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지(客地)에서…
시편 137:1~9
<서론>
설명절입니다. 명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 키워드(keyword)는 무엇일까요? 유대인에게 명절 키워드는 성전, 혹은 예루살렘입니다. 유대에 3대명절이 있는데 성인남성이면 명절에는 필히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제사에 참예해야 합니다. 만약 성전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불경건한 인물로 낙인찍히고 짐승 취급을 받습니다. 일종의 종교적 사회적 민족적 ‘왕따’(상놈)입니다. 그러니 명절에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어때요? 명절! 어떤 생각이 들지요? 어린이들은 세뱃돈? 1순위지요! 며느리는 장시간을 어떻게 ‘시월드’에서 있냐? 어휴~ 사위는 ‘처월드’에서 어떻게 하룻밤을 자냐? 어휴~ 결혼적령기 분들은, 너 언제 결혼할 거냐? 어휴~ 비신자 가정의 크리스천들은 제사문제로 어휴~ 주부들은 돈~ 설비용은 평균 93만3000원, 어휴~. 설 명절에 신나는 것은 용돈이 생기는 아이들 뿐, 어른들의 명절 키워드는 스트레스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명절 키워드는 고향, 그리고 가족입니다. 명절은 고향 가는 날, 흩어졌던 형제들이 만나는 날, 명절은 고향에서 형제들과 유년의 추억을 만나는 날… 그래서 명절이 되면 너도나도 고향을 찾아 (노래)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대이동을 합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객지(客地)에서…” 입니다. 저는 객지생활 40년을 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60~70년 객지생활에 고향에 가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고향에 안 가는 사람보다 못 가는 사람의 심정은 다릅니다. 더 애통하고 그립고 죄송하고 정치가들에 화가 나지요! 김일성 3대를 생각하면 미칠 거예요. 오랜 객지생활은 일단은 6.25 전쟁 탓이잖습니까?
그런 분들이라면 본문 시편 137편은 남다를 것입니다. 1절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바벨론의 강변이라면… 이건 객지를 넘어 타국입니다. 객지와 타국은 느낌이 또 다릅니다. 한국에서 고향을 그리는 마음과 저 아프리카 이름도 알려지지 않는 나라에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다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바벨론제국의 포로로 끌려와 있습니다.
여러 강변에 앉아서… 유대인들이 동일한 날, 동일한 시간에 여러 장소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암시는 없지만, 민족적 절기로 보입니다. 지난날, 명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예배하며 페스티벌 축제를 벌여야 할 시간,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이국땅에서 명절 페스티벌을 벌이는 대신 강가에 앉아서 울고 있습니다. 우리들 중의 누구처럼! 그 다음이 참 처량합니다.
2절,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버드나무는 잎사귀가 하얗고 은빛이며 가지가 가늘고 길어 잘 흔들립니다. 버드나무는 바벨론의 포로가 된 자신들의 처지입니다. 힘이 없어 바람에 흔들리는 대로 살아가는 버드나무, 바벨론에서 차별과 수모를 당하면서 이리 맞고 저리 얻어터지는 유대인의 신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었습니다. 수금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찬양할 때 동반되는 악기인데 포로생활의 시름과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수금을 켜며 애가(哀歌)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수금조차 버드나무에 걸었다는 것은 연주하기를 중단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왜 수금 연주를 중단했을까요? 이유는 다음절에 나옵니다.
3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바벨론 사람들이 유대인을 조롱하려고 술좌석에서 어이~ 쥬시(유대인)~ 너네 신에게 제사할 때 부르는 그 노래 있잖아? 한 곡 해봐~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은 유흥(遊興)을 위해 찬송하거나 성전예배곡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예배곡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께만 올리는 영광의 찬양입니다. 그런 찬양을 어찌 감히 이방인의 여흥(餘興)에 동원된단 말입니까?
이런 경우입니다. 어느 부자가 노래만 나오면 신나게 춤춘다는 원숭이를 비싼 값에 구입했습니다. 부자는 원숭이가 춤추는 것을 보려고 "♬ 원숭이 엉덩이는 빠~알게,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라고, 노래를 계속 불러주는데, 원숭이는 춤출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부자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노래를 불러주는데도 왜 춤을 추지 않는 거냐? 너 바보야?"
그랬더니 원숭이 왈…
"넌 니네 애국가 나올 때 춤추냐?"
우리 선진들이 일본 땅에 끌려가 술자리에서 애국가를 불러보라며 조롱하면 애국 악사(樂士)가 애국가를 부르겠어요? 조선의 악기 가야금으로 ‘아리랑’을 부르며 망국의 설움을 달래는데 일본인들이 가야금으로 일본 국가(國歌) 기미가요(君が代)를 켜보라고 합니다.
“천황의 통치시대는 천년만년 이어지리라, 모래가 큰 바위가 되고, 그 바위에 이끼가 낄 때까지…”
지조 있는 음악가라면 다른 악기도 아닌, 민족의 악기 가야금으로 이런 ‘기미가요’를 연주하겠어요? 못합니다! 차라리 가야금을 불에 태워버리던지 손목을 잘라버릴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그 심정입니다. 지금 성전예배곡을 강요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3절,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황폐케 한 자는, '큰소리를 지르는 자' '고문하는 자' '남을 괴롭게 하는 자' '포로로 끌고 간 자'… 라는 의미입니다. 고문관이요 파괴자요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자입니다.
그런 자들이 3절,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노래를 청한 것입니다. 객지에서 얼마나 비참합니까? 명절이 되어 유대고향을 그리는 노래를 수금으로 켜는데, 바벨론사람들이 어이~ 그 수금으로 성전에서 예배하던 한 곡을 멋지게 뽑아봐~ 팁 줄까? 놀립니다. 아니면 고문관처럼 강요합니다.
유대악사들은 입장도 난처하고 봉변을 당하기 딱! 입니다.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겠다고 가야금을 깨버리는 애국 악사(樂士)처럼 유대 악사(樂士)들도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4절,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여기 이방 땅은 단순히 낯선 땅, 객지가 아닙니다. 불결한 땅, 불결한 음식으로 여흥을 나누는 불결한 민족을 말합니다. 불결한 장소에서 거룩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냐?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과 성전, 거룩한 땅을 황폐하게 만든 놈들 앞에서 무엇이 즐겁다고 노래를 부를 수 있겠냐! 그렇게라도 노래를 강요하면… 결연한 의지를 표명합니다.
5절,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비록 객지생활, 타국살이를 하지만 주권을 빼앗기고 포로생활을 한다고 하나님만을 송축하는 수금으로, 입술로 술좌석에서 여흥을 위해 노래를 한다면 그것은 예루살렘을 잊어버리는 배교와 배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심하게 말하면 오른 손을 찍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6절,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이런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나의 가장 큰 기쁨이다! 내 악기 연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최고 기쁨이고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면서 연주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 대신에 사람을, 예루살렘 대신에 바벨론의 번영을 노래하게 된다면 차라리!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하나님께서 주신 내 입을 무익한 목적에 사용된다면 그 혀는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입이 무용지물 벙어리가 되거나 혀를 깨물고 죽는 편이 낫다는 순교자적인 자세를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벨론 유대 포로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세 가지입니다. 제1의 선택, 도피주의 혹은 신비주의로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에 중독되고 아니면 광야로 나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사는 것입니다. 제2의 선택은, 동화주의입니다. 아주 바벨론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금을 켜라면 켜고 노래하라면 노래 부릅니다. 유대인 혈통을 버리고 철저히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3의 선택은 바벨론 안에서 믿음을 지키며 히브리인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제3의 길을 택했습니다.
제3의 길을 택한 유대인들은 다섯 가지를 자기들의 신념으로 삼습니다.
-말씀 회복운동. 저들은 처음에는 바벨론제국의 위용에, 전차군단에 절망합니다. 우리나라 독립과 해방은 영원히 글렀구나…, 그러나 말씀을 보니 유대멸망은 군대가 없어 망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서면 하나님께서 회복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두루마리들을 찾아서 구약성경을 종합하고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메시아 대망사상. 지금까지는 왕 때문에 흥(興)하고 왕 때문에 망(亡)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 왕은 진정한 대안이 아닙니다.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신적인 존재가 예루살렘에 올 것이고 그 메시아가 오는 날, 더 이상 유대왕국이 망하거나 포로로 잡혀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여 오소서~ 메시아 대망사상으로 희망을 품게 됩니다.
-회당운동. 말씀회복운동을 위해 회당을 세웠습니다. 성전만 바라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작은 회당을 세워 말씀을 공부하고 신앙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정신과 얼을 이어가는 일종의 학교입니다. 10명이면 회당을 세웠습니다. 이게 정신적인 지주가 됩니다.
-유대인 상술. 무얼로 먹고 사나? 공무원도 안 되고 사업도 안 됩니다. 장사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누우며 장사를 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상술로 세계를 지배하는 축복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자녀교육. 상술(商術)로 돈을 벌었습니다.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 자녀교육입니다. 바벨론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자녀들입니다. 그들이 히브리인의 정체성을 갖는 것! 신앙을 전승받는 것! 그래서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 이런 유대 정신과 계승을 위해 최고의 엘리트들을 교사 랍비로 세웠습니다.
서독 수상을 지냈던 빌리 브란트는 19세기는 군사력이, 20세기는 경제력이, 21세기는 자녀교육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2천5백년 전에 교육의 중요성, 자녀교육의 중요성을 알았던 위대한 국민들입니다.
이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운동으로 저들은 바벨론의 문화와 습관들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눈으로는 7절 이하의 상황을 바라봅니다.
7절,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절,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절,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유대인들은 민족태동기부터 사방 곳곳에서 핍박과 공격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를 삼켰던 고기가 삼키지 못하고 뱉어냈던 것처럼 유대를 삼켰던 나라는 모두 망했습니다. 7절에서는 에돔 자손, 즉 가나안의 여러 부족들이 망했고 지금은 8절, 조롱을 일삼고 하나님을 우습게 아는 바벨론제국도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어린 것들이 바위에 메어치듯 망할 때가 온다고 신음하듯 노래를 합니다.
바벨론 강가에 앉아있는 유대인들,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버렸습니다. 아름다운 수금의 음악은 나오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 속에 결연함이 있습니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힘이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부르는 노래는 혼(魂)으로 부르는 노래이고 힘이 있는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한 사람은 누구도 당하지 못합니다. 이런 음악을 다음세대 자녀세대에 걸었던 것입니다. 버드나무에 걸었던 수금을 다음세대 자녀교육에 걸었던 것입니다.
이게 명절을 맞이하는 유대인의 각오입니다. 내가 어떻게 선민으로 택해주시고 메시야 국가 이스라엘을 조성해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거짓 신에게 수금을 켤 수 있느냐, 내 찬양이 어떻게 술좌석의 여흥을 위한 노래가 될 수 있느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너희들의 시시덕거리는 일에 입을 빌려줄 수 있느냐?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악기를 켜는 내 손목을 잘라버리고 혀를 잘라버리겠다! 수금은 버드나무에 걸어버리고 입술은 벙어리로 살겠다! 이런 순교자적인 각오를 유대인들은 명절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망했습니까? 언제도 말씀드렸지만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 역사 속에 일어났던 문명은 모두 28개, 그 중 이집트문화, 로마문화 그리스문화… 18개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남아있는 10개 중에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9개는 쇠락 중입니다. 수천 년을 죽지 않고 계속 성장하는 문명은 유대문명 하나라고 밝힙니다. 눈에 보이는 수금은 버드나무에 걸어버렸고 음악은 사라졌지만 자녀들에게 믿음의 수금을 걸었고 자녀들로 미래시대의 대안을 삼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세계최대의 문명과 역사를 지닌 이스라엘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명절입니다. 고향을 찾지 못해 마음이 아픕니까? 이젠 부모님도 안 계시고 명절에 갈 고향도 없습니까? 북한에 고향을 두고 오랜 세월 실향의 아픔으로 명절을 맞고 있습니까?
바벨론에서 맞이하는 조국의 명절(꼭 명절이라는 암시는 없지만) 바벨론 강가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놓고 눈물을 흘리는 유대인들에 비하면 우리 명절은 사정이 훨씬 낫습니다.
대신에 세속주의라는, 다원주의라는, 제사문화라는 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일에는 너네들 찬송을 부르고 우리들과 있을 때는 우리 노래를 부르자고 합니다. 단순한 유행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는 너네식으로 살고 평일에는 우리식으로 살자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수금들, 입술을 성별하지 못하면 세속화된 믿음을 자식들에게 대물림을 합니다. 기독교 집안 문화가 몇 대나 대물림되겠습니까? 3대 4대만 지나면 우리 집안의 신앙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 옛 조상들이 섬겼던 신에게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것이 내게 재앙이 아니면 무엇이 재앙이겠습니까? 우리 믿음의 터를 더욱 굳세게 뿌리를 박는 믿음의 명절로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절기설교에 올린 내용과 하반부가 다릅니다.)