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영원을 보낼까?
누가복음 12장 16~21절
<서론>
미국에 제임스 케네디라는 댄스교사가 살았습니다. 돈 많은 여인들을 유혹하고 유한마담들 귓가에 “사모님, 제비 한 마리 키우시지요?” “나 제비들 많아!” “제비도 제비 나름이지요, 저는 강남 족제비입니다,” 라고 유혹하는, 그야말로 ‘강남제비족’(?)입니다.
잘 생기고 상냥한 제임스에게 걸려 돈 많은 여성들이 가정이 파괴되고 인생이 망가졌습니다. 제임스는 그 생활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집으로 가던 중 우연히 라디오를 돌리다 필라델피아 설교자 반 하우스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됩니다. 설교자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오늘이라도 죽는다면, 당신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까?”
어디에서 영원을 보낸다? 제임스는 영생, 영원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온 강남제비입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냐고? 보내기는 어디에서 보내, 죽으면 그만이지… 재수 없는 라디오방송을 끄고 제비족생활을 계속하는데 잠자리에 들면 자꾸 귓가에 맴도는 거예요, 죽은 후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 것인가? 잠을 못 이루고 번민하다 예수님을 영접했고 목사와 교수가 됩니다. 그리고 기독교전도학의 고전 <현대전도>를 씁니다.
나는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까? 죽음 앞에서 묻기에는 너무 늦습니다. 세상에서도 어려울 때를 대비해 생명보험을 들고 자녀들을 위해서는 교육보험을, 노년을 위해 연금에 가입합니다. 모두 필요할 때는 대비하기 위한 ‘개미의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의 세상, 나는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까? 사순절, 고난절, 부활절에 아직도 이런 물음에 정답이 없다면 교회 다니는 것이지 구원 받은 것은 아닙니다. 구원 확신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세 번의 생애를 삽니다. 첫 생애, 이 땅에 태어나기 전의 무의식 세상에서 아늑한 온도로 행복하게 사는 엄마 뱃속입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엄마 뱃속을 자궁(子宮)이라 합니다. 자식의 궁(宮)은 왕자와 공주의 궁궐. 얼마나 멋진 표현입니까? 내가 누구입니까? 우리 부모에게는 왕자요 공주입니다. 열 달을 제 부모에게는 최고의 대접을 받고 삽니다. 우리 모두는 자궁(子宮)에서 살다 나온 왕자요 공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처음 만나는 세상-자궁세상이 다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엄마를 잘못 만나 약물중독과 음주와 낙태로 불안하게 자궁세상에서 열 달을 삽니다. 어떤 아기들은 낙태로, 엄마의 죽음으로 자궁에서 한 생애를 마감하지만 대부분 두 번째 생애, 지구세상으로 들어옵니다. 세상에 들어오는 준비는 누가 합니까? 엄마가 합니다. 나는 하나도 준비하지 않아도 엄마가 세상에서 살아갈 준비를 다 하고 나를 내보냅니다.
엄마의 태에서 나와 내 선택과는 관계없이 누구 자식으로 태어나 70~80년의 생애를 살게 됩니다. 이때는 인생 3분의 1은 부모가 준비하고 3분의 1은 내가 준비하고 노년의 3분의 1은 자식들이 준비해 준 것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 생애로 떠납니다. 인생의 마지막 코스 영원한 세계에서는 모두 내가 준비해야 합니다. 아무도 대신 준비해 줄 수 없습니다. 내세 준비 없이 세 번째 생애로 간다면 그 영~원(永遠)을 어디에서 보낼까요?
불교철학자들은 윤회(輪回)로 풀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짐승→가축→식물→벌레→귀신… 등으로 순서 없이 계속 윤회를 한답니다. 윤회 과정에서 수행과 공덕을 쌓으면 다행히 윤회반복의 수레바퀴에서 벗어 나오게 되고 열반(涅槃)의 극락 세상에 이르게 된답니다.
정말 그럴까요? 사람이 죽으면 벌레나 귀신, 가축 등으로 태어날까요? 기독교 구원이 없다면 차라리 그렇게라도 인생의 생애가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한번으로 끝나고 ‘나’라는 존재 자체가 사멸된다면 너무 허무합니다. 그래서 윤회까지 나오지만 윤회의 생애는 없습니다! 사람은 동물, 식물과 같은 성질이 아닙니다. 사람은 영혼이 있고 정신이 있습니다. 동물과 식물에게는 생명은 있어도 영혼은 없습니다. 영혼과 정신의 존재인 인간이 영혼과 정신이 없는 동물과 식물 등의 사이를 전전하며 윤회의 과정을 반복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엄마 뱃속에서 세상으로… 죽음으로 출(出)세상! 하게 되면 세 번째 세상 외에는 더 이상은 없습니다. 이후에는 어디선가 한 장소에서 영원을 보내야 합니다. 좋은 곳에서 영원을 보내면 행복한 영원세계이고, 고통 장소로 떨어지면 고통스럽게 영~원을 보내야 합니다.
사람들이 죽을 때 아는 것 세 가지가 있어요. 사람은 꼭 죽는구나, 누구도 동행하지 못하는구나,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 하는구나…, 죽을 때 모르는 것 세 가지가 있어요. 내가 언제 죽을지, 어디에서 죽을 지, 어떻게 죽을 지도 모릅니다.
여기 부자가 나옵니다. 부자는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히 일해 사업을 확장했고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쌓아 올린 성공과 재산을 바라보며 흡족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돈 버느라 고생 많았다! 이제는 평안히 먹고 마시며 돈 쓰며 폼 좀 잡고 살자!”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 이제 네가 모아놓은 모든 재물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으악~ 그 밤에 부자는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부자는 지금쯤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고 있을까요? 그의 재산들은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블도저식 경영방법은 신화(神話)처럼 남아있는데 이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정작 그의 영혼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고 있을까요?
부자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많은 돈? 돈이 잘못이 아닙니다. 수전노였고 노동자의 몫을 착취한 악질 경영주? 그렇게 해석할 이유가 없습니다. 많이 벌고 많이 가졌다는 것? 잘못이 아닙니다. 그의 잘못은 딱! 하나! 육체를 위해서는 엄청 준비하고 쌓아놓았는데, 내 영혼을 위해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살았고 돈도 많고 자선하며 살아도 영원을 준비하지 못한 것은 치명적 실수였습니다. 부자는 육체를 위해서는 돈을 썼고 남을 위해서도 자선을 베풀었지만 정작 자기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 준비도 투자도 못했습니다. 영원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쯤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고 있을까요? 불교용어로 아홉 개의 하늘 중 이 하늘 저 하늘 구천(九天)을 헤매고 있을까요?
프랑스의 한 의사는 자기가 영혼의 무게를 알아냈다고 말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저울에 올려놓고 죽는 그 순간 몸무게 무게를 살피는 방법입니다. 실험 결과, 사람은 죽는 순간에 약 21g의 무게가 감소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혼의 무게는 21g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프랑스 의사의 관심은 ‘영혼의 무게’였으나 우리의 관심은 ‘영혼의 가치’입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어떠하든지 구원받아야 할 귀한 영혼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영혼이기에 좋은 곳에서 영원을 보내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내가 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누가 내 영혼을 책임집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냐? 무엇을 주고 목숨과 바꾸겠느냐?” 세상이 추구하는 돈, 부귀, 명예… 눈에 보이는 물질의 행복은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것으로 결국은 막판까지 우리를 속이며 영원을 준비하는 데 무관심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땅은 이 세상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고 합니다. 내가 영원을 보낼 곳은 지구가 아니라 죽음을 통해 들어갈 그 세상입니다. 죽음 이후의 그 영원한 세월을 나는 어디에서 보낼 것입니까?
인간에게 한번 죽는 것은 정해졌습니다. 모두 언젠가는 죽음의 불청객을 맞게 됩니다. 죽음으로 사멸이 아니라 천국이나 지옥 중에서 우리의 영원이 계속될 것입니다. 지옥(地獄)은 영원한 불구덩입니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옥! 지하 감옥이 아닙니까? 더 무서운 것은 영원한 고통입니다. 잠을 자다가도 지옥! 하면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미국의 지역방송국 사장이 아동 성폭력 영상을 다운받았다가 걸렸습니다. 다운받은 야동영상이 26,000개랍니다. 미쳤지요! 재판부는 1,000년 징역을 선고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착하고 남을 많이 도운 사람입니다. 지인이 말하는데 이 사람은 평생 살면서 지은 죄가 딱 하나밖에 없대요. 감리교에서 침례교로 옮긴 것! 그만큼 선했던 사람이 모든 인간 관계가 단절되고 추잡한 인간으로 천년을 죽지도 않고 감옥에서 보낸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정말 배짱도 좋아요! 감옥에는 음식도 나오고 미국 감옥은 텔레비전도 나옵니다. 견딜 만하잖아요? 이에 비해 지옥은 고통과 형벌의 극치입니다. 지옥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이 영원하고 지옥생활자 모두가 증오와 공포의 대상입니다. 희망이 없음이 더 절망적입니다. 그곳에서 지구세상에서의 구원 기회를 놓친 것을 후회하며 이를 갑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이 꿈에 지옥 갔는데 누가 에페네테스! 하고 별명을 부릅니다.
“너는 누군데 어릴 때의 내 별명을 아는가? 나는 모르겠는데…”
아무개라고 이름을 대는데 어릴 때 친구입니다. 미소년이던 얼굴이 험상궂게 변해있었고 잔득 쉬어있는 목소리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냐? 너무 괴로워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찡그리다보니 얼굴은 험상궂게 되었고 고통으로 소리 질러 음성은 쉰 소리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나의 제3생애는 이런 고통의 장소에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까? 야동으로 천년감옥을 받은 사람은 낮도 있고 밤도 있고 운동시간도 책도 읽습니다. 천년이면 나온다는 희망도 있습니다. 지옥은 깜깜하고 모든 즐거움이 사라진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영원히 생애가 계속된다…, 천년 형벌을 받았다고 비웃지만 언젠가는 내가 울 날이 옵니다.
하늘나라는 모든 즐거움이 회복되는 곳! 사랑하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모든 아픔과 슬픔이 끝나고 영원한 기쁨이 있는 곳…, 얼마나 행복한지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목사님이 심각한 병에 걸렸습니다. 진찰하러 온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오래 살고 싶으세요?” “물론이죠.” “술 좋아하세요?” “전혀 못합니다.” “담배는 즐기세요?” “못합니다.” “도박을 하거나 재미를 보는 젊은 애인이라도 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그래요? 그래놓고 무슨 재미로 오래 살려고 합니까?”
목사님조차도 제2생애에서 오래 살고 싶은 것은 본능이지만 천국이 얼마나 행복하고 사랑스런 곳인지 실감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똥에 굴러도 이생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내세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못합니다. 천국이 친근히 느껴져야 준비가 된 것입니다.
영국의 문호 C. S. 루이스에게는 살이라도 베어 주고 싶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찰스 윌리엄스였습니다. 윌리엄스가 먼저 사망했을 때 루이스는 조사(弔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천국은 무척 가까워졌습니다. 멀리 생각되던 천국이 이젠 이웃집이 되었습니다. 그곳에 내 친구 찰스가 있으니 얼마나 가까운 곳입니까?"
1년 후 아내 조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이는 유대인 이혼녀로 루이스가 노총각 때에 비밀결혼을 했습니다. 루이스는 아내를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 날 일기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제 천국은 내 집처럼 가까워졌다. 조이가 있고 찰스가 있으니 바로 내 집이 아닌가?"
이렇게 좋은 천국을 향하여 루이스는 매일 그리움으로 천국을 기다렸습니다. 제2생애에서는 고통도 사별도 있지만 제3의 생애 천국에서는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한 행복을 영원히 누리기에 천국 입성의 그 날과 하늘나라를 사모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천국을 이미 준비해 두었기에, 그런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소망이기에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세상은 제3의 생애를 어디에서 보낼 것이냐? 를 결정하는 플랫폼입니다. 천국행(行)이냐? 지옥행(行)이냐? 여기서 정해야 합니다.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죽으면 구원의 기회가 땡 처리!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출생부터 ‘지옥행 열차’ 노선 승객입니다. 지옥행 DNA칩을 장착하고 출발한 것입니다. 인류가 하나님 앞에 죄인된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에이즈 부모에게서 에이즈 감염아가 출생하듯 죄인 부모에게서 죄인이 출생하고 지옥행 운명을 갖고 나옵니다. 에이즈는 그나마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게 얼마나 다행입니까? 무뇌아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산다면 세상에! 이런 비극과 고통이 어디에 있습니까?
천국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세상에서 천국의 즐거움이 없었다면 죽어서라도 가야합니다. 미국의 한 남자가 죽으면서 시체를 의대생들의 해부용으로 하버드대학에 기부하라고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왜 하버드대학입니까? 아들이 물었더니, 우리 어머니의 소원이 하버드대학에 들어가는 것이다! 살아서 못 들어가니 죽어서라도 들어가면 어머니를 뵐 면목이 서지 않겠느냐… 그랬답니다. 천국은 죽어서라도! 가 아니라 죽어서 꼭 들어가야 합니다,
지옥행을 버리고 천국행을 갈아타려면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는 영혼을 죽였고 영원에 대한 관심이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죄는 손과 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령(영혼) 속에 박혀있는 것이기에 누구도 죄를 떼어낼 수 없고 씻어 내릴 수도 벗겨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없애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위인이 아니라 나를 위해 죽으러 오셨습니다. 종교창시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죄를 처리해 주려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 순간, 내 죄는 예수님에게 전가되고 새생명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의인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게 됩니다. 드디어 지옥행에서 천국행으로 갈아탄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중심 교리입니다. 우리가 이걸 놓치면 믿어도 헛물을 켜고 있는 것입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像)은 단테의 작품 <신곡>중 지옥문 앞에 있는 사람을 조각한 것입니다. 지옥문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만 이미 늦은 것입니다. 생각하려면 지금 해야 합니다.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고 그 생각은 무용지물에 불과합니다.
<결론>
헨리 나우웬은 공중곡예사 이야기를 합니다. 남자곡예사는 공중사다리에 달려있고 여자 곡예사는 공중곡예를 계속합니다. 공중에서 왔다 갔다 하다 탁! 손을 놓습니다. 떨어지면 죽는데 어떻게 손을 놓습니까? 내가 날아가면 상대방이 내 손을 분명히 붙잡아 준다, 남자곡예사는 실수가 없는 믿음직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여자곡예사는 손을 놓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공중곡예사가 줄을 놓듯이 두 번째 생애의 줄을 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제3의 생애에서 받아줄 사람이 있나요? 천국에서 받을까요? 내가 죽었을 때 받아주는 이가 없어 지옥으로 떨어질까요? 죽음이라는 것은 “아버지, 내가 갑니다! 나를 받아주세요!” 생명줄을 놓으며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영화의 끝자락처럼 가 나오는 날, 생명줄을 놓게 되는 날! 내 손을 잡아줄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세상 어떤 것들은 못 이루고 못 잡아도 두 번째 생애에서 예수님은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영원에서 영혼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안전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좋은 곳에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