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약]
기억하라, 기념하라, 전하라
고린도전서 11장 23~27절
서론
오늘 성찬예식을 하기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다. 성찬예식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제정해 주신 거룩한 예식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모일 때마다 애찬(愛餐)과 성찬(聖餐)을 함께 했습니다. 그만큼 이 예식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라(remember)
주님께서는 떡과 잔을 나누시며 “이를 기념하라”고 하십니다. “기념하라”-"remember"는 “회상하다” “기억하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을 기도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념하라”하신 것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 그 분께서 제자들에게 해주셨던 사랑스러운 모든 일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늘 상기하라는 것입니다. 고마운 것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생활이 5년 차 정도 되면 거의 주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인간관계, 교우관계로 믿음들이 인간 중심이 됩니다. 사역이 우리 중심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지금은 주님을 기억할 시간입니다. 고마운 것들을 기억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를 불러 자녀로 삼아주시고 구원을 주신 그
은혜들을 기억하며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시간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33년을 사시면서 행하셨던 그 분의 생애를 기억하며 은혜를 받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기념하라(remembrance)
우리 주님께서 “기념하라”-"remembrance"-"기억하다“ ”기념하다“ ”마음에 새기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찬의 의미를 새기라는 것입니다.
성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를 위한 주님의 죽으심입니다. 그 죽으심을 통한 죄사함의 은총입니다. 거룩에 대한 회복과 거룩을 만들어 가는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이상의 것들을 성찬을 통해서 마음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기념했습니다. 유월절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들을 말합니다. 그들을 위해 죽어간 어린양의 그 숭고한 죽음을 기념하고 죄를 뛰어넘어 주신 하나님의 유월을 기념하며 감사하고 그 은혜에 감격했습니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을 기념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그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들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전하라(proclaim)
바울은 이 예식을 주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받았다는 것은 다시 전달할 것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26절,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여기 “전하다”는 “proclaim”은, “선언하다” “공포하다” “선전포고를 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식은 우리가 세상에 선언하고 공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전포고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나의 죽음으로만 죄사함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 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이런 선전포고에 유대인들은 경악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도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얻으라!”는 말에 유대인들은 이단적인 주장이라며 감옥에 가두웠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세상에 전했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공포해야 합니다.
몸으로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희생을 통해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성결함을 통해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자식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 자식들이 계속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찬 이후의 거룩한 삶을 전해야 합니다.
깨끗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속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결론
은색 족제비의 지조를 이야기함으로 성찬예식을 마치려고 합니다.
중국 길림 성(城) 산중에 서식하는 족제비 중에 은색(銀色) 족제비가 있습니다. 은색 족제비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자신의 청결함을 지키는 습성을 가졌다고 하는 데 바로 이 청결함 때문에 생명을 잃기까지 합니다. 노련한 사냥꾼들이 그 습성을 역이용하여 은색 족제비를 잡기 때문입니다.
사냥꾼은 족제비 굴을 찾아내어 그 입구에 더러운 것들을 놓아둡니다. 족제비가 사냥개에게 쫓겨서 자기 굴 입구에 헐레벌떡거리며 달려와 보면 굴 입구에 지저분한 것들이 가득 쌓여 있습니다. 굴 속 자기 집으로 들어가려면 그 더러운 오물에 자기의 은색 털이 더러워집니다. 이렇게 되면 은색 족제비는 돌아서서 사냥개와 맞붙습니다. 싸워 봤자 그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그 작은 족제비가 어떻게 잘 단련된 사냥개를 당해 낼 수가 있을까요?
싸워 봤자 피 흘리며 죽어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족제비는 굴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냥개를 향해 돌아섭니다. 은색의 순결한 몸에 오물을 묻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족제비 나름대로의 지조입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족제비의 행동은 무모해 보입니다. 오물에 몸이 더럽혀졌다고 해서 은색이 변색될 만큼 더러워질까? 냇물에 가서 씻어버리면 언제 더러워졌느냐 싶게 깨끗해 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색 족제비는 자기의 청결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향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그런 마음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세상의 불의는 우리들에게 영광과 부함을 갖다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더럽히는 불의의 영광입니다. 그 체제, 그 환경과 상대로 싸움을 거는 것은 백전백패 우리가 패하기로 되어 있는 싸움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지는 싸움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믿음과 정결과 거룩을 지키는 길이라면 돌아서야 합니다.
은색족제비처럼 돌아서야 합니다. 더러운 것으로 배불리며 목숨을 구하는 것보다는 카타콤으로 들어갔던 로마제국 치하의 성도들과 같은 믿음으로 성찬예식 이후, 우리는 돌아서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성찬을 기억하는 일이고 기념하는 일이고 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성찬예식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가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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