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 바이러스, 불같은 시험
베드로전서 4:12~14
서론
지금 대한민국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나라는 마비상태이고 국민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금요일 오전 10시현재 확진자 수가 총 2022명, 사망자는 13명으로 통계가 나왔습니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코리아 바이러스’로 둔갑하고 있습니다. 중국 우한은 간 곳 없고 대구가 마치 시작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뒤집어쓰고, 바이러스 숙주(宿主) 중국이 한국인을 경계하는 적반하장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이 시진평을 살려주는 모양세입니다.
국내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중심에는 신천지집단이 있습니다. 신천지집단은 이제 ‘신천지’가 아니라 ‘바이러스천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신천지집단 중심으로 자고 일어나면 늘어나는 확진자 상승세로 전염병의 대유행, 팬데믹(pandstrongic) 사태로 번지는 추세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철저한 주일성수로 무장해 왔던 한국교회의 주일예배를 순식간에 흔들어 버렸습니다. 교회들이 자진해서 주일예배를 중단하고 예배당을 폐쇄합니다. 대구의 교회들은 사정이 그러니 닫았지만 전국의 대형교회들도 서둘러 예배를 중단하고 예배당 문을 닫았습니다. 많은 신도들이 누구 하나로 감염되면 그 파국 효과가 크기 때문에 예배 중단은 고육지책(苦肉之策)이라고 판단됩니다. 이해는 하면서도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국가적인 재앙, 시험을 만났습니다. 이거 빨리 끝나야지 이러다가는 산업이 파탄 나고 주일을 지켜보겠다는 우리 늘빛교회의 의지도 자의든 타의든 간에 꺾일지 모릅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믿음의 시험이 있어왔습니다.
12절,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불시험이 불어 닥쳤다는 것입니다. ‘불시험’이라는 헬라어 원어는 ‘너희 중에 타고 있는 고통스러운 불’입니다. 소돔성을 파괴시킬 때의 불과 강도가 같습니다. 엄청 쎈 시련입니다.
초대교인들에게 불 시험은 핍박과 박해로 인한 집단적 따돌림, 추방, 사회적 불이익, 체포, 투옥, 순교…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넘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런 압박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불시험을 만나고 당할 때마다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합니다.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같은 시험들을 통과하면서 초대교회는 죽음도 그들을 굴복시키지 못하는 불같은 믿음이 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명력 넘치는 강력한 종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요?
초대교회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자원을 더 의지합니다.
불시험을 말하기 전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합니다. 불시험은 누구에게 오는가? 악인에게만 오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들에게는 오지 않는 것인가? 이런 문제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면, 모든 어려움을 하나님의 징계로 해석하고 그러면 하나님은 작게 보이고 문제의 크기는 더욱 확대해 버립니다. 그러면 작은 하나님으로 큰 문제 해결이 힘들지요!
고난은 왜 올까요?
자연적인 재해로 옵니다. 홍수, 태풍, 지진, 해일, 비행기 사고… 등, 이런 자연적 재해의 고난은 우연히(물론 하나님의 섭리이겠지만) 오게 되고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연의 세계 속에 있기에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내 잘잘못과 관계없이 당합니다.
도덕적인 실수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도덕적인 실수를 했던지, 상대방의 실수로 함께 고난을 당합니다. 판단을 잘못해서 어려움이 옵니다. 그래서 인생에 위기가 옵니다.
내 죄 때문에 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야곱의 고난은 순전히 자기 욕심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을 하나님께서는 왜 허락하실까요? 우리 스스로의 자원(資源)을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도덕적인 실수는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우리의 세계관을 이동하게 만듭니다.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나약함을 알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선함이 없음을 알고 자신의 죄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인생의 위기, 인생의 고난은 나의 믿음의 질(質)을 점검해 주기도 합니다. 평소에는 내 믿음의 점수를 모르겠는데, 위기를 통해 내 믿음의 수준을 알게 됩니다.
헨리 블래커비는, “신앙의 위기가 닥칠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지를 보여 준다”고 했습니다.
위기는 그가 성실한 신앙인인가, 그가 어떤 사람인가, 누구에게 소속되어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시련 앞에서 그의 처신을 보면 평소에 누구 중심의 삶을 살아왔는가를 드러내게 합니다.
불같은 시험은 힘겨운 시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게 합니다. 받으면서도 심드렁했던 하나님의 속성과 사랑인데 고난을 통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고난 거름을 먹으며 자라납니다. 고난이 없으면 언제나 자기중심의 믿음생활을 해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고난을 허용하십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선생은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기도하라”(약4:13)고 합니다. 고난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원을 더욱 의지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의 볼거리보다 하나님 안에 볼거리가 더 많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고난은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는 큰 믿음으로 일어서게 합니다.
초대교회는 고난을 통해 아름다운 성품으로 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내가 거룩한즉 너희도 거룩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탈출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로 하나님의 친(親)백성을 만들려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친백성은 도시로 말하면 직할시 같은 것입니다. 직할시는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습니다.
이스라엘은 세계에 대해 하나님의 직활시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거룩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을 놓쳤습니다. 거룩보다는 복(福)에 대한 관심이 우상 숭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계속적으로 시련과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성민이 되기 위해 비싼 수업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유대교 랍비 조셉 솔로베이치크는, 착한 사람이 왜 고통당할까?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품성을 높이기 위해 고통이 온다! 아프면서 큰다, 라는 말은 육체의 성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을 통해서 인격의 그릇이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교만 제거로 고통을 주신다! 교만은 고통을 통해 겸손으로 내려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교만의 귀머거리들에게는 고통이라는 확성기로 말씀하십니다.
-구체적 믿음으로 나가도록 고통을 주신다! 가족을 잃으면 천국은 더 이상 먼 나라가 아니고 교리가 아닙니다. 천국은 이제 또 다른 집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살고 있는 실제적인 집입니다. 그래서 사별의 고통을 통해 천국에 대한 구체적인 믿음을 갖게 됩니다.
-시야를 넓히려고 고통을 주신다! 고통을 몰랐을 때는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 고통을 당해보니 주변의 고통을 돌아보게 되고 이해되더라는 것입니다.
솔로베이치크가 말하는 고통의 최종목적은 인격 결함을 수리함입니다! 아브라함 선민은 이미 의로운 사람! 생활이 의롭지 못하기에 거룩한 성품을 만들려고 고통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불시험에 놓이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전공은 죄보다는 죄인입니다. 죄를 전공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에 대해 전공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고난은 우리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자기 성찰입니다. 자기성찰은 외부를 향하던 눈과 관심이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성찰해보면 자기 속에 의로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안에 거룩이 너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사실을 알고 가슴을 치며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거룩을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성화가 되어 가면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게 됩니다. 그러면 문제는 작아지고 사실 문제가 아닌 것을 갖고 씨름해 왔음을 보여줍니다. 성화는 온유와 겸손이라는 자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고난을 통해 더 큰 연합과 사랑으로 결속합니다.
초대교회는 시련이 있기 전 열두 제자 중심의 작은 교단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성령의 불을 받고 났을 때 폭발성이 있는 집단으로 무장했습니다. 여기에 불시험이라는 핍박이 닥치자 초대교회는 폭발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세포가 분열해 나간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시련을 통해서 하나로 묶여졌습니다. 서로가 도왔고 박해를 피해 달아난 사람은 어디서나 먹을 것과 입을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다른 교인들이 돌보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내가 순교하면 다른 교인들이 내 아이의 양육과 교육을 책임져 주었습니다. 그러니 순교도 할 수 있었습니다. 시련을 통해 그들은 단결했습니다.
야고보형제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약 5:14)고 합니다. 교회가 병든 자들을 놓고 기도할 때 교회는 단합되고 결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시련을 만나기 전에는 단순한 종교그룹입니다. 소속감이 별로 없습니다. 시련을 겪어봐야 우리가 얼마나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인가를 알게 해 줍니다.
파인버그는 아내의 질병으로 오랜 세월 슬퍼하며 지냈던 경험을 두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내가 견딜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다른 신자들이 정말로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버림받은 것 같고 무력한 감정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과 다른 신자들이 내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정말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러기에 시련은 서로를 알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사랑을 키워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느끼게 해 줍니다.
믿음은 홀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불붙는 장작더미입니다. 혼자서 성장하려면 너무 더딥니다. 서로가 함께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에게 좋은 것을 공급해 줍니다.
하나님은 섬김을 통해 부흥시킵니다. 섬김은 고난 가운데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결론
우리가 부르는 예배찬송은 대부분 미국과 유럽에서 온 것입니다. 이 찬송들이 언제 작사 작곡이 되었는가? 1618년부터 유럽 대륙을 휩쓸었던 30년 전쟁-여기에는 파괴, 약탈과 죽음과 황폐함 등등… 도무지 찬송할 수 없는 세월이었습니다. 원망, 불평, 자학, 절망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데 오히려 가장 은혜롭고 감사가 넘치는 찬송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17세기말에 환켄 나우어가 찬송가를 수집해 보았더니 32,712곡이 되었고 몇 년 후에 웨첼이 수집했더니 55,000곡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고통이 찬송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꾀꼬리는 독일의 하르쯔산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멸종되었습니다. 뉴욕의 판매상이 녹음된 새소리로 미국 꾀꼬리에게 가르쳤습니다.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새장을 어둡게 했더니 꾀꼬리들이 두려움 중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이라는 시련이 찬송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노래, 아름다운 노래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고통이 오히려 찬송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35:10 이하)라고 말합니다. 밤중은 슬픔, 고통, 절망, 좌절을 뜻합니다. 오히려 고난이 우리를 노래하게 합니다.
흑인 여가수가 노래할 때 청중이 기립박수를 했습니다. 누구에게서 사사 받았냐 했더니 “나의 스승은 고통입니다! 고통의 스승께서 나를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배우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고통이 주는 순기능이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풍랑이 있는 갈릴리바다-제자들이 아우성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꾸짖고 이어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야단치셨습니다. 직역하면, “너희 믿음을 어디 두고 다니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음을 어디에 두었습니까? 평안한 데 두고 온 것입니다.
그 믿음을 지금 사용해야 합니다. 너무 쉽게 예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때에 더욱 우리 믿음이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불시험은 우리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죄를 태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불시험은 대한민국의 산업전체와 백성들의 감정을 태워버릴 수도 있고 이 시련을 잘 견디면 대한민국은 정결함을 회복하고 더욱 강한 국가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불시험을 어떻게 극복하나, 특히 교회가 어떻게 처신할까, 하나님께서 주목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두려움으로 숨지 말고 오히려 두려움을 대적하며 의연한 모습들을 세상에 드러내야 할 기회를 만났습니다. 질병의 사자, 죽음의 사자들이 우리와 교회와 가게들과 직장을 유월(踰越)해 주시는 출애굽 유월절의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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