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땅만 버릴까?
누가복음 13장 6~9절
서론
성경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식물 이름이 무얼 까요? ‘생명과’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식물’은 제외하고. 그래요, 무화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벌거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서 치마로 만들어 입은 옷이 바로 무화과입니다. 무화과는 이처럼 식물 중에서도 가장 먼저 성경에, 인류사회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는 성경에 57회나 등장하는 식물이지만 별로 좋게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덴에서도 죄를 가리우는 일에 등장하고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매맺지 못하는 행위를 책할 때 등장합니다.
신약에 들어와서는 더욱 좋지 않는 비유에 이용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시장해서 무화과나무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아무 것도 없을 때 저주받았습니다.
본문에서도 3년 동안이나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 그래서 주인에게 찍어버리겠다는 선고를 들어야만 했던 무화과.
성경 속의 무화과는 57회나 등장하고 있지만 이래저래 책망만 듣고 있습니다.
무화과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해 주고 있을까요? 사람이 세상에서 이름이 자주 등장하고 업적이 많다고 해서 모두 좋은 것은 아닙니다. 화려하고 무성하기는 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통해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삶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 무화과나무는 목적이 있습니다.
무화과는 특징이 있습니다.
무화과는 관상용이 아닙니다.-그 자라나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나무가 아닙니다. 그냥 막 자라납니다.
재목으로 쓸만한 나무도 못됩니다.-나무가 재목감이 되려면 곧게, 아니면 굵게 자라야 할텐데 무화과는 이리저리 마음대로 퍼져 재목감으로는 아무 데에도 쓸데가 없습니다.
무화과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도, 향기를 내지도 못합니다.-나무는 볼품이 없어도 꽃이 아름답거나 향기가 좋아서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경우도 있는데 무화과나무는 그럴만한 게 없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오직 열매를 위한 것입니다. 무화과는 누가 수고하지 않아도 저절로 열매가 맺힙니다. 그래서 시장한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따먹고 요기할 수 있는 나무가 무화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를 열매를 얻기 위해 심어놓습니다. 꽃을 보거나 재목감으로 심어놓은 것이 아니라 단지 열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은 오직 무화과에서 열매만을 기대합니다. 꽃이 없다거나 재목감으로 쓸모가 없다거나… 이런 투정을 하지 않습니다. 열매만 달려 있으면 만사 오케이! 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 주인이나 과원지기는 열매를 위해서 기다렸고 수고했습니다. 그동안 나무가 곧고 반듯하게 자랄 수도 있고 꽃을 피우고 향기를 날릴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환영받지 못합니다. 무화과를 심은 목적이 아닙니다.
목적은 오직 열매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그 향기에 취해있다 해도 무화과를 심은 주인의 목적은 아닙니다. 아무리 다른 것들이 풍성해도 열매가 없으면 그 나무는 땅만 버리는 격이 됩니다. 목적의 과녁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쓸모 없는 생애가 된 것을 무화과는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자연은 자연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묘한 것입니다. 생태계는 벌레 하나, 짐승 하나가 다 소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뱀-쥐를 잡아먹습니다.
먼지-병균의 전파를 막아줍니다.
토끼-풀들을 적당히 자라게 합니다.
지렁이-땅을 기름지게 합니다.
다 존재의 목적, 창조의 목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성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리는 것입니다.-그 일을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것입니다.
인류를 위한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조성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유일신 사상을 심어준 것은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목적에 어긋나는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14절,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보면서 분노에 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의 목적이거늘 그들은 화려한 종교의식에 만족했습니다. 안식일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에 연연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의식은 화려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신 목적에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는 바로 그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조성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있습니다. 나는 땅에서 큰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성공하고 출세해서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나의 존재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것입니다. 내가 꼭 성공했다고 해서 영광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잘 나간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 업적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러기에 겉으로는 화려하지 못해도 열매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인도로 파송 된 영국의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선교회는 그에게 재정장부를 상세히 적도록 했습니다. 그러려면 복식(複式) 부기(簿記)에 능해야 했으나 그는 그런 재능이 없었습니다. 회계학이나 경영학 쪽 배움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오직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뿐이었습니다.
잔액은 언제나 맞지 않았고 따로따로 적어야 할 장부는 늘 뒤죽박죽이었습니다. 결국 선교회는 그를 제명했습니다. 선교 현지에 적임이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평가였습니다. 실은 장부 기록에 적임이 아니었을 텐데 선교 본부는 선교에 적임이 아니라고 평가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는 현장을 떠났습니다. 아무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선교지를 옮겼는지, 선교 현장을 아예 떠났는지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몇 년 후 한 여 선교사님이 원주민에게 예수를 전하기 위해 벽지 정글부락을 찾았습니다. 선교사님은 가난한 이들을 친절히 대하시고 사랑하신 것, 그들의 집에 가 그들과 함께 잡수신 것, 아플 때 찾아가신 것, 주린 자를 먹이시고 병 든 자를 고치시고 상한 심령을 싸매 주신 것, 아이들을 사랑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한참 듣던 원주민들이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었던가요? 그 분이 우리와 함께 있어요!" 하는 것입니다.
원주민들이 여 선교사님을 데리고 가서 보여준 사람은 바로 선교부에서 제명당한 바로 그 남자였습니다. 그는 아직도 거기에서 복식 부기 장부를 정리할 줄은 몰랐지만 열심히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가 부름 받은 목적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 그럼에도 선교본부는 장부나 꼼꼼히 정리하는 일에 더 주목했습니다.
우리가 목적과 다른 일들에 아무리 성공하고 두각을 나타낸다 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땅만 버리는 격이 됩니다.
우리의 삶을 점검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좇아 여기까지 오고 있습니까?
2. 과원지기는 무화과나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무화과는 3년을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무화과를 경작하고 있는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주인은 찍어버리자고 합니다. 땅만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과원지기가 뭐라고 애원합니까? 8절.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과원지기는 무엇 때문에 이런 간청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보기에도 열매가 없고 그래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무화과인데, 왜 무화과를 두둔하고 있을까요?
과원지기는 무화과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생리적으로 보지 않고 병리적으로 보았습니다. 이 무화과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태생이 그런 게 아니라 어디가 병들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태생이 열매맺을 수 없는 무화과!
병이 들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어느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태생적 결함이 있다면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병리적인 현상이기에 과원지기는 무화과나무를 변호하고 그에게 다시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생태적으로 열매맺지 못하는 삶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쓰레기를 창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언제난 사람을 생태적인 불능자로 보지 않고 병리적인 현상으로 봅니다.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 속에 있는 가장 나쁜 점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가장 좋은 점을 찾아 계발해 내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야곱입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불건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다섯 번을 나타나셨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실책을 바로 잡아주시며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다림, 하나님의 시각이 만들어 낸 인물이 바로 야곱입니다. 그냥 찍어버린다 했다면 야곱은 이스라엘의 열 두 조상의 명예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자신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래서 한번 더 열심히 무화과를 살피며 병적인 현상만 잘 치료해 주면 무화과가 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런 마음은 사람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18년 간 귀신들린 한 여자, 귀신만 빠져나가면 아름다울 수 있는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생리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병리적으로 보고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3. 모두가 협력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뒤끝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상황으로 보아 무화과는 제4년부터는 많은 열매를 맺었을 것입니다.
무화과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모두가 노력했습니다.
주인은 인내했습니다.
과원지기는 직접 수고했습니다.
무화과는 열매를 맺기 위해 나름대로 애썼습니다.
모두의 협동으로 무화과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누구의 탓이라고만 젖혀 버릴 때 생산성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확신할 때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우리들에게서 얻을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무 것도 맺을 것 없는 인생으로 느껴지지만 그래도 하나님 안에서 맺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으며 살아갈 수 있는 여생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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