀왔습니다. 외국 다녀온 이야기, 듣고 싶지요? 이번 종교개혁지 순례탐방은 루터와 츠빙글리, 그 후견인들이 활약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 얀 후스의 체코, 칼뱅의 스위스와 프랑스… 5개국입니다. 엄청 고생했습니다. 하루에 100보도 제대로 걷지 않는 제가 16,000보, 14,000보를 걸었으니… 거기에 35도 36도를 오르내리는 고온입니다. 일행을 쫓아가느라 힘들었습니다. 동행한 고장로님의 고생이 더 많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러나요, 할까 말까 망설여지지만 흉을 보아도 내가 은퇴한 이후에 하세요! 아시는 것처럼 유럽은 무료화장실과 유료화장실이 있습니다. 무료화장실 중심으로 잘 찾아다니다가 스위스역에서 유료화장실을 갔습니다. 카드로 결제했는데 글쎄, 소변 한 번에 2234원입니다. 1원은 세금이라나요. 그게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아까운 것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지이니까 성당이나 예배당 중심입니다.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하고 멋있는지… 그러나 교인들이 없습니다. 텅텅 비어있어 주일에도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 좋은 예배당을 한국으로 이동할 수 있다면… 그 좋은 성당들이 더 이상 예배당이 아니라 구경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너무 아까웠습니다.

 

왜 이리 되었을까요? 기독교적대세력이 그리 만든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 안에서 쇠락을 자처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잘못된 생각, 비성경적인 신학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기독교를 왜곡시켜 버린 것입니다.

 

프랑스 신학자 르낭은, 예수님의 죽음을 “정치적 혁명을 통해 이스라엘을 독립시키려다 실패해서 처형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십자가형틀이 반란자만 처형하는 형벌임을 증거로 삼습니다.

 

다윗 스미드는 도덕적 감화설을 주장합니다. 예수는 희생적 죽음으로 백성들이 감동받도록 하고, 이에 유대인들이 죽음을 무릅쓴 용기로 총궐기하여 독립의 계기를 주려는 생각에서 자진하여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박애주의나 희생주의, 독립투사의 표본으로 미화시킵니다.

 

이런 주장은 공산주의자들보다 더 해롭습니다. 기독교는 박해를 받으면 더 순결하고 거세집니다. 기독교를 박애주의 표상으로 삼아버리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없습니다.

 

그 결과, 종교개혁지 5개국은 물론 유럽교회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종교개혁의 대표주자 루터의 고향인 독일인은 1.6%만이 매일 성경을 읽는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응답자의 80%가 “성경을 읽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프랑스 태생이면서 칼뱅이 활동한 스위스는 3천명 교인 등록자에 30명이 출석한다고 가이드 목사님이 직접 말해주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요? 유럽교회의 시스템이 모두 기독교중심입니다. 그래서 종교세(稅)가 도입되었습니다. 자신의 종교를 기록하고 세금 내면 종교별마다 세금이 분배되고 그 돈으로 교회가 운영되기에 따로 헌금 할 이유들이 없습니다. 그러니 구원은 따 놓은 것으로 알고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옛날 불교의 모습이 유럽 기독교 안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인으로 자처하기에 예배당이 비어버렸습니다. 바로 라오디게아교회의 모습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유럽 기독교인들은 너무 잘 사니까 구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뛰어난 도덕과 윤리를 제시하신 분으로 압니다. 물론 누구보다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사셨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 역사에 들어오신 까닭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지불되기 위해 오신 것이 목적이요,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대속물(代贖物)은 타인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행위요 값입니다. 노예의 상태에서(출21:8), 포로 된 상태에서(출6:6) 이들을 사오거나 해방시키기 위하여 지불되는 값입니다. 일종의 몸값이지요. 이는 하나님께도 해당되는 것으로 구약성도들은 죄를 지으면 속건 제물로 양(羊)을 드려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 제물이 바로 대속물입니다. 양이 인간을 대신하여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죄 값을 양에게서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구속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보혈의 값을 지불하여 죄와 죽음의 노예 상태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신 것을 설명하는 자료로 사용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에서 우리를 대속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걸 믿어야합니다. 이런 예수가 오늘 우리 중심에 있어야 기독교가 생명력이 있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정리하면서 이리 말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종교개혁의 발상지 독일과 스위스… 등의 개혁교회들이 예수를 놓아버린 것이 아깝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놓아버리고 예수의 가르침 실현에만 열심을 낸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박제된 예수, 표구화가 된 예수, 조각화된 예수, 성화 속의 예수입니다.

 

호랑이와 사자는 동물의 왕입니다. 초원의 누구도 호랑이와 사자의 힘에 맞설 수 없습니다. 그게 박제된 호랑이라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사자가 박제되고 생명력을 잃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종교개혁의 발상지 독일과 스위스… 등의 개혁교회들이 예수님의 이 생명력을 놓아버린 것이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놓아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영적 공황이 일어났고 영성의 장소들이 머리카락을 잘린 삼손이 맷돌을 돌리던 구경꾼들의 관광지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력에 접목되어야 합니다. 접목된 부분이 너무 벌어지고 생명들이 공급되지 못하면 나무는 말라버리고 삭아버립니다. 그런 생명이 없는 나무에 무슨 열매들이 풍성하겠습니까. 그게 바로 유럽교회이고 다음세대의 한국교회가 될 수도 있음에 두려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에 접촉되었을 때 능력들이 일어납니다. 어떤 능력일까요?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없애주십니다.

 

죄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자 하는 심사입니다. 내 행위로 구원받고 내 노력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내 중심 사상이 죄 중에서 으뜸가는 죄이며, 죄의 뿌리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스스로 신이 되려는 교만입니다. 그들은 창조주가 되려했고 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라 명령하는 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인간 스스로 천국에 올라가는 길을 개척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죄였고 그 죄가 전가되어 인간은 죄의 성향으로 태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속자로 오셔야 했기에 동정녀의 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죄의 요구인 죽음을 당하셨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믿는 자들이 용서 받을 수 있도록 피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라인이 있습니다. 아담에게 속한 자들과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아담에게 붙어있는 자들은 죄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행위로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 붙어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적심을 받고 그 순간 그 피는 죄를 없애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의인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부전승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사실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교훈을 좇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유럽교회가 이걸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휴머니즘사상이 일어나면서 인간의 가치만 강조하다보니 죄인의식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동성애, 마약중독, 난잡한 성생활… 이건 생명을 갉아먹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과 함께 구원자 예수도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고목나무처럼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에게 목적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든 교회 안에서이든 은퇴를 하면 인생의 동력이 확 떨어져 버리고 믿음의 열정이 떨어져 버립니다. 목표가 상실되고 삶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떨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 즉 구원의 성취라는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아까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피신해 버렸습니다. 치명적인 사탄의 세 가지 유혹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쫓아냈습니다. 주님께서 사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었기에 다른 곳으로는 눈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멸시를 받았고 오해를 받았지만 목적이 있는 삶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목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널리 실현하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돈을 목적 삼으면 돈 벌레가 됩니다. 명예가 목적이 된다면 명예의 끝이 떨어져 버리면 우습게 처신합니다. 삶의 원동력을 헛된 것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자신의 공적 비문을 만들라는 명령에 신하들은 끙끙거리다 드디어 공적비를 세웠습니다.

<먹다가 죽었다!>

목적 없이 살았던 무의미한 삶을 말해줍니다. 젊은이가 죽자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며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그때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죽음은 일찍 죽었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한 번도 인간답게 살아보지 못한 것이 이 젊은이의 비극입니다.”

 

목적 없는 삶은 10년을 더 살았다, 덜 살았다… 에 의미가 없습니다. 목적 없이 10년을 더 살았다면 그는 목적 없는 삶을 10년을 연장했을 뿐이고 10년의 죄를 더했을 뿐입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다릅니다. 목적이 있으면 어떤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목적이 없으면 인생이 무의미해 집니다. 목적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목적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뭔가 목적이 있는 교인들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 죄의 담을 헐어버리시고 화목하게 하셨기에 평화가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그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세상은 평화를 원합니다. 세상에 전쟁이 없던 시대는 없습니다. 개인들도 평안을 원합니다. 그러나 세계는 제대로 평화를 누려본 적이 없습니다. 세상은 물론 유엔도 평화를 줄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 욕구불만, 좌절감, 경제문제, 자녀의 문제는 우리들을 늘 혼란스럽게 만들고 마음에 평안을 앗아갑니다.

 

그 어느 때부터 풍성한 삶을 누리면서 가장 정신질환이 많이 일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우리의 소유가 우리의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누리던 모든 특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의지하였던 기둥이 하루아침에 스러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사방으로 포위당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평안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너희들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모든 선한 것을 마련하여 주실지어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며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신다는 그 확증에 제자들은 평화를 얻었습니다.

평안은 환경과 별개입니다. 좋은 환경에도 평안하지 못하는가 하면 안 좋은 환경에도 평화를 누리기도 합니다. 평안은, ‘일어난 일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풍랑 속에서 잠들 수 있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일은 평화를 간직하고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살아있을 때보다 주님 사후, 부활 이후에 제자 그룹은 훨씬 더 힘이 있고 용기 있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어째서 그 일이 가능했을까요?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의 교훈과 규범을 본받으려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부활 사건 이후에는 예수님 자신에 주목했습니다. 지난날에는 예수님이 그들 밖에 있었지만 부활 이후에 주님은 그들 안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사신다는 확신은 그들의 연약한 삶을 하나님에게 연결하는 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죽음의 돌무덤까지도 열어버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 분의 힘은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여기 설교문은 한낱 종이에 불과합니다. 두세 살 아기들도 찢어버릴 약한 종잇장입니다. 그러나 벽에 붙였을 때 권투 챔피언들도 찢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에 붙었을 때 이런 힘이 들어옵니다.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마, 약속하셨기에 견디는 힘, 용서의 힘을 주시며 죽음으로 세상을 얻는 힘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런 힘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해 주신 일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은 주님께서 해주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믿을 때 주님께서 해 주신 모든 일들이 나에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믿을 때 이런 힘센 자들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불러야 합니다. 생명의 예수님의 이름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결론

2021년 1월 미국 워싱턴 DC 의회의사당 야외무대에서 진행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 때 대표 기도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영부인 그리고 그의 가족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내려 주소서. 다양한 종교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의 이름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같은 해, 하원 개원식에서도 임마누엘 클레벌 감리교 목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모든 것을 유일하신 신 브라만, 혹은 다른 다양한 종교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신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남자의 이름으로(Amen) 여자의 이름으로(A-women).”

 

유일한 신 예수가 아니고 브라만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 기괴한 일들이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고 미국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류응렬 목사님은 주일설교에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내 삶에 왕이십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에게 그리스도는 신앙의 대상이었지 수준은 아닙니다. 오늘도 자유주의에서는 “예수처럼 하나님을 믿자”고 하고 개혁교회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한국교회의 쇠락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 그 생명의 이름을 놓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쇠락을 어느 정도 늦추게 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시대적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한국교회에 매일매일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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