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에서 만나자
요한복음 21장 1~6절
서론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제자들의 모습 중 가장 초라하고 안 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3년 전에도 그들은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만 해도 당당했습니다. 명예와 부귀는 없어도 그들에게는 건강이 있었고 노동할 수 있는 작업장이 있었습니다. 바다에서만큼은 당당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철저히 무너져 버렸고 실패한 모습으로 갈릴리 바다를 서성이고 있습니다. 어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마을로 들어왔고 그들은 일찍 바닷가로 나아와 고기잡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인 사람이 일곱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갈릴리 바다에 나타난 것은 먹고 살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분부를 좇아 다시 갈릴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을 찾아온 마리아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 사실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실패한 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유능한 자들, 깨끗한 자들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3년 전, 그들을 부르셨을 때에도 그들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들, 세리, 무명의 사람들… 그때도 주님은 형편없는 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유명해졌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3년은 신바람났습니다. 그들은 큰 권세를 갖고 있는 사람들처럼 뻐겼습니다.
윤흥길의 소설 중에 <완장>이라는 장편이 있습니다. 저수지의 관리인인 임종술은 `관리'라는 완장을 차고 나니까 큰 벼슬이라도 얻은 양 날뛰었습니다. 한국인들의 권력지향을 볼 수 있는 소설입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어부생활을 하던 그들에게 주님의 제자로 선택이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벼슬이었습니다. 3년 동안 뭐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깨나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자들은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주님을 만나볼 면목도 없었습니다.
이런 이들을 위하여 주님은 갈릴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다시 시작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한 자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실패한 자들을 좋아하십니다. 그 실패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이들을 좋아하십니다. 주님은 상한 심정을 좋아하십니다.
그들은 휘어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머리를,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힘만을 의뢰하기에 하나님은 실패자들을 좋아하십니다.
자신을 아는 자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자들에게 주님은 다시 일을 맡기십니다. 주님은 실패하는 자들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해 본 적이 없는, 그래서 대단히 교만한 자들을 싫어라 하십니다.
세상 역사는 한번도 실패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실패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에 의해 더욱 따뜻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폴란드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파데르브스키는 첫 레슨을 받고 선생으로부터 "네 손은 조막손이니 아예 그만두는 게 좋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불후의 테너 가수 카루소도 처음 노래를 부르고 나서 "구멍 뚫린 문풍지에서 나오는 목소리"란 혹평을 들었습니다.
*월트 디즈니가 만화원고를 들고 신문사를 찾아갔을 때 "수준이하"라는 말을 들으며 거절당했습니다.
*자동차 왕 포드는 첫 자동차를 만든 후 후진기어를 안 달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생을 망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좌절입니다.
독일의 수상을 지냈던 비스마르크가 젊었을 때 친구와 사냥을 나갔습니다. 사냥 중 친구가 그만 발을 헛디뎌 수렁에 빠졌습니다. 친구는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으나 비스마르크는 엽총을 겨눈 후 "친구여 내 우정을 잊지말게"하면서 쏘려고 했습니다. 극한 상황에 이른 친구는 최후의 힘을 다해 수렁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뭍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친구가 불평을 했습니다.
"자네, 나를 죽이려 했나?"
비스마르크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자네의 머리에 총을 겨눈 게 아니고 포기하려는 자네의 생각에 총을 겨눈 것이라네"
우리 늘빛교회가 갈릴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 왕국을 이루어냈던 사람들은 영웅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생에서 실패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빚진자, 원통한자, 억울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이들이 4백명이 모여 다윗의 왕국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실패한 자들이 넋두리하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위임장을 받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2. 제자들은 늘 자신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를 서성이고 있는 제자들, 그들은 주님을 쫓아다니는 3년 동안 기고만장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기만 하면 큰 벼슬을 얻는다고 잔득 벼루었습니다. 그들은 감투싸움을 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두 아들에게 좌, 우의 벼슬을 원했습니다. 제자들이 듣고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그들은 상대방을 업신여겼습니다. 주님께서 배신을 말씀하셨을 때 서로 자신은 아니라며 상대방을 의심했습니다. 깨어서 기도하라고 했지만 자신들을 믿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대단한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3년의 훈련이 그들을 엉뚱한 자만심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교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이 자칫 교인들을 교만한 사람들로 만들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훈련과 수료가 문제가 아니고 인격의 변화, 삶의 변화가 문제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성경 통신 강의록으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과정을 다 마치고나면 수료증이 왔습니다.
저는 그것이 신앙의 척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만하게 행동했던 적도 있습니다.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모릅니다.
제자들의 교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철저히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3년 전, 이곳을 떠날 때 그들은 금의환향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없이 교만했고 자신감에 넘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철저히 실패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왜 다시 제자들을 갈릴리로 불러냈을까요? 예루살렘에서 다시 규합하여 교단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그들을 갈릴리로 모이도록 한 것은 항상 그들이 "나는 지난 날 어떤 사람이었나?"를 잊지않도록 하기위해서입니다.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분은 갈릴리로 모은 것입니다.
어떤 목동이 사냥을 하던 임금의 눈에 띄어 높은 벼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큰 자물쇠로 굳게 잠겨져 있는 방이 있었습니다. 부인도 자녀들도 궁금했습니다. 아무리 보여 달라고 했지만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부인은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열쇠로 열어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남루한 옷과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항상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마음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지 않고 엉뚱한 것에 욕심을 품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언젠가는 다시 그 옷을 입고 그 지팡이를 짚고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의 벼슬살이는 깨끗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 기업가들은 자신의 사무실에 사업에 실패했던 당시의 계약서를 걸어두고 일한다고 합니다.
실패는 좋은 스승이고 학교입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자신들을 회복했습니다. 자신들이 지난 날 누구였는가를. 그래서 교만하지 않도록.
우리 늘빛교회는 항상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는 갈릴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나올 적마다 지난 날 내가 처음 교회를 출입할 대 그 형편없던 자들이었음을 마음에 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도, 장로님들도… 그래야 우리의 신앙은 항상 처음처럼 겸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전도사님이라는 말이 좋아서 궂은일은 다했습니다. 천막교회를 섬겼는데 의자를 닦고 천막을 걷어올리곤 했습니다. 그런 마음이 평생 지속될 수 있었으면 성자(聖者)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세족식을 했습니다. 장로님들이 발을 닦아주시는 것을 보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저런 자세가 된다면 한국교회에 무슨 다툼들이 생기겠나, 모든 허물들을 덮어주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3. 서로를 수용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철저히 실패했습니다. 이는 한 두 사람에게서 실패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열두 명 모두가 철저히 실패한 것입니다. 배신, 부인, 의심, 피신…. 다 흩어졌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다시 주님을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면 그들은 지리멸렬했을 것입니다. 서로의 약한 모습을 다 보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실패자였습니다. 아무도 존경할 가치가 없는 자들입니다. 서로 존경할 수 없는 이들이 한 그룹을 이룬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마당에 그들이 함께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으로 나갔던지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 교단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밥벌이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세상에 한 교회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중심한 하나의 교회를 원하신 것입니다.
새로이 시작하는 교회는 집단지도체제가 아니라 누군가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했습니다. 민주사회에서는 여러 사람의 의견들이 모아지는 집단지도체제가 좋은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집단지도체제는 한 그룹을 약화시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가장 민주적인 곳이 되어야 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지도력이 요구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집단지도의 성격을 갖고 있는 교회는 안정은 되지만 힘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를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에게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요소들도 많았습니다. 충동적인 기질, 그래서 그는 말의 실수도 많았고 좌충우돌, 행동의 실수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성격 속에서 오히려 지도자의 잠재력을 보셨습니다. 그의 성격은 실수보다 실수가 아닌 것들을 더 많이 해낼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을 받고나면 그의 지도력은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지도력은 회생불능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는 엉겁결에 세 번씩이나 부인한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앞으로 어떻게 지도자가 될 것입니까? 누가 그의 말을 따를 것입니까? 모두들 미련한 사람이라고 비웃을 것입니다.
주님은 일단 제자들을 갈릴리로 불러내셨습니다. 그곳에서 베드로에게 양무리들을 맡기셨습니다.
"너는 내 양을 먹이라!"
"너는 내 양을 쳐라!"
모든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의 지도력을 인정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말씀은 베드로를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이제 서로의 상처, 허물을 감싸 안아야 합니다. 더욱 진정한 결속이 이루어졌습니다. 갈릴리는 그들에게 영원한 실패요, 다시 일어서게 하는 파송지이기도 합니다. 갈릴리의 예수가 있을진대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형제들끼리 아옹거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늘빛교회는 지도력이 회복되고 권위가 세워지는 곳이기를 바랍니다. 비록 우리의 지도자들이 실수가 많고 허물이 많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이기에 순종함과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신령한 상하의 관계가 세워져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제자들에게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주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그들의 허물이 덮어진 곳입니다.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공급 받았던 곳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고 수용함이 있었던 곳입니다.
우리 늘빛교회가 바로 갈릴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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