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과 치유목회
김삼환 목사(명성교회)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뿌리, 곧 이스라엘의 모든 생활, 예배, 역사의 출발이고, 이스라엘이 오늘날까지 힘있게 발전해 내려온 모든 배경은 출애굽에 있습니다. 출애굽에서 십계명이 나왔고 출애굽에서 예배가, 제사가 생겨났으며, 만나를 먹게 되고, 또 가나안에 이르게 됩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과일로 말하면 하나의 꼭지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을 알려면 먼저 출애굽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모든 삶의 그림자 또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고 가르쳐 주시기 위한 책이 출애굽기이고 출애굽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 목회의 모든 현장이 어디입니까? 어디에서 어떻게 목회를 해야합니까? 오는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교회를 이끌어 가야 하겠습니까? 저는 출애굽기에 그 해답이 있다고 생각해서 출애굽기를 보면서 우리가 미래 목회를 찾고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애굽기는 한 마디로 능력의 책입니다. 출애굽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의 현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무기도 하나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저들은 애굽을 이기고 바로를 이기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모든 세계를 다스리는 바로를 이기는 능력이 바로 이스라엘의 영적인 능력, 즉 하나님이 주신 능력입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건져 내시고,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오셔서 온 인류를 죄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구약 이후로 이 땅 위에 다시없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온 인류의 구세주, 한 분이신 우리 온 인류의 왕이요, 지도자가 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목회하는 현장은 출애굽 시대와 같이 우리의 힘이 점점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기도 없고 힘도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 민족을 이끌어 내야 하는가, 우리가 많은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으며 염려합니다. 온 사회의 어두운 문화, 하루하루 달라지는 지식과 정보사회의 변화, 바벨탑은 너무 높은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두려워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상의 힘을 넘어뜨릴 수 있는 큰 힘이 있다는 걸 우리는 출애굽기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세상을 정복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것으로,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넉넉히 이스라엘을 다 이끌어 낼 수 있는 그런 출애굽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애굽의 큰 힘 앞에 하나님은 힘도 없는 한 사람을 등장시키십니다. 그 출발이 아주 조그만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일강에 갈대 상자에 담겨져 떠내려갑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그 뜻이 그 갈대 상자 안에 담겨서 내려가는 것입니다. 누군가 거기에 목욕하러 왔다가 건져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섭리는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것입니다.
목회는 굉장한 것이 아닙니다. 큰 궁궐이 아니라 갈대 상자, 큰 집이 아니라 조그만 집에서, 요게벳이라는 작은 가정에서 태어난 조그마한 한 아이에게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으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일을 하찮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 선교사가 1832년 백령도에 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전혀 받아 주지 않자 군산만까지 내려갔습니다. 군산에서 우리나라의 왕이었던 순조 왕에게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성경과 또 여러 가지 선물을 보내고 두 달 동안 기다렸는데 왕이 받아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때 그 지역의 서생 한 사람이 배에 들어왔는데, 그는 조사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파견된 사람이었습니다. 배는 1천톤급의 큰 배였습니다. 대단하죠? 그 배에 무엇이 있나 조사하러 그 서생이 배 위에 올라갔는데 얼마 안 있어서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귀츨라프 선교사가 그에게 중국어 한문 성경 가운데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해 달라고 했습니다. 풍랑 속에서 최초로 한글로 번역된 것이 주기도문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로스와 맥킨타이어에 의해서 누가복음이 1877년부터 번역되었고, 나중에 1887년에 신약성경이 다 번역되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배에 올라탄 채로 못 가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우리는 바람 부는 것도, 어려운 일이 일어나는 것도, 시험도, 환난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온갖 절망스러운 것들 뿐이지만 그런 눈으로 보면 안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의 진행이고, 하나님의 큰 뜻이 작은 상자 안에 있기 때문에 바로의 행차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떠내려가는 갈대 상자는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골에서 목회하든 도시에서 목회하든, 개척하든 기존 교회에서 목회하든 우리가 가는 발걸음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움직이는 발걸음이라면 그것이 능력의 발걸음이요, 하나님께서 그 발걸음을 인도하셔서 헛된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결국 그 곳에서 전도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성경과 감자씨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목화는 문익점이 갖다 주었지만 감자는 선교사 귀츨라프가 갖다 주어서 초근목피 먹을 것이 없을 때 적어도 그 이후로 150년 동안 감자 덕을 톡톡히 보고 감자도가 생길 정도로 우리는 감자의 큰 은혜를 힘입게 된 것입니다. 그 배가 잠깐 다녀간 것 하나가 놀라운 일이 된 것입니다.
바람 살랑살랑 부는 거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고 미움 받는 것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만약 대접을 받으며 형제들간에 잘 지냈더라면 그는 아무일도 이루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쫓겨나고, 팔려간 그 자체가, 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 얼마나 귀한지… 거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고‘이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라고 생각하며 희망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읽다 보면 사건 하나하나가 세상적으로 보면 하찮은 일들이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에게는 바로와 애굽을 이길 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아론, 즉 노인 두 명이 바로를 찾아갔습니다. 모세와 아론! 아론이 무슨 힘이 되어서 간 것이 아니라 모세가 하도 말을 못하니까 모세의 말을 대신하기 위해서 아론이 따라간 것입니다. 경호원 비슷한 유단자가 아니라 두 노인이 가서 결국 애굽을 굴복을 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능력,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어린양입니다. 양의 피입니다. 나가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피가 결단을 내는 것입니다. 능력은 피에 있습니다. 이 피의 능력이 신약에 와서 양의 피가 아들의 피로 바뀌면서 이 피는 로마로 건너갑니다.
신약시대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는 로마입니다. 로마의 문화는 오랜 헬레니즘과 합작이 된 것입니다. 로마의 권력과 군사력과 아름답고 찬란한 문화와 철학과 건축과 예술과 지식과 이 찬란한 세계, 유일한 문화, 그 헬레니즘은 사람을 감탄하게 할 수 있는 ‘보이는 문명’이었습니다.
로마의 권력과 함께 세계의 우주의 탑과 같은 엄청난 문명을 찾아서 이 피가 로마로 건너갑니다. 로마에서 볼 때에, 헬레니즘으로 볼 때에 기독교는 사상도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무슨 철학적인 설명도 예술적인 아름다움도 건축학적인 능력도 지혜도 아무것도 없는, 설명도 할 것 없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십자가입니다. 더구나 이방인을 처형하는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 로마는 싸움도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버립니다. 모든 헬레니즘이 싹 무너지고 헬라 로마 땅에 십자가가 세워집니다. 싸움에 무너진 게 아닙니다. 군사력으로 정복한 게 아닙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항한 일이 없습니다. 그냥 찬송하고 기도하고 있는 순간에 위에부터 자기들에 의해서 그냥 그대로 다 무너지고 스스로 십자가를 가져다 세웁니다.
기독교는 능력입니다. 성경은 능력의 책입니다. 능력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인데, 이 능력은 결국 한 분의 능력을 말합니다. 바로 그분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땅 끝까지 온 세계로 나가는 능력으로, 이 능력이 세계적인 온 인류를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헬라 문화의 아름다움에 유혹받을 때도 많고, 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긴 하지만 절대적으로 그 능력으로만 살지 않고 세상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을 수단으로 복음을 세상의 헬레니즘의 방법을 이용해서 전하려는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오늘 이 시대도 정보 지식이라든지 여러 문화라든지, 또 교회의 건축도 많이 아름다워져 가는데, 아무리 건축을 잘해도 건물은 능력이 없습니다. 솔로몬이 7년에 걸쳐 성전을 지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결론은 그렇습니다. “네가 잘 지었지만 네가 날 배반하면 이것은 의미가 없다.” 하고 하셨습니다. “네가 날 믿는 믿음이 있어야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네가 날 잘 안 믿으면 이 건물 가지고 뭐 할 생각은 하지 마라.”라는 의미입니다.
건물은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숫자에도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애굽의 그 어마어마한 능력도 아무것도 아니듯이… 그래서 우리가 교인수를 자랑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건축, 헬레니즘이 다 그런 것들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능력에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인간인지라 헬레니즘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그 최고의 지성인들을 건지기 위해서 지성적인 설교를 합니다. 문화인을 건지기 위해서 문화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부유한 사람들을 향하여 이 세상적인 위대한 인물을 건져내기 위해서 바울도 그들 못지않은 헬레니즘으로 대항을 합니다.
그런데 한 명도 건져내지 못합니다. 능력이 없으니까… 헬레니즘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헬레니즘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헬레니즘에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헬레니즘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헬레니즘에는 내세가 없습니다. 헬레니즘에는 성령이 없습니다. 헬레니즘에는 기쁨과 소망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이 세상에 소망이 있습니까? 가면 갈수록 소망이 없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남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 건질 수 있는 능력과 지혜와 표적과 기사와 이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실패하고, 고린도에서 목회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목회는 성공했습니다. 짧은 기간에도 부흥이 일어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그 곳에서의 놀라운 경험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헬레니즘이 바로 이것입니다. 헬레니즘의 포인트는 아름다움입니다. 말의 아름다움은 말을 만드는 것입니다. 듣기 좋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감싸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제는 그런 것 가지고는 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3~5)
오늘 이 시대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능력을 찾아서 출애굽 목회를 해야 합니다. 출애굽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출애굽은 애굽을 덮을 뿐만 아니라 그 백성을 이끌어 내어서 광야로 인도해 냈고, 끊임없는 하나님의 능력은 모세가 경험한 데서 끝나지 않고 모든 백성들이 경험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중요한 시점에 와 있습니다.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남북통일의 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북한에 있는 동포를 건져내는 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준비되어 있는 주의 종들이 많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에 한계가 왔습니다. 그래서 교실이 무너져 가고 있고 대기업이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의 한계입니다.
보십시오. 사상, 정권, 정당 등 모든 것이 다 무너집니다. 우리 한국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일제시대 때 신사 참배한 것,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세상 권력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너지지 않는, 무너지는 것 같지만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하지 않고 애굽을 크게 바라보다가 우리 한국 교회가 얼마나 죄를 많이 짓습니까? 오직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피의 능력입니다. 다른 능력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광야에 나타난 능력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피의 능력만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목회를 하면서 쓸데없는 능력에 유혹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피의 능력은 모든 백성을 건져내는 능력이지만 피를 떠나서, 지팡이가 개구리 되고, 애굽이 피되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전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쓸데없는 능력을 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저도 처음에 기도할 때 교회 부흥도 안 되고 해서, “주여,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능력 있는 주의 종이 되어야 하는데, 무슨 능력이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바로를 꺾는 능력은 오직 피의 능력뿐입니다. 세상에 있는 능력으로 바로 앞에서 아홉 번이나 능력을 행했지만 꺾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능력으로는 바로를 꺾을 수 없습니다. 애굽을 이길 수 없습니다.
목회가 안 됩니다. 다른 능력은, 그 어떤 능력으로도 목회가 안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 구약 성경의 포인트, 중심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십자가는 제쳐놓고 아덴에서의 바울처럼 다른 능력을 찾아서 거기에 능력이 있는 줄 착각하는데 세상적인 것들로는 백성을 건져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인이, 전 교인이 암에서 다 고침 받아도 그 능력으로는 구원할 수 없습니다. 전교인들을 다 재벌로 만들어도 그 능력으로는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출애굽이 아닙니다. 그건 역시 애굽이지, 출애굽은 아닙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전히 죄 사함 받고 구원받고 피를 바르고 그 피로 민족을 건져내어야 민족이 살고 교회가 되고 받은 사명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 준비를 많이 하시는 분들이므로 잘 아시겠지만 출애굽기 12장이 출애굽기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이 달을 생애 첫 달이 되게 하는 겁니다.(출 12장 2절) 출애굽이 이스라엘의 첫 달입니다. 이것이 시작입니다. 다 여기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목회의 매일 매일의 시작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월절이 내 목회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의 종들의 능력은 이 세상의 능력과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여러 가지 메시지를 준비하면 할수록 권위는 떨어지는 겁니다. 힘만 들고 목회는 되지 않고, 될 것 같은 데 안 됩니다.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바로가 겁을 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이겨야 합니다. 헬레니즘보다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교인들은 헬레니즘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거기서 다 유턴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곳으로 가든지 그 곳은 길이 아니고 만족이 없습니다.
목회는 헬라를 따라가는 길목에 서면 안 됩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헛되고 헛된 데서 돌아오는 사람을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야 건져내는 것이지, 헬레니즘을 좋아하는 사람, 헬레니즘을 따라가는 사람 붙잡아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술 먹는 길을 가로막아도 안되고, 물질이 좋다고 하는 사람에게 돈 버리라고 해도 안됩니다. 물질에서 돌아서는 사람을 잡아야 됩니다. 죄악에서 돌아서는 사람을 건져내어야 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갈보리의 능력입니다.
출애굽기는 세상의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회 현장에, 내 마음 안에, 내 생활에서 버려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모든 애굽의 보물을 거절하고 영광을 거절하고 다 거절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종들은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확실히 맞습니다.
우리가 얻으려 하지 말고 기도원에 와서, 세미나에서 얻으려 하지 말고 오히려 버릴 것을 찾아내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뭐 있나? 뭐 받아 가자.” 이게 아니라 “버리고 가자, 이 산에다가 다 버리고 가자.” 그러면 내려갈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져가 봐야 복잡합니다. 들어봐야 다 그 말이 그 말이고, 더 갈 길을 못 찾습니다. 버릴 게 없습니까? 버릴 것이 많습니다. 헛되고 헛된 것들을 버릴수록 가벼워집니다.
사도들이 능력이 있었던 이유는 다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는 줄 것이 있으면 있을수록 목회가 안 됩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구약의 모세나 사도행전의 사도들이나 똑같습니다. 있으면 있을수록 능력에서 멀어집니다. 세상 것들이 내 능력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목회하면서 감투 많이 쓰는 거 다 능력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최대한으로 우리 이런 일에 유혹받지 않고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버릴 때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텐트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목회를 할 때 교인들과 거리를 멀리 두면 안 됩니다.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기도해도 40일 금식 기도한 이야기를 교인들에게 하면 그 교회 겁나서 못 나옵니다.
누가 나옵니까? 교인들과 하나 되는 이야기, 쉬운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예수님도 언제나 같이 지내셨습니다. 그래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교인과 너무 거리가 먼 생활도, 혹시 교회가 큰 교회가 되어도, 자녀들 사립학교 보낸다든지 과외를 많은 돈을 들여 시킨다든지, 좋은 옷을 입힌다든지 하면 안 됩니다.
목회는 처음부터 교인들이 농촌에 있으면 농촌에서, 변두리면 변두리에서 공부시키고, 교인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자동차도 비슷한 정도로 타야 합니다. 아무리 큰 교회라도 교인들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은 출애굽 목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목회가 크면 클수록 교인들과 자꾸 멀어지면 출애굽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가나안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제자들과 같이 자고 먹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을 건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출애굽의 목회는, 하나님의 종과 목회는 끊임없는 대적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렇게 능력이 많고 하나님이 같이하셔도 대적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애굽을 벗어나니까 무리 가운데 또 대적이 생겨났습니다. 애굽만 벗어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누나까지도 대적이 되고, 형님도 대적이 되고 동지가 없었습니다. 목회만큼은 끝까지 함께 할 동지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그분 이외에는 나와 같이 끝까지 갈이가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 출애굽기와 사도행전의 특징입니다. 거기에도 또 하나님의 능력은 역사합니다.
애굽에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또 나를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것처럼 ‘따로 세우시어 같이 하는 능력’이 주의 종들에게 늘 같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주의 종은 죽는 것입니다. 목회가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한 다음에도 이 백성과 함께 가지만 언제나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들어 주시고 모세와 함께 하시고 모세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모세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정확하게 분류하고 모세를 대적하면 하나님께서 꼭 개입하시고, 이스라엘의 대적을 하나님이 대적하셨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주의 종들입니다. 항상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반대하던 사람을 땅이 벌려서 삼키기도 합니다.
구약의 능력과 신약의 능력은 다르게 나타납니다. 출애굽기에는 다 죽습니다. 결국 몇 명만 남고 다 죽는데, 신약의 능력은 살리는 데 능력이 나타납니다. 삼천 명씩, 오천 명씩, 살리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주의 종을 반대할 때 “화 있을 진저, 나가다가 죽게 될지어다.” 이렇게 해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보다는 살리는 능력,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능력이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속함을 받은 백성이라고 해서 우리가 마음을 놓아서는 안되고, 항상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교인들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하여 가나안으로 이끄는 목회가 되어야 함을 출애굽기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 구약 성경에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는 기본 다섯 가지가 나오는데 그것은 기도와 믿음, 성령, 말씀, 교회입니다. 이것은 아주 기본이 되는 것인데, 항상 우리는 매일 매일 이 기본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 믿음, 성령, 말씀, 교회의 기본에서 수많은 발전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탁구를 오랫동안 쳤습니다. 20년을 탁구를 쳤는데 목회는 탁구와 참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주의 종에게 유익한 스포츠를 하나 소개하라면, 탁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탁구를 열심히 쳐도 별로 발전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기본에, 자세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국가대표를 하신 분이 오셔서 저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얼마나 발전을 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탁구를 치면서 늘 한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저는 모르는데 그분이 볼 때는 기울어진 거였습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왜 바로 안치고 기울여서 치냐고 하며 자세를 바로 잡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하니까 힘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분이 말하기를, 탁구는 한쪽 손으로 하는데 왜 양손을 다 흔드냐고, 왜 춤을 추냐고 했습니다. 한쪽 손은 가만히 두라는 거였습니다.
탁구는 가만히 서서 치는 것이 아니라 공이 가는 데로 발이 움직여야 된다고 했습니다. 발이 가야 힘이 있는 거지 가만히 서 있으면 힘이 없다는 거였습니다. 또 팔을 너무 많이 휘저었습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팔이 길게 나와서 치면 어떻게 공을 빨리 넘길 수 있겠느냐고 하며 기본자세에 대한 것부터 다시 가르쳐 주었습니다. 간단한 기본이었는데 저에게 많은 발전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기본은 잘 되어 있는데 발전을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연습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잘 압니다. 공부도 잘하셨고 알기는 훤하게 아는데 노력을 안 하는 것입니다. 기본은 기본일 뿐입니다. 기본은 절대로 힘이 아닙니다. 기본만 되는 것입니다. 그 기본에 의해서 노력을 해야 발전합니다.
어떤 분은 계속 노력은 하는데 기본이 없으니까 발전을 못합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기도는 많이 하는데 기본이 안 된 기도를 합니다. 설교는 열심히 하는데 기본이 덜 되어 있습니다. 교회론의 기본이 덜 되어 있습니다. 목회의 기본이 덜 되어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는 오늘 힘에 대한, 기독교의 능력에 대한, 영적 능력에 대한 기본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목회의 기본도 많고 예배의 기본, 설교의 기본 등 수많은 기본이 있지만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이 다섯 가지 속에서 수많은 동작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축구를 보십시오. 그 몇 가지 기본을 익히면서 수백 가지 동작이 생깁니다. 이 다섯 가지를 잘 조화시킬 때 별의별 능력이 다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도만 하는 분은 안됩니다. 기도와 말씀, 교회입니다. 어떤 분은 능력은 많은데, 교회론을 떠나서 탕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를 무시합니다. 무교회주의자들! 교회를 저버리고 군중을 이끌고 가던 사람은 길을 잃어버립니다.
출애굽의 목회는 언제나 ‘교회 중심’입니다. 광야를 벗어나면 항상 그 백성과 함께 가나안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교인들이 새벽기도에 몇 만 명씩 나와도 이 기본을 가지고 못 벗어나게 합니다. 거기에 계속 있으면 새로운 능력, 새 시대를 이기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떤 시대를 만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하면 다 감당할 수 있고 다 이겨낼 수 있는데 이 다섯 가지를 무시하고서는 미래를 이끌어 갈 수가 없고, 또 여기에 우리가 머물러 있어야 우리 자리가 든든하고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다섯 가지를 한 가지로만 요약하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출애굽의 목회는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모세는 늘 엎드리고 늘 물어 보고하며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사귐이 중요합니다. 목회는 사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귀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자주 연락이 될수록 좋습니다. 여러 가지 기도에 대한 기도론 책도 많이 나와 있지만 저는 이 한 가지만 연결을 지으라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믿음은 출발입니다. 매일 매일의 출발! 그래서 성경에도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하고 나오는데 하여튼 믿음은 출발입니다. 이스라엘의 애굽 출발, 가나안에 들어가는 출발 등 모든 것이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그 믿음만 있으면 주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사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침을 믿음으로 출발하고 목회를 믿음으로, 심방을 믿음으로, 설교를 믿음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매일 매일 믿음으로 행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출발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을 일터에서 “하나님, 오늘 나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일을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하면서 살아갈 때에 그것처럼 놀라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령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영적인 생명, 거듭남, 새 생명입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됨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의 교회론이지 않습니까? 에베소서가 강조하는 것은 부부가 하나되는 것처럼 주님과 교회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은 하나됨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리 목회는 하나됨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교회론은 죄인과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종노릇하던 자들, 죄의 종노릇하던 자들이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2장 12절부터 보면 하나 됨을 자세히 말씀합니다. 교회는 하나되게 하는 신비한 곳입니다. 부부가 하나 되는 것처럼 신비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누구와 누가 하나가 됩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됩니다. 신비하게도 이것은 능력입니다. 조금 전에 드린 말씀과 같이 능력이 없으면 하나가 안됩니다. 이것을 설명해야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민족과 민족 간의 대립이 이방인과 유대인처럼 뿌리깊은 민족은 없습니다. 남한과 북한은 50년 전만 해도 하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아브라함의 아들로부터, 이삭과 이스마엘부터, 에서와 야곱부터… 2000년을 내려오는 겁니다. 조금 다른 게 아니라 아예 먹는 것부터 다릅니다. 이건 죽어도 못 먹는 것을 저쪽은 좋아라 하고 먹습니다. 먹는 게 다릅니다. 모두 다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믿는 것이 다릅니다. 모든 생활이 다릅니다. 습관이 다릅니다. 그들이 우상 숭배하는 것과 이스라엘이 야훼를 믿는 것이 다릅니다. 하는 것이 전부 다 다릅니다. 그리고 원수지간입니다. 이쪽은 할례를 받고 저쪽은 안 받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같은 게 없습니다. 우리는 지역이 다르다 해도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권 안에서, 같은 음식을, 같은 정치 체제 아래서 삽니다. 다른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되기 어려운데, 이스라엘과 이방인은 너무나 달라서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가까이 갈 수 있는 공통 분모가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로 만듭니까? 아무도 하나로 못 만듭니다. 오직 교회가 하나를 만듭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유대인과 이방인은 다 같이 하나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전부 능력입니다. 교회는 능력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목사가 공장 세우고, 정치하고, 그런 유혹을 받으면 안됩니다. 멸망 받을 자가 와서 하나님 자녀 되는 것, 망할 자, 마귀에게 속한 자가 와서 구원받는 것, 저주받을 자가 와서 살아나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입니까? 교회는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데려다가 새 사람 만들고 새롭게 하는 능력이 교회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와서 이 민족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십시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이 다섯 가지 능력이 다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십자가를 떠난 기도가 많아서 우리 나라에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벗어나면 능력이 사라집니다. 믿음이든 기도든 이 능력이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능력은 많이 받는데 이 십자가를 벗어나니까 목회에도 문제가 생기고, 부흥회를 해도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천하에 기적이 나타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언제나 이 십자가에 걸려야 됩니다. 교회도 십자가에 걸려야 하나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하나를 만드는 것입니다.
남북한을 하나로 만드는 길은 우리 한국교회에 있습니다. 지금은 말도 많이 다릅니다. 저들이 공산주의 밑에서 50년, 반세기를 지나왔는데 이들을 하나로 만드는 능력, 이것을 누가 할 것 같습니까? 부모 형제가 할 것 같습니까? 정치인이 할 것 같습니까? 한국 교회가, 능력 있는 교회가 이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통일로 가는 길을 기도하며 밀어야 합니다. 독일 교회가 동독과 서독의 모든 형제들을 품듯이 말입니다. 우리도 품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됩니다.
에베소 교회의 능력은 세계의 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교회는 모인 무리입니다. 다 하나로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 와서 제발 두 가지는 묻지 마십시오. 어디서 왔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디서 온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서 온 것인데, 왜 고향을 묻습니까?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라는 찬송처럼 오직 우리들의 고향은 하늘나라 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고향을 물으면 안 됩니다.
또 한 가지는 교단을 묻지 마십시오. 그냥 장로교라 하든지, 그냥 예수교라 하든지….
한국 교회가 몇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됨으로 나아가야 하고, 또 한국 교회 교인들에게 경건과 봉사와 나눔의 훈련을 시켜서 이 민족을 위하여 큰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 시대에 맞는 프로그램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구속함을 받은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함을 받은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 받은 모든 백성들은 애굽의 삶과 전혀 다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배우고 가르쳐야 됩니다. 하나님 잘 믿는 것을 가르치는 목회,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목회를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하는 목회를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너무 심하게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깊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출애굽 목회로 돌아가야 민족도 살 수 있고 우리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능력이 있어야 이런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신 것처럼 한국 교회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민족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그 어떤 엄청난 능력, 대적도 무너뜨릴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보혈입니다. 거기에 옷을 걸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도, 믿음, 성령 충만하다고 해서 다른 길로 가면 안 됩니다. 이 동산에 와서 쓸데없는 거 다 버리고 능력으로 무장하여 내려갈 때 출애굽의 큰 역사가 섬기시는 교회와 이 민족 위에 전개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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